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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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생활 하면 장밋빛, 장밋빛 하면 고교 생활. 이렇게 호응 관계가 성립된다. 서기 2000년, 현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국어사전에 등재될 날도 머지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고등학생이 장밋빛을 희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컨대 공부도, 스포츠도, 연애도, 좌우지간 온갖 활력과 활동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회색을 선호하는 인간도 있거니와, 심지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조차 그런 인간은 적지 않다. 하지만 그거, 꽤나 쓸쓸한 인생이다. -11쪽

그러고 보니 고전부란 무엇을 하는 동아리인가. 그것을 아는 학생은 이미 학교에 없다. 교사에게 물어보고 다닐 만큼 궁금한 것도 아니다. 누나에게 물어보면 알겠지만 지금쯤 베이루트에 있을 것이다. 뭐, 활동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것은 흔치 않아도 존재 가치가 명확하지 않은 단체는 쌔고 쌨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지 모른다. -49쪽

나는 가끔 특이하다는 말을 듣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증거다. 나는 위쪽의 맑은 물도, 바닥에 가라앉은 앙금도 아니다. 상승도, 하강도 지향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사토시의 말이 맞았다. '회색으로 살고 있는 건 호타로 너뿐인 것 같은데'.
학력만 그런 게 아니다. 특별 활동, 스포츠, 취미, 연애……. 요는 인간성의 문제이리라.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도 있다. 국어사전에도 이제 곧 등재될 텐데, 고교 생활 하면 장밋빛이다. 그리고 장미는 필 장소를 얻어야 비로소 장밋빛이 될 수 있다.
나는 적합한 토양이 아니다. 그뿐이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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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Z 밀리언셀러 클럽 84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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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습니다. 어리석거나 약해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이 그렇죠. 믿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든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내가 그런 사람들보다 더 영리하다거나 더 잘났다고 우기고 싶지도 않아요. 내 생각에 정말 중요한 건 우리가 고향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나는 우연히도 자기 일족이 멸종될까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조상으로 둔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자 사고방식의 일부죠.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55쪽

진실은 CIA든 미국의 어떤 공식, 비공식 정부 기관이든 간에 그렇게 전지전능하게 모든 것을 꿰뚫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철인들이 아니라는 거요. 우선 우리에겐 그만한 자금이 없어요. 심지어는 백지 수표를 휘날리던 냉전 시대에도 지구 상에 있는 모든 뒷방, 동굴, 골목길, 매음굴, 엄폐호, 사무실, 가정, 차, 논을 감시할 만한 눈과 귀를 동원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소. 오해하진 마시오. 우리가 무능하다는 말을 하자는 건 아니니까. 아마 우리 팬들과 비평가들이 오랫동안 우리가 했다고 의심했던 일들 중 일부는 정말로 우리 작품일 수도 있소. 하지만 진주만 시절부터 대공포 시절까지 떠돌던 모든 터무니없는 공모 이론을 합쳐 보면 미국보다 더 강력한 조직일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노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조직이 나올 게요.-77~8쪽

우리는 고대의 비밀과 외계인의 기술을 지닌 은밀한 초능력 집단이 아니오. 아주 현실적인 한계와 극단적으로 제한된 재원을 가진 조직일 뿐인데 모든 잠재적인 위협을 추적하느라 그 빈약한 재원을 다 써 버려야 한다는 게 말이 되오? 이 점이 바로 정보기관의 실상에 대한 두 번째 신화를 건드리게 되지. 우리는 우연히 새롭고 그럴듯한 위험을 찾기를 빌면서 마냥 부족한 재원으로 무리하게 일을 벌일 순 없소. 대신 이미 분명하게 존재하는 위협을 찾아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거지.-78쪽

선생은 경제에 대해 좀 아시오? 내 말은 전쟁 전 알짜배기인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해 좀 아냐 말이오. 그 경제란 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시오? 난 그런 거 잘 모르고, 안다고 떠들어 대는 놈들은 모두 헛소리를 하는 거요. 경제에는 어떤 규칙도 없고, 과학적으로 절대적인 사실도 없소. 돈을 따는 것도 잃는 것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노름과 같은 거지. 그나마 납득이 갔던 유일한 규칙은 워튼 경영대학원의 경제학 교수가 아니라 역사학 교수에게서 배운 거요. 그 양반이 그러더군. '두려움.'
"두려움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고가의 상품이다."-89쪽

늙는 게 두렵고, 외로울까봐 두렵고, 가난해질까 두렵고, 실패할까봐 두려운 것.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지. 두려움이 바로 핵심이라는 거요. 인간의 두려움만 건드리면 뭐든 팔아먹을 수 있다. 그게 내 영혼의 진언이었소.-90쪽

당신이 정말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소? 범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냐고? 질병, 실업, 전쟁, 아니면 다른 사회적인 질환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소? 절대 아니지. 그나마 바랄 수 있는 건 사람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그 문제들을 관리해 주는 거요. 이런 건 냉소주의가 아니라 성숙이라 부르는 거요. 비를 멈추게 할 순 없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붕을 만들어 놓고 새지 말라고 빌거나, 아니면 최소한 우리에게 표를 던질 사람들은 비를 맞지 않게 해 주는 거지.-99쪽

대통령은 내게 물리적이거나 물류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힘을 주셨지. 유감스럽게도 대통령이든, 지상의 그 누구든 내게 줄 수 없었던 것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는 힘이었소. 내가 전에 설명했던 것처럼 미국의 노동력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많은 경우 그런 분리에는 문화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소. 우리 강사들 중 절대 다수가 이민 1세대들이지. 이 사람들은 자기 한 몸 돌보는 방법도 알고 있었고, 최소한의 물자를 가지고 자기들의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 사람들이오. 뒷마당에 텃밭을 가꾸고, 자기 집을 직접 수리하고, 기계적으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최대한 오래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지. 이런 사람들이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우리의 편안한, 일회용 위주의 소비 생활 양식과 결별하도록 가르치는 게 아주 중요했소. 비록 이들의 노동력 덕분에 애초에 우리가 그런 생활양식을 누릴 수 있었지만.-227~8쪽

"지금이야말로 이상을 좇아야 할 유일한 때요. 우리가 지금 가진 거라곤 이상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육체적 생존만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명을 살리기 위해 싸우고 있소. 우리는 유럽이 지니고 있는 지주 같은 사치품이 없소. 우리게엔 공통된 유산도 없고, 천 년에 걸친 역사도 없소. 우리가 가진 거라곤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꿈과 약속밖에 없소. 우리가 가진 거라곤……(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리가 가진 건 우리의 이상뿐이오."
각하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자네도 알겠지. 미국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믿고 있기 때문이고, 만약 그 믿음이 우리를 이 위기로부터 보호해 줄 만큼 강하지 못하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이나 꿀 수 있겠나? -240~1쪽

대통령도 미국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이 나라의 종말을 의미하는 거야. 사람들은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지. 내 생각은 달라. 나는 수많은 나약함과 도덕적 타락을 목격했어. 도전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야 할 사람들이 그럴 수 없었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어. 탐욕, 공포, 우둔함, 증오 때문이었지. 전쟁 전에도 그걸 목격했고 지금도 그게 보여.-241쪽

에이디에스(ADS), 그게 나의 적이었지. 자각 증상 없는 사망증후군(Asymptomatic Demise Syndrome) 또는 종말론적인 절망 증후군(Apocalyptic Despair Syndrome)이라고나 할까, 말하는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 이름이 뭐든 간에 그것이 전쟁 초기 막다른 상황에 몰린 몇 달 동안 기아, 질병, 인간 간의 폭력, 혹은 좀비가 죽인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아무도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 우리는 로키 산맥 방어선을 안정시켰고, 안전지대를 위생 처리했는데도 하루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어. 자살은 아니었어. 물론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냐, 이건 경우가 달랐어.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상처를 입었거나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을 앓고 있었고, 건강 상태가 완벽한 사람들도 있었지. 이 사람들은 그냥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다음 날 영영 저세상으로 가버린 거야.-258쪽

문제는 심리적인 거였지, 포기해 버리고 내일을 맞고 싶지 않았던 거야. 내일은 더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거라는 걸 아니까. 믿음, 버텨내고자 하는 의지를 상실하는 일은 모든 전쟁에서 발생하기 마련이지. 평상시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이렇게 대대적인 규모로 발생하는 건 아니지. 이건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무력감, 혹은 무력하다고 인식하는 거야. 나도 그런 기분을 이해할 수 있어.-259쪽

거짓말이 아니냐고? 괜찮아. 그렇게 말해도 돼. 그래, 그건 거짓말이고 때로는 거짓말이 나쁜 게 아냐. 거짓말은 사실상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냐. 거짓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불처럼 사람들을 따뜻하게 데워 줄 수도 있고, 태워 죽일 수도 있지. 정부가 전쟁 전에 우리에게 한 거짓말들, 우리를 계속 아무것도 모르는 행복한 바보들로 만들려고 했던 거짓말들은 우리를 태워 버린 거짓말들이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했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했어.-269쪽

진실은 이런 거야. 우리가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결코 미래를 보지 못했을 거야. 진실은 우리가 인류라는 종족의 황혼기에 서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고, 그 진실이 매일 밤 수백 명을 얼려 죽이고 있어. 그 사람들은 밤새 그들을 지켜 줄 따뜻한 뭔가가 필요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했고, 대통령도 했고, 모든 의사와 신부와 소대장과 부모들이 거짓말을 했지.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게 우리의 메시지였어.-269~270쪽

그 영화에서 영웅들의 암울한 면을 보여 주던가? 그 영화에서 일부 '영웅'들의 마음에 숨겨진 폭력과 배신과 잔혹함과 비행과 끝을 알 수 없는 사악함을 보여 주던가? 아, 물론 아니겠지. 왜 그래야 했겠나? 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촛불을 끄고 이승을 하직해 버린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티는 대신 또 다른 면, 사람들을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누군가 그들에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해 주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살아남게 만드는 면을 보여 주기로 한 거야. 그런 거짓말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지. 그건 희망이라고 부른다네.-271쪽

무지가 우리의 적이었어요. 거짓말과 미신, 오보, 허위 정보가 적이었죠. 가끔은 정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무지가 수십억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무지가 좀비 전쟁을 일으켰어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만약 지금 우리가 결핵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그때 좀비 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지 한번 상상해 보세요. 세계 시민들이, 아니면 적어도 이 시민들을 보호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맞선 상대에 대해 정확히 알고만 있었더라도. 무지가 우리의 진정한 적군이었고 냉엄하고 확실한 정보가 무기였어요.-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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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여름
아카이 미히로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수사물을 좋아해 가상으로나마 다양한 범죄 사건을 접하면서 과연 어떤 범죄가 가장 악질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법적으로야 타인의 생명을 앗는 살인이 가장 중한 죄겠지만 '악질'이라면 역시 유괴가 맨 먼저가 아닐까. 그 어떤 범죄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돈을 매개로 한 가족의 삶 자체를 뿌리부터 흔들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삶의 흐름을 틀어버린다는 점에서 살인보다 유괴가 더 잔인할지도 모른다. <저물어 가는 여름>은 바로 그 유괴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익히 봐온 것 같은 아이가 유괴된 가족의 이야기도, 유괴 사건을 공모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아버지가 유괴범인 딸의 인생을 둘러싼 독특한 이야기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자이 신문사의 사장은, 자신의 회사에 신입 기자로 내정된 여학생(히로코)이 유괴범의 딸이라는 사실을 타 주간지에서 보도하려는 정보를 접하고 인사국장에게 확인하나 이는 사실로 밝혀진다. 빼어난 인재라 사장은 히로코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지만, 편견 없이 채용한 것은 기쁘긴 하나 용납할 수 없기도 하다는 사주의 입장 때문에 이십 년 전의 유괴 사건은 재조사에 착수한다. 현역 기자가 조사하기엔 무리가 있는 건이라 편집자료실에 좌천되어 있던 전 사회부 기자인 가지가 이 조사를 도맡는다. 가지는 이십 년 전 사건을 다시 들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싶어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지만 "가능성 제로라는 것은 없는 법"이라 반쯤 재미로 임무 수행을 시작한다.

 

  범죄자의 딸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가정환경을 비관하는 아이를 그리게 된다. 하지만 <저물어 가는 여름> 속의 히로코는 다르다. "그런 일류 호텔에 저 같은 유괴범의 딸이 출입해도" 괜찮냐는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영어와 중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고, 때묻지 않은 어리숙함과 입사하지 않겠다고 강단 있게 이야기하는 인물이다. 실력과 인품을 모두 갖췄기 때문에 도자이 신문사의 사람들뿐 아니라 나도 '이 아가씨 매력 있네'라고 점점 히로코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히로코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따뜻한 것만은 아니다. 책 초반에 히로코의 양아버지가 한 말처럼 "주어진 조건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편견으로 둘러싼 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어떨까. 편견을 실력으로 부숴버리겠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결국엔 자포자기하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이야기 초반에 입사를 반려하고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자신의 부모에 대해 인정한 히로코의 마음 한 켠에는 그런 마음도 있었으리라. 도자이 신문사 입장에서도 히로코란 인재는 탐낼 만하지만 히로코 입장에서도 분명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시기다. 하지만 이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 아이를 위한 20년 전 유괴 사건의 조서는 역시 녹록치 않다.

 

  생후 1주일 된 영아가 납치되고 희안하게도 범인은 부모가 아닌 종합병원의 원장에게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아기는 죽는다"는 협박장을 보내고 돈을 요구한다. 접선 현장에서 영리하게 도망친 범인의 흔적을 수신기로 다시 찾아내지만 결국 범인은 차로 도주하던 중 수십 미터 낭떠러지로 떨어져 사망한다. 죽은 범인의 집에서는 범행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여럿 나왔지만 아이는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은 흐지부지 종결되어버린다. 가지는 20년 전의 증인들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증인들을 찾아냄으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조사를 진행한다. 그렇게 얼마 되지 않는 사건의 잔재를 쫓아 결국 가지는 이 사건에 공범이 있었음을 밝혀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결말. 초반에는 약간 늘어지지만 사건을 조사해가는 과정에서 점점 긴장감이 더해지고 결말부 공범과의 대면에서 '이런 발상도 가능하구나' 하는 신선함을 느꼈다.

 

  오래된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점에서 미국드라마 <콜드케이스>가 떠올랐는데 두 작품 모두 기본적인 한계는 오랜 시간이 지난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너무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20년 전이 아니라 2년 전, 두 달 전, 심지어는 이틀 전의 기억마저도 가물한데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세부적인 디테일까지도 마치 방금 본 것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어서 기억에 남았다손 쳐도 역시 이런 소재는 이 부분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싶었다. 하지만 이런 태생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저물어 가는 여름>은 신인 작가가 쓴 작품이라기에는 생각보다는 탄탄했고, 신인다운 패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책 말미에서 이 책의 편집자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결말의 정서는 권선징악의 쾌감이 아닌 서글픔과 회한이다"라고 마무리하는데, 그 말처럼 책을 놓고도 하나의 사건으로 한순간에 인생이 바뀌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무더위도 조금씩 꺾이는 정말로 '저물어 가는 여름'날 밤. 맥주 한 잔 마시며 읽으면 씁쓸함이 더해질 책이다.

 

덧) 책 속에서 범인들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의 원작인 <킹의 몸값>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저물어 가는 여름>과 <킹의 몸값>을 함께 읽는 것도 재미를 더할 듯 싶다. 유괴 사건을 어떻게 다르게 다룰 수 있는지 다양한 관점에서 비교하며 보는 즐거움이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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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2-0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드 시작해서.. 읽으려고 찜했어요
 
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미카엘 엥스트룀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3년 2월
품절


아빠를 생각하느니…… 차라리 삽을 생각하는 게 나았다.
삽을 생각해.
삽을 생각해.
삽을 생각해.
미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삽…….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빠는 늘 만취 상태, 아니면 숙취 상태, 아니면 둘 다인 상태로 있다고? 아빠는 싸우지는 않지만 많이 운다고? 술에 취하는 횟수와 술을 끊겠다고 약속하는 횟수가 같다고? 그러면 술을 끊겠다고 약속하기와 술에 취하기가 상쇄되어버린다. 아빠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끝이야. 마시래도 더는 못 마셔. 이제 술 끊었어. 아빠는 더는 마실 수 없을 만큼 술을 마신다. 그러고는 또 자기가 그러는 게 넌더리가 나서…… 마신다. 쟁그랑 하고 술병들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비닐봉지들. 술병들, 곳곳에 술병들, 마개가 열린 술병들, 쓰러진 술병들, 깨진 술병들, 숨겨둔 술병들. 비웃음과 술병들. 고함과 술병들. 울음소리와 술병들. 그리고 지하실에 널린 술병들. 살아야 할 날이 너무 많아.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야 할 날이 너무 많아. 술병들이 그걸 줄여주지.
빌어먹을 단어들. 술병, 슐병, 쑬병, 쓸병.
쓰레기.
게우기
삽. -29~30쪽

"미리 정해져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줌마가 말했다. "언제든 선택할 수 있고, 결정은 네가 내리는 거야."
"제가요? 아니에요. 저는 아무것도 결정 못 하는 걸요. 결정을 내리는 게 누군지도 몰라요. 아마 텡일일걸요."
"네가 이렇게 존재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결정하는 거야."
미크는 잠깐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 나지 않았다. -41쪽

외로움이 배 속을 갉아댔다. 외로움은 날카로운 비늘이 있는 뱀이다. 그 뱀이 밖으로 날을 세운, 날카로운 비늘을 휘감아가며 배 속을 기어 다녔다. 살을 찢고 긁어대고 살갗을 벗기는 비늘.-44쪽

집에 갈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디로…… 갈까?
집에 안 가면 어디로 가지? 다들 집에 가는데. -54쪽

고모는 땔감으로 책을 쓰고 있었다. 고모가 난로 안에 책을 차례로 던져 넣고는 놋쇠로 된 덮개를 닫았다.
"곧 따뜻해질 거야."
"책을 넣으신 거예요?"
"다 읽은 책들이야. 책이란 사람이 읽을 때만 의미가 있는 거지. 책이란 건 머릿속에 일어나는 어떤 거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레나 고모가 책을 한 권 들고는 말을 이었다.
"읽고 난 다음에는 그저 종이만 남겨지는 거야."
"저 많은 책은 다 어디서 난 거예요?"
"좀 유별났던 우리 엄마한테서 물려받았어. 삼천 권. 세어봤지. 저 책들이 겨우내 우리를 따뜻하게 해줄 거야."
"저 책들을 다 읽으셨나요?" 미크가 책 더미와 상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한참 멀었지. 하지만 많은 책들이 비슷비슷해. 얼마간의 살인과 얼마간의 사랑, 뭐 그런 거지. 또 너무 형편없어서 곧바로 태워버릴 책도 많고."-8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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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도 얼어도 비틀거려도
미카엘 엥스트룀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얼음장 같이 차가운 현실 속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주인공이 햇살에 반사된 흰 눈처럼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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