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이동윤 옮김 / 검은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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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살의의 쐐기>로 87분서 시리즈를 처음 접한 뒤 <아이스> 출간 소식을 듣고 이 매력 터지는 형사들을 다시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 했다. <살의의 쐐기>가 짧고 굵게 87분서 형사들에게 빠지게 해줬다면 <아이스>는 그보다는 더 긴 호흡으로 이들의 매력을 곱씹게 한다. <살의의 쐐기> 같은 긴장감과 스릴감을 원한다면 <아이스>는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찰소설로 읽기에, 87분서 형사들을 만나기에 <아이스>는 최적화된 이야기다.

 

  인기 뮤지컬에 출연중인 여자 무용수가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다 총에 맞아 죽는다. 조사 결과 같은 총으로 마약판매상이 죽은 사건이 수사중임이 밝혀진다. 생활 반경도, 삶의 방식도 완전히 다른 두 사건의 연결고리를 찾던 중 또 한 명(보석상)이 같은 총으로 살해당한다. 면식범의 소행인지, 미치광이 살인범인지도 가늠이 되지 않고, 살해당한 세 사람의 연관성도 눈에 띄지 않는 상황 속에서 87분서 형사들은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려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시리즈가 오랫동안 계속 이어지는 것은 이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사건 자체가 흥미진진해야 독자가 매력을 느낄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리즈를 읽는 것은 단순히 스토리 때문은 아니다. 사건이 시리즈가 아닌 단독적인 다른 책보다 조금 재미가 덜하다고 해도 그 사건을 구성해가는 캐릭터 때문에라도 시리즈는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가 없다. 대부분의 시리즈가 한 명의 주인공을 원톱으로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주변 캐릭터를 정리해가는 방식이라면 87분서 시리즈는 반대다. 같은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도 그 분량이나 비중이 작품마다 다르다. 마이어나 카렐라의 경우에는 <살의의 쐐기>와 마찬가지로 <아이스>에서도 어느 정도 비중이 있지만, <살의의 쐐기> 때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클링과 브라운이 <아이스>에서는 조명된다. 원톱이 아니라 팀웍을 보여주는 시리즈이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즐기는 재미가 있었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깨알같은 유머다. <살의의 쐐기> 때도 그랬지만 <아이스>를 읽으면서 이들의 유머에 좀더 빠져들었는데, 초반에 그려지는 임신한 매춘부와 잡범들의 에피소드나 밸런타인데이 관련한 에피소드 등을 읽으며 정말 한참 키득거렸다.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뭘 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에 "살인 사건"이라고 답하는 시크함이라니.) 책 속에서 경찰 업무에 대해서 사람을 닳게 만드는 겨울처럼 "눈이나 얼음, 진눈깨비,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비 같은 것들이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표시할 때까지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것이라 묘사한 부분이 있었다. "봄이 찾아와 얼음을 녹이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면 다음 겨울이 들이닥치는 것이었다"라는 식으로 이어졌는데, 그 말처럼 경찰 업무의 추위를 녹이는 것은 결국 유머와 동료애가 아닐까 싶었다. 이들이 함께 전투를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샌가 나도 한자리 끼어들게 되는 것이 87분서 시리즈의 매력이 아닐까.


  반전이나 범인의 의외성 등을 고려하면 사건의 진상은 어떻게 보면 시작은 거대했으나 끝은 평범했더라 싶었다. 잘 나가다가 끝에서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랄까. 하지만 어쨌거나 거기까지 꼼꼼히 수사과정을 짚어가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좋았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마음의 문을 닫은 클링과 여형사 아일린이 조금씩 부농부농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사건 외의 재미 중 하나였다. 느긋하게 87분서 형사들을 만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 또 다시 87분서 형사들을 만날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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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03-01 0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유혹이네요
저도 보고파요

이매지 2013-03-01 12:41   좋아요 0 | URL
시리즈마다 집중 조명되는 인물이 다른 게 재밌더라구요. ㅎㅎㅎ
좀 길어서 그렇긴 하지만 시간 되시면 한번 읽어보셔용~
 
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절판


이제 연극에 대한 이야기는 집어치우자. 동료 연기자들과 나는 우리 연극의 잠재력과 문제점에 대해 지겨울 만큼 분석했다. 신물이 나고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내 연기 인생은 몇 년 전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본궤도에서 이탈해 옆길로 들어섰다. 이 연극이 나를 정상 궤도로 되돌려놓아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옆길에서 어느 정도 끌어내기라도 해야 했다. 나는 로저 무어의 뒤를 이어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될 뻔했던 사람이다. 나조차도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여하간 사실이다. 내리막에 이르기 전까지는 오르막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11~2쪽

우리는 서로를 탓했다. 그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지 말고 함께 나누어야 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어쩌면 미래 역시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를 망가뜨릴 수는 있다. 그렇다. 현재를 철저히 파괴할 수는 있다. -18쪽

"순서란 중요해요, 그렇지 않나요?"
"뭐, 어느 정도까지는."
"하지만 적정선이 어딜까요? 그게 문제겠죠."
"답을 알고 있소?"
"각자가 찾아야죠. 그런 다음, 그걸 고수해야죠. 즉, 위기 상황이 오면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에요."-92쪽

그의 제안이 내가 베푼 호의에 대한 보답이든, 신발 속의 돌멩이를 빼내는 수단이든,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우리 둘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는 것이다. 문득, 이게 바로 사업가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력적인 제안. 생산적인 거래. 비용 효율성. 이익률. 최종 결산.
"우리가 서로를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토비. 서로 존중하는 걸로 충분하죠."
"승자가 될 수 있는데 굳이 뭐하러 패자가 되려 하느냐, 그런 뜻입니까?"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군요."
"그렇죠. 나는 어리석은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서로에게 득이 되는 제안을 면전에서 거절하는 사람을 자주 보죠."-150쪽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지독히 낯선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도달하는 순간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심장이 고동을 멈춘다. 몸이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결국 뇌가 천천히 기능을 정지한다. 정확히 언제 데니스 메이플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몇 분 몇 초에 데니스가 최종적으로 눈을 감았는지 논의하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내가 데니스를 발견하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데니스를 붙들고 헛되이 발버둥 치는 동안이었을까? 아니면, 구급차 안에서? 아니면, 이후 병원에서? 나도 모른다. 영원히 그럴 것이다. -173~4쪽

제니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대체 어떤 인간일까? 평상시에 제니는 사람의 인성을 잘 파악한다. 따라서 제니는 로저 콜본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로저 콜본은 제니를 그렇게 완벽하게 속일 수 없다. 아닌가?
모르겠다.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 문제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곁눈으로 무언가를 본 듯한 느낌이 들지만, 고개를 돌려 똑바로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다. 로저 콜본의 더러운 속임수와 추잡한 거래 너머에서 분명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지금껏 나는 너무도 상반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따라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나는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나는 진실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242쪽

현실이 연기자의 삶을 침범하는 경우는 드물다.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가식의 탈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상황이 변했다. 완전히.
어떻게 하면 내가 처한 곤경을 이치에 맞게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252쪽

나는 로열 퍼빌리언 궁전의 뾰족탑과 양파 모양 지붕들을 건너다보며, 가련하고 뚱뚱했던 왕, 조지 4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아내 피츠허버트와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싶어 했지만, 결국 둘은 갈라서고 말았다. 그들의 이별은 여러 면에서 조지의 잘못이었고, 내가 제니를 잃은 것도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삶의 과오들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268쪽

상황은 인간보다 더 교활한 공모자다. 상황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어놓는다.-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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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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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버드가 처음으로 산 실용적인 아프리카 지도였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아프리카 땅을 밟아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아프리카의 하늘을 올려다볼 날이 찾아와 줄까? 하고 버드는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로 출발할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잃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요컨대 나는 지금 자신의 청춘에서 유일하며 마지막인 눈부신 긴장으로 충만한 기회에 속절없이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한들, 이제 그것을 면할 길은 없는 것이다. -10쪽

버드는 고개를 돌리고 주저앉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사라져가는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사이렌에 놀란 통행인들은 버드가 등 뒤에 두고 온 임산부의 무리와 마찬가지로 호기심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대를 드러내며 구급차를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필름이 갑자기 정지한 화면과도 같은 부자연스런 동작 정지라는 인상이 있다. 그들은 지금 평범한 일상생활의 극히 미세한 금을 들여다본 참이다. 그들은 순진한 경건함을 또한 표현하고 있다. 내 아들은 전장에서 부상당한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어둡고 고독한 정장에서 내 아들은 머리를 다친 것이다. 그리고 아폴리네르처럼 붕대를 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48쪽

느닷없이 버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라는 이미지가 버드의 감정을 단번에 단순화하여 방향을 지워준 것이다. 버드는 센티멘털로 질척질척해진 자신이 허용되고 정당화되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눈물에서 단맛조차 발견했다. 내 아들은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찾아왔다. 내가 모르는 어둡고 고독한 전장에서 부상당하여. 나는 아들을 전사자처럼 매장해야만 한다. 버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48쪽

버드는 머리가 둘 달린 것처럼 보이는 자기 아이와 언젠가 보았던 방사능 장애로 인한 장애아의 사진을 비교해 보려 했다. 하지만 버드에게 있어 아이의 이상(異常)은 그것을 둘러싸고 타인과 이야기를 하긴커녕 혼자서 다시 생각해 보려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뜨거운 수치의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올라오는 버드만의 고유한 불행이었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타인들과 공통의, 인류 모두에게 걸려 있는 문제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73쪽

버드는 여자 친구에게 자신이 뻔뻔스런 젊은 제비같이 엉기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히미코의 남자 친구들은 대개들 그녀에 대해 이렇게 구는 것이다. 히미코와 결혼했던 남자는 버드를 위시한 다른 어떤 남자들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남동생 같은 태도로 그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목을 매어버린 것이다. -73쪽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버드. 우리에겐 우선 이 현실 세계가 하나 있는 거지" 하고 히미코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버드는 새로 따른 위스키 잔을 아이의 장난감처럼 소중하게 손바닥에 올려놓고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나 자기나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로서 포함되어 있는, 이곳과는 별개의 수많은 다른 우주가 있는 거야, 버드. 우리는 과거의 여러 시간 속에서 자신이 사느냐 죽느냐가 피프티-피프티(fifty-fifty)였던 기억을 갖고 있지. 예컨대, 나는 어릴 때 발진티푸스로 거의 죽었었어. 난 자신이 죽음을 향해 떨어지느냐 아니면 회복으로 가는 비탈을 올라가느냐 하는 인터체인지에 섰던 순간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걸. 그리고 지금 목하 너와 마찬가지로 이 우주에 있는 나는 되살아날 방향을 선택한 거야. 그런데 그 순간에 또 하나의 내가 죽음을 골랐어. 그리고 빨간 발진투성이인 나의 어린 주검 주변에는 죽어 버린 나에 관해 약간의 추억을 지닌 사람들의 우주가 진행하기 시작한 거야."-80쪽

"있잖아 버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인간은 그가 죽어버려서 그와는 관계가 없어진 우주와 그가 여전히 살아 나가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우주라는 두 개의 우주를 앞에 두게 되는 거야. 그리고 옷을 벗어 버리듯이 그는 자신이 죽은 자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뒤에 버려두고 그가 계속 살아가는 쪽 우주로 찾아오는 거지. 그래서 한 사람의 인간을 둘러싸고 마치 나무줄기에서 가지와 잎이 갈라지듯이 갖가지 우주가 튀어 나오게 되는 거고. 내 남편이 자살했을 때도 그와 같은 우주의 세포 분열이 있었던 거야. 여기 있는 나는 남편이 죽어버린 쪽 우주에 남았지만, 남편이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너편 우주엔 또 하나의 내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거지. 한 인간이 요절하면서 뒤에 남겨 두는 우주와 그가 죽음을 면해 살아가고 있는 우주라는 형태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끊임없이 증식해 가는 거야. 내가 다원적인 우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의미지."-80~1쪽

"서둘 건 없어" 하고 히미코가 달랬다.
"그럼, 서둘 거야 없지, 나는 꽤나 오랫동안 참으로 서둘러야만 할 일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아. 어린아이 땐 항상 서둘고 있었는데. 그건 왜 그랬을까?"
"금세 아이가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그런 거겠지?"
"정말 나는 금세 아이가 아니게 되었어.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 나이지.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제대로 된 아이를 만나지 못한 거야. 내가 규격에 맞는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언젤까? 나는 자신이 없어" 하고 버드는 감상적으로 말했다.
"그런 건 누구도 자신할 수 없어, 버드. 다음 번 아이가 튼튼한 아이일 때, 자기 역시 제대로 된 아버지였다는 것을 확실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갖는 거야."-92~3쪽

아아, 나는 어쩌면 좋을까, 하고 버드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의 일상생활은 언제나 이런 최악의 함정이 입을 벌리고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설상가상으로 아프리카에서 내가 만났을 모험적인 생활의 위기와 달라 나는 이 함정에 빠진다 해도 기절조차 못하고 사고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언제까지나 멍하니 함정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야말로 전보를 치고 싶어, AM RATHER IN TROUBLE, 하지만 누구에게? -115쪽

"사모님께는 신생아의 뇌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내장이 좋지 않다고 해 두었습니다. 뭐, 뇌도 내장임에는 분명하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완전히 거짓말로 급한 불을 끄려다가는 그 거짓말이 탄로 났을 때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네" 하고 버드는 말했다.
"자, 그럼.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버드와 의안을 한 의사는 예의 바르게 머리를 숙이고 서로를 외면한 채 스쳐 지나갔다. 그건 다행이네요! 하고 버드는 의사의 인사를 되새김질했다. 수술이 가능해지기 전에 쇠약해져서 죽는다. 다시 말하자면 수술 후의 식물인간 아기를 끌어안을 일도 없고, 또 자기 손을 더럽혀 갓난이를 죽일 것도 없고, 그저 아기가 근대적인 병실에서 청결하게 쇠약사하는 것을 기다린다. 더구나 그동안 아기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버드가 할 일이다. 그건 다행이네요! 깊고 어두운 수치심의 감각이 되살아나서 그에게 온몸이 굳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했다. -157쪽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 하고 버드가 말했다.
"개인적인 체험 중에도 혼자서 그 체험의 동굴을 자꾸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인간 일반에 관련된 진실의 전망이 열리는 샛길로 나올 수 있는 그런 체험이 있지? 그런 경우, 어쨌든 고통스런 개인에게는 고통 뒤의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고. 흑암의 동굴에서 괴로운 경험을 했지만 땅 위로 나올 수가 있음과 동시에 금화 주머니를 손에 넣었던 톰 소여처럼! 그런데 지금 내가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고역이란 놈은 다른 어떤 인간 세계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는 자기 혼자만의 수혈을 ㅈ러망적으로 깊숙이 파들어 가는 것에 불과해. 같은 암흑 속 동굴에서 고통스레 땀을 흘리지만 나의 체험으로부터는 인간적인 의미는 단 한 조각도 만들어지지 않지. 불모의, 수치스러울 따름인 지긋지긋한 웅덩이 파기야. 나의 톰 소여는 끝없이 깊은 수혈 밑바닥에서 미쳐 버릴지도 몰라."-204쪽

"어째서 수술을 하지 않고 쇠약사하기를 기다리는 거지?" 하고 델체프 씨가 미소를 거두더니 용맹해 보일 정도로 남자답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아이가 수술을 받아 정상적으로 자랄 가능성은 백분의 일도 안 돼요" 하고 버드는 당황하며 말했다.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있는 말이지만, 아이에 대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찾아오는 아기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랍니다. 자네는 아기를 맞아주는 대신 그를 거부하고 있는 건가요? 아버지라고 해서 타인의 생명을 거부하는 에고이즘이 허용되는 걸까?"-218쪽

타인들의 공통된 세계에서 인간 일반을 위한 오직 하나의 시간이 진행되고, 온 세상 인간이 한 가지로 겪게 될 나쁜 운명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버드는 그의 개인적인 운명을 지배하고 있는 아기 괴물의 요람에만 매달려 있다. -252쪽

나는 스무 살이 아냐. 내가 지금 잃지 않고 소유하고 있는 스무 살 때와 같은 거라고는 버드라는 어린애 같은 별명뿐이지. -269쪽

나는 아기 괴물에게서 수치스런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대체 어떤 나 자신을 지켜 내겠다고 시도한 것일까?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기가 막혔다. 답은 제로였다. -269~270쪽

"자넨 이번 불행과 정면으로 맞서 잘 싸웠군 그래" 하고 교수가 말했다.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했었어요. 거의 도망쳐 버릴 뻔했었죠" 하고 버드는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원망스러움을 억누르는 듯한 음성이 되어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
"그렇게 하지 않고 현실의 삶을 살 수도 있다네, 버드. 기만에서 기만으로 개구리 뜀 뛰듯이 죽을 때까지 가는 인간도 있지" 하고 교수는 말했다. -27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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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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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 일정을 짜는 것이나 숙소 예약보다 『금각사』를 먼저 챙겼다. 오래전에 삼 분의 일쯤 읽다가 어쩐지 잘 읽히지 않아 포기했던 책이라 한편으로 이번엔 읽을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지만 교토에서 『금각사』를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같았다. 여행지에서 독서라니, 이것이 나의 얄팍한 허영이라 할지라도 나는 금각사가 있는 교토에서 『금각사』를 읽고 싶었다. 책을 챙길 때만 해도 『금각사』를 읽은 뒤 실제 금각사를 보자 싶었지만, 금각사 쪽에 숙소를 잡은 관계로 짐을 풀자마자 금각사에 달려가는 바람에 실물을 먼저 접한 후 『금각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후 매일 밤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내 교토 여행은 조금 더 풍성해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금각사』는 1950년에 있었던 금각사 방화 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책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을 불태운 미조구치라는 인물의 성장과정과 내면 묘사를 통해 그가 왜 '금각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려낸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으로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고, 또한 금각이라는 글자, 그 음운으로부터 내 마음이 그려낸 금각은 터무니없이 멋진 것"이라는 "금각의 환상"을 품어온 미조구치가, 금각사에 도제로 들어가면서 금각과 싱겁게 만나게 되고 금각과 미묘한 관계를 맺어가는 장면들을 통해 '절대적인 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이코라는 여자아이에 대한 관심과 그녀의 죽음, 금각의 주지가 되었으면 하는 부모의 기대, 그나마 자신을 현실과 이어준 쓰루가와의 만남과 그의 죽음, 대학에서 가시와기와 만나며 시작된 일탈, 패망으로 인한 충격 등 내외부적인 사건을 계기로 한 인물이 어떻게 그릇된 노선을 걷게 되는지 『금각사』는 잘 보여준다. 워낙에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기 때문에 『금각사』는 탐미주의 문학이든, 성장소설이든 혹은 '금각사 방화'를 소재로 한 수기든 어떻게 읽어도 완전하고 무궁무진하다. 


  금각에 대한 기대, 동경이 실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불괴의 아름다움"이 되어 "순수한 파괴"에의 갈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변화는 가벼이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흐름이나 세월의 흐름과는 상관 없이 항상 그 자리에서 (비의도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하는 불멸의 금각과, 계속하여 변해가고 겉모습과 달리 위선과 탐욕으로 가득 찬 미조구치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이 대비되면서 금각은 점점 더 굳건한 존재가 되고, 이 세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는(혹은 파괴되어야만 하는) 것이 되어간다. 


  미조구치가 금각을 불태우는 것은 그의 말처럼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만든 미의 전체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조구치 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은 탈아에의 의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더듬이에 가난한데다가 친구도 몇 없어 안으로만 침잠하는 인물. 자신의 열등함을 인지하나 부모에 의해, 주지에 의해 더 나은 인물이 되기를 기대받고, 그로 인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인물. 그런 미조구치가 이상으로 대변되는 금각을 불태우고 "살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등 떠밀리듯 쫓아간 이상에 대한 갈망을 버리고 현실에 발을 딛고 살고자 하는 의지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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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 25주년 라이브 공연
닉 모리츠, 닉 조나스 / 유니버설픽쳐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콘서트라 연기는 좀 아쉽지만 확실히 노래는 이쪽. 언젠가 직접 뮤지컬을 보고 싶게 하는 마력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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