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 가는 여름
아카이 미히로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4월
절판


"어떤 경우에도 이노우에 씨에게 누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큰일을 겪을 것만 같군. 형사들에게 원죄 사건만큼 곤란한 일은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진실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가지의 말에 이노우에는 상냥하게 웃었다.
"바로 그거야. 신문기사다운 말투. 하지만 만에 하나 그럴 가능성은 절대 없을 걸세. 그러니까 나도 안심하고 비망록을 넘겨줄 수 있는 거고. 그래서 말인데,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나도 조금 심심했어. 그래서 도자이 신문에서 시작한 탐정 놀이에 동참할 생각이네."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다……"
탐정 놀이란 말에 살짝 반감이 든 가지가 말했다.
"맞아.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어."
이노우에는 놓여 있던 찻잔을 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능성 제로라는 것은 없는 법이지."-58쪽

예를 들면 네가 외신부에 들어간다고 하지. 거기는 이십사 시간 근무 태세로 로이터, AP, AFP, 타스, 신화사 등 전 세계 통신사에서 홍수처럼 정보가 밀려들어. 데스크에서 헤드라인을 살펴보고 필요하다고 판단한 뉴스를 번역시키지. 기자들은 사전과 씨름하면서 번역을 하겠지만 데스크에서는 좀처럼 기사로 인정하지 않아. 때로 오역이 나타나면 야단도 맞게 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가 되는 것은 개중 극히 일부고 태반은 쓰레기통으로 가지. 그런 분위기 속에서 네 아버지가 어떠니 하고 생각할 여유 따위는 전혀 없어. 그게 직장이고 그게 신문사라는 곳이야."-89쪽

"이노우에 경감님, 이 사건 혹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을 꺼낸 사사키는 다음 말을 삼켰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젊은 형사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았다.
미궁에 빠진다는 말을 하면 정말 그렇게 돼 버린다.
고토다마(言靈, 고대에 말속에 깃든다고 믿었던 이상한 힘)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형사라는 족속은 마음 깊숙이 조금이나마 미신 같은 것을 믿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어지간한 것이 아닌 한 금기시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미궁, 시효, 오인 체포, 그리고 원죄……-174쪽

"마음을 다잡는 데에는 몇 년이나 걸렸소. 나도 그랬고, 아이가 유괴당해서 죽은 일을 당한 부모의 마음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방법이 없지."-217쪽

그때였다. 가지는 무릎을 꿇고 있던 자신의 발밑에 빨간 무언가가 구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딸랑이였다.
가지는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돌기 시작할 것 같은 분홍색 회전목마 모빌이 걸려 있다. 목제 아기 침대,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아기 옷장, 토끼와 고양이 봉제 인형, 작은 조립식 미끄럼틀, 색색의 나무 블록, 그리고 아기 의자에는 손때로 더러워진 아기 인형이 앉아 있었고 인형 앞에는 두부가 앞에 담긴 작은 접시와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
아사코의 울음소리는 언제까지나 계속됐다.
소이치는 기세를 잃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끄러움과 자기혐오의 격한 감정이 가지를 감쌌다.
"뭐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죄송합니다……"
얼굴을 들 수 없는 가지는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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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바에 있다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1
아즈마 나오미 지음, 현정수 옮김 / 포레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홋카이도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러브레터>다. 첫 장면인 장례식 장면부터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오겡끼데스까"까지 <러브레터>의 배경에는 눈이 하염없이 날린다. 당연히 홋카이도도 여느 도시처럼 사람 사는 곳이건만 <러브레터>의 이미지 때문인지 나에게 홋카이도는 범죄 같은 어둠 없이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순수한 사랑만이 남은 순백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쩐지 동화 속의 도시 같다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오해를 이 스스키노 시리즈가 유쾌하게 깨부쉈다.

 

  '알코올 중독'이 아닌 '알코올 의존증'인 '나'. 여느 날처럼 스스키노의 바 '켈러 오하타'에서 위장약을 털어넣은 뒤 술을 벗삼아 밤에 젖어들려는 차에 누군가 '나'의 성씨에 '선배'라는 "뒷맛 나쁜 단어를 붙여" 불렀다. 평범하게 생긴 대학생인 그는 동거하고 있는 여자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나'에게 여자친구의 행방을 찾아달라며 도움을 요청한다. 별로 흥미가 동하는 의뢰는 아니었지만 일단은 동정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조사. 하지만 단서를 쫓다 보니 얼마 전 한 모텔에서 있었던 살인사건과의 접점이 떠오른다. 이에 나는 처음의 마음가짐과 달리 진지하게 후배의 여자친구를 찾기 시작하고 살인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실질적인 정의는 차치하고 하드보일드 하면 비정한 도시에서의 사건, 그리고 진지하게 폼잡는 탐정, 건조한 서술방식 같은 키워드가 떠오른다. 하지만 <탐정은 바에 있다>는 여느 하드보일드 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내가 떠올리는 하드보일드 키워드에 플러스알파로 '유머'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올해도 스물여덟 늙은이"인, "언뜻 보면 야쿠자 같은 옷차림을 하고" 주로 바에서 술을 마시고 오셀로게임이 소소한 부수입인 주인공의 캐릭터부터가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대놓고 쉴새없이 웃기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볼 때는 너무 진지한 캐릭터인데 알고 보면 허당이라 그 간극에서 오는 매력과 웃음이 있다. 내가 갭모에라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주인공 '나'에 홀딱 반해버렸다. 마음이 드는 사람이 아무리 시덥잖은 농담을 해도 실없이 터지는 것처럼 나는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빵빵 텨저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건 자체는 우연적이고, 이야기의 얼개도 좀 산만한 면이 있지만 그런 스토리의 아쉬움을 '나'란 캐릭터의 힘으로 모두 커버해낸다. 물론 탄탄한 개별 사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캐릭터가 힘있게 자리매김한 시리즈가 롱런 하는 걸 보면 '스스키노 시리즈'도 꽤 나왔겠구나 싶었는데 2011년까지 총 12편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국내에도 이미 세 권의 책이 출간되었으니 앞으로 몇 번 더 '나'와 스스키노 거리를 누빌 수 있을 듯해 기뻤다. 스토리 외에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을 꼽자면, '나'는 줄창 마시는데 소설 밖에 나는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책을 읽어 힘들었다. 다음 권인 <바에 걸려온 전화>는 맥주를 구비해놓고 함께 마시면서 스스키노 거리를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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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품절


그가 버려진 물건들의 사진을 찍는 일을 한 지도 이제 1년이 다 되어 간다. -7쪽

언제나 물건들, 잊힌 소지품들, <버려진 것들>이 있다. 지금까지 그가 찍어 온 사진은 수천 장에 달했다. 나날이 늘어 가는 그의 자료 보관소에는 책과 신발, 유화, 피아노와 토스터, 인형, 다기 세트, 더러운 양말 짝, 텔레비전, 보드게임, 파티복, 테니스 라켓, 소파, 실크 속옷, 코킹 건, 압정, 플라스틱 캐릭터 인형, 립스틱, 라이플 총, 색 바랜 매트리스, 포크와 나이프, 포커 칩, 우표첩, 새장 바닥에 널브러진 죽은 카나리아 시체 따위의 사진이 있었다. 왜 이런 사진들을 굳이 찍으려 하는지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 없는 헛된 짓인 줄은 알지만,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마다 물건들이 자기를 부르며 이제 그곳에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 오고 내다 버려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아 달라고 애원하는 듯이 느껴졌다. -9쪽

그가 필라에게 반한 것은 그녀의 육체 때문도, 정신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뭘까? 모든 것이 그에게 떠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무엇이 그를 여기에 붙잡아 두는 것일까? 어쩌면 필라가 그를 바라보는 눈길, 그 강렬한 시선, 그의 말에 귀 기울일 때 완전히 넋을 잃고 몰입한 눈빛, 그들이 함께 있을 때면 그녀가 온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느낌, 지구상에서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오직 그 하나밖에 없다는 듯한 그런 느낌 때문일지도 몰랐다. -18쪽

빙은 지금 브루클린의 선셋 파크라는 지역에 살고 있다고 했다. 8월 중순 몇몇 사람들과 함께 그린우드 묘지 맞은편 거리의 조그만 버려진 집에 들어가 무단 점거하고 살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전기와 난방은 그대로 쓸 수 있었다. 물론 언제고 상황은 바뀔 수 있겠지만 당분간은 뭔가 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모양이었다. 가스 회사도 전력 회사도 서비스를 끊으러 온 적이 없었다. 앞일이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아침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강제로 쫓겨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며 일어났지만 시가 경제 불황의 압박을 못 이겨 일자리를 많이 삭감한 덕에 선셋 파크의 작은 무리들은 시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고 있는 듯했다. 연방 보안관도 집행관도 그들을 쫓아내러 오지 않았다. 빙은 마일스가 변화를 찾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룹의 원래 멤버 중 한 명이 최근에 도시를 떠나게 되어서 그가 원한다면 그 방에 들어와도 좋다고 했다.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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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에 걸려온 전화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2
아즈마 나오미 지음, 현정수 옮김 / 포레 / 2012년 1월
절판


곤노 교코에게 일곱시에 전화가 왔다. 홀쭉한 마스터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분노의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분노에 몸을 맡기는 건 교양 있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확실히 인류는 지구상에 서식하는 동물 중에서도 예외적으로 천박하고 바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설명하고, 자신의 감정을 적확하게 전하고, 온화하게 대화하는 것.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나도 할 수 있다. 어쨌든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올바르게 들을 수 있다'와 '올바르게 알아듣게 이야기 할 수 있다'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고 국어는 수였다. 그러고 보니 '행동발달사항'에는 '단어 사용이나 인사를 올바르게 할 수 있다'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여보세요, 곤도 교코입니다."
"야! 너 이놈!"-42쪽

확실히 나는 변했는지도 모른다. 최근 일 년 이상 요란한 싸움은 하지 않았다. 저자세로 얌전히 살아왔다. 직접적인 계기는 아마도 일 년 전 연말에 있었던 사건일 것이다. 그때 나는 각성제의 플래시백으로 맛이 가버린 양아치 때문에 옥상에서 떨어질 뻔했다. 진심으로 죽기 싫다고 생각했다. 무서웠다. 그전까지는 얻어맞아봐야 아플 뿐이고, 죽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로 나는 폭력을 두려워하게 됐다. -75쪽

그리고 조직적인 폭력에 대한 공포는 독특한 뭔가가 있다. 술기운 때문에 길바닥에서 우연히 치고 박는다거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생기는 폭력과는 달리, 어느 조직이(그것은 폭력단이든 '삿포로음흥'이든 우익 당파 쪽이든 군대든 경찰이든 마찬가지지만)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누군가의 말살을 결정하고, 그것을 수행한다는 것은 아주 기분 나쁘다. 이런 표현은 좋아하지 않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 통감한다.
그렇다고 해서 평화주의나 비폭력주의로 전환하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결국 무력하다는 것은, 간디의 최종적 패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비폭력이나 무저항은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게 양식이나 품위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유효하지만,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은 양식이나 품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법이다.
따라서 남겨진 일은,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는 도逃폭력주의밖에 없다. -75~6쪽

나는 통화에 질려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른 채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말도 안 되는 얼간이가 된 느낌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있다. 끙끙 고민해봤자 소용없다. -114쪽

나는 지금 그녀의 마음의 상처를 이용하고 있다. 이게 옳은 일일까? 아니, '옳다' '옳지 않다' 하는 문제는, 평면적 가치체계에서 자의적으로 끄집어낸 인공적인 말이니까 묻지 말자. 하지만 내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일까? 곤도 교코의 표현을 빌리면 '불명예'스러운 방법은 아닐까?
……아니,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 우선은 이 방법이 어떤 성과를 도출하는가 보기로 하자.
……정말 그래도 괜찮은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순간, 마음속 깊은 곳의 단단한 무언가에 금이 가며 여자의 모습이 보인 기분이 들었다. 십 년 전에 죽은 여자. 나를 지키려고 하다가 죽은 여자. "결과가 문제는 아니야"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 방법으로 만족해?"라고 그녀는 물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에 생긴 금을 우격다짐으로 이어 맞추는 데 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 삽으로 흙을 퍼서 틈을 메웠다. -116~7쪽

인생을 포기해버린, 그러나 자신이 인생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련 어린 허세를 부리며 어떻게든 인간다운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바라면서 점점 바닥으로 떨어져가는 태만한 남자. 그것이 고헤이라는 남자가 주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변변찮은 인간이라도 진심은 있다. 인간의 진심은 그 인간에게 가장 어울리는 형태로 외부에 표출되는 법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아들 역시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 같다. -237쪽

학생운동의 투사가 '졸업'하고 나서 사상 노선을 하루 아침에 싹 바꿔버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벼락부자 취향의 양복을 입고 벤츠를 타면서 "이래 봬도 나도 젊었을 때는 화염병 좀 던졌다고, 와하하" 하고 자랑하는 아저씨들이 세상에 널려 있다. 타인을 지배하고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인종은,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공장처럼 트렌드가 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법이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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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바에 있다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1
아즈마 나오미 지음, 현정수 옮김 / 포레 / 2011년 12월
절판


그는 결혼해서 아이도 있지만, 원래 동성애자다. 나는 그게 뭐 어떠냐며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아 학대자나 도착 살인상습범 같은 예외는 제쳐두고, 어른끼리 서로가 납득한다면야…… 즉 피해자가 생기지 않는 한 개인의 취향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본적으로 그의 고민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다. 전후 민주주의 교육의 황혼기에 교육을 받은 세대의 일원으로서, 나는 가치 상대적인 시점을 주입받은 탓에 인생 상담 코너를 담당하기엔 부적합한 인간으로 자랐다. 그 점은 마쓰오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발음되는 '변태'라는 말에는 아주 민감해서, 때로는 나에게까지 싸움을 걸기도 한다. 그것은 물론 나에게는 유익한 체험으로, 내 안의 차별의식을 새삼 인식하게 되는 적당한 기회가 되지만. -70~1쪽

"들어봐, 나는 알코올중독은 아니라고, 그냥 알코올의존증이야. 알코올중독이 아니라고. 그 둘은 큰 차이가 있어."-124쪽

전화의 좋은 점은 친한 친구가 손을 흔들거나 등을 돌리거나 걸어서 떠나가거나 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도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47~8쪽

"살 빼려고 해본 적은 있어?"
"아니."
"보디빌딩 같은 것을 해본 적은?"
"없지."
"마찬가지야. 다들."
"응?"
"한 달 만에 통장 잔액이 50만 엔을 넘기거나 체중이 단번에 5킬로그램 줄거나 하면, 그걸로 완전히 푹 빠져버려. 그런 타입의 인간이 있어."
"아, 그렇구나."
"재미있어져. 돈은 모으면 늘어나고, 밥은 안 먹으면 체중이 줄지. 그리고 버린 욕망과 아껴둔 시간이 눈에 보이는 형태가 되어서 남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 뒤로는 돈이나 체중의 노예가 되지. 인생의 보람이 없으면, 예금통장이나 체중계의 숫자에 쉽게 점령당하는 거야."
"……"
"그렇게 보면 인생의 보람을 갖는 것도 좀 생각해볼 문제지. 그게 무너지면 이도저도 아닌 상황이 되거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는 거지."-329~330쪽

나는 살아 있는 것이 귀찮은데, 죽는 것은 두려운 것 같다. 새로운 발견이다. 발치에서 하루가 비참한 비명을 고래고래 지르고 있다. 도시의 소음이 하루의 고함소리를 감싸 밤하늘로 올라간다. 그 밤하늘은 새까맣고 조용했다. 인공의 빛도 인공의 소음도 하루의 비명도 하늘에는 닿지 않는다. 하늘은 지상에 무관심한 것이다.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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