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포 킬러 - 본격 야구 미스터리
미즈하라 슈사쿠 지음, 이기웅 옮김 / 포레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앞날이 창창한 두 프로야구 선수가 경기조작으로 적발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선수 모두 내가 응원하는 팀의 선수라 한동안 패닉에 빠져 있었다. 애증의 엘지와 이제 연을 끊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었고, 두 선수만 처분받는 수준에서 조사를 마무리하는 것 같아 영 찝찝하기도 했다. 야구 때문에 속이 상할 때는 그깟 공놀이라며 애써 쿨한 척했지만, 그깟 공놀이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 되어 차마 놓을 수 없어 시범경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야구장에 직접 가서 남은 선수들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시범경기로나마 야구에 대한 갈증을 조금씩 채우던 중 만난 야구소설 한 권. <사우스포 킬러>다.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기 팀 오리올스. 2년차 투수인 사와무라는 자기 관리에 철저한, 떠오르는 좌완 에이스다. 다른 선수들과도 별로 교류하지 않고, 대중의 인기에도 신경쓰지 않으며 묵묵히 페이스를 유지하기 때문에 주위에서는 재수 없다는 평가도 받지만 어쨌거나 실력은 발군인 투수다. 이렇게 앞날이 창창한 그의 인생이 전혀 예상치 못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사와무라의 집에 뱀 같이 생긴 한 남자가 찾아와 약속을 지키라며 그를 폭행하고, 구단에는 사와무라가 경기조작에 가담했다는 내용의 투서가 날아온다. 이에 구단에서는 사와무라를 자택근신시키고 2군으로 내려보내지만 언론은 들끓기 시작하고, 사와무라는 순식간에 경기조작 선수로 낙인 찍힌다. 방심하다가 당한 공격에 어리벙벙했던 사와무라. 누구보다 자신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직접 조사에 나선다. 대체 누가, 왜, 사와무라에게 경기조작이라는 누명을 씌운 것일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수상작이라는 점과 야구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컸는데, 이 책은 그 기대를 가볍게 충족시켜줬다. '사우스포(좌투수) 킬러'라는 다소 험악한(?) 제목이지만 실제로 누군가 죽지는 않고 프로선수로서의 생명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프로선수들에겐 이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다)을 꼼꼼히 그려냈다. 겉으로 냉정해보이지만 사실은 "망망대해에서 돛이 부러진 요트처럼 엄청나게 휘청거리고 있"는, "살아오면서 표정을 감추는 훈련을 너무 많이 해온 탓"에 "냉정하게 보일 뿐"인 사와무라라는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었던 데다가 그가 직접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해 발로 뛰고, 또 그 과정에서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맞서 싸우기도 하는 모습 등이 시체 한 구 없는 이 독특한 미스터리에 충분히 힘을 더해줬다. 이렇게 얘기하면 조금 비약일 수 있겠지만, 역량은 뛰어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가 선발로 등판해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완투, 완봉승을 거둬 점차 뉴에이스로 거듭나는 소설이랄까. (아, 써놓고 보니 박현준 생각이 또 날 뿐이고...)   

  사와무라라는 캐릭터도 좋았지만, 프로야구단이라는 하나의 집단 안에서의 서로에 대한 질투와 견제, 각 선수의 심리, 트레이드 같은 구단 운영, 그리고 실제 경기에 대한 생생한 묘사 등을 읽는 것 또한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야구로 치면 9회말 2아웃 상황 정도될 것 같은, 사와무라가 자신의 선수 생명을 걸고 등판한 경기 장면이 하이라이트였지만, 9회까지 가는 과정 또한 생동감 넘쳐서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단순히 야구소설 혹은 미스터리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진위 여부는 둘째치고 껀수가 된다 싶으면 승냥이떼처럼 덤비는 언론에 대한 비판, 그리고 대중의 알 권리라는 이름 하에 우리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뜨리는지에 대한 반성 또한 담겨 있어 야구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부담없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거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수상작은 최소한 안타는 쳐주니 말이다. 이제 내일이면 프로야구 개막이다. 올해는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지 자못 기대된다. 모두의 건승을 빈다. (소심하게, 엘지트윈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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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12-04-0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범하게, 쌍둥이 화이팅!ㅋㅋㅋㅋ 읽을까 말까 했는데 저도 조만간 함 열어봐야겠어요.^^

이매지 2012-04-06 16:24   좋아요 0 | URL
사실 더 써야 하는데 쓰다 보니 기력이 쇠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에 재미도 있으니 한번 읽어보시구요...
쌍둥이네는... 제가 격하게 아끼는 찬규찡!이 있으니까요. ㅠ

다락방 2012-04-06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야구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제 남동생을 위해 이 책을 구입해야 겠네요. ㅎㅎ

이매지 2012-04-06 16:33   좋아요 0 | URL
야구와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재미있게 읽으실 겁니다.
아, 다락방님도 오랜만에 영접! ㅠ

한솔로 2012-04-0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이 리뷰를 보고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이매지 2012-04-06 17:35   좋아요 0 | URL
엇, 이기웅 선생님이신가요? ㅎㅎ
트위터에서 뵙다가 여기서 뵈니 새삼 반갑습니다. ㅎㅎ
 
사우스포 킬러 - 본격 야구 미스터리
미즈하라 슈사쿠 지음, 이기웅 옮김 / 포레 / 2012년 3월
절판


더블플레이. 오, 이 뭐라 형용해야 좋을 아름다운 울림을 지닌 단어란 말인가. -13쪽

"그러니까 지난번 지난번일 뿐이지. 자네 말을 의심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알잖아, 우리 팀은 항상 주목을 받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곤란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스캔들이네. 사소한 일을 갖고도 난리법석을 치니까."
"요컨대 사실이 어떻든 구설수에 오른 것만으로도 문제다, 그런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 그러니까 우리로서도 조사를 해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니 자넬 믿지, 믿으니까…… 역시, 그러니까 절차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한동안 자네는 1군과 떨어져서……."
-67~8쪽

공을 던지는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스위스 시계와 같은 정밀함이 요구되는 움직임이다. 약 18미터 앞의 목표를 향해 몸의 근육과 관절을 하나의 통일체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미세한 먼지 하나가 시계를 고장 내듯이, 사소한 이상이 몸 전체의 밸런스를 깨뜨리고 만다. 무사사구 시합을 다섯 차례나 기록한, 컨트롤이 좋기로 유명한 야마우치 투수가 2회까지 일곱 개의 볼넷을 내주고 강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발톱을 너무 깊게 자른 게 원인이었다. 나 역시 거의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미세하게 남아 있는 코와 옆구리의 통증이 피칭 메커니즘에 미묘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발을 드는 타이밍을 바꿔보고, 팔꿈치를 올리는 동작을 늦춰보는 등 이것저것 조정해보느라 고투를 벌였지만 결국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70쪽

냉정이라. 타인의 내면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꼈다. 사실 내 마음은 망망대해에서 돛이 부러진 요트처럼 엄청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표정을 감추는 훈련을 너무 많이 해온 탓이다. 그래서 냉정하게 보일 뿐인데. -85쪽

아직 나에 대한 의혹 추궁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 며칠 전만 해도 오리올스 선수 출신인 스포츠 해설자가 "투수 한 사람의 힘으로 승부조작을 하기란 현대 야구에서 불가능하다"라고 발언했다가 맹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 발언의 요지는 "현대처럼 중간과 마무리의 분업화가 이루어진 야구에서 과연 선발 투수 한 사람이 주도하는 승부조작이 가능할까? 조금만 얻어맞아도 바로 교체되고, 또 그 뒤 타선이 폭발할 가능성도 있다. 팀 전체가 짜지 않는 이상, 승부조작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듣기에도 지극히 당연 마땅한 의견이었다.
대부분의 스포츠 프로그램, 스포츠신문, 잡지가 그의 의견을 문제 삼고 깡그리 짓밟았다. 이른바 야구 도박의 세계는 컴퓨터의 도입으로 세세한 부분에서까지 도박을 걸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3회까지 몇 점을 실점하느냐를 놓고도 도박이 가능하다. 반드시 시합에 져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105~6쪽

이 집 정원은 가전제품 쓰레기장이 되어 있었다. 온갖 종류의 가전제품들이 버려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아직 쓸 만해 보이는 물건도 많다. 원래는 괜찮은 성능, 괜찮은 소재의 물건이었을 텐데 지금은 이렇게 내팽개쳐져 있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2군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59쪽

하타다가 결정한 트레이드 중에 일곱 건이 좌투수였다. 우투수가 나간 경우는 한 건밖에 없다. 상당히 기이한 비율이다. 어느 구단이든 좌투수가 부족하고, 게다가 왼쪽 타석에 강타자들이 모여 있는 현실에서 좌투수를 내보내는 행위는 그리 현명한 트레이드라고 할 수 없다.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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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토마스 1 팡토마스 1
피에르 수베스트르.마르셀 알랭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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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토마스!"
"뭐라고요?"
"팡토마스 말입니다……"
"그게 뭔데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죠!"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누구도 아니면서…… 분명 누군가이긴 한 존재!"
"도대체 그 누군가가 뭐 하는 사람인데요?"
"공포를 퍼뜨린답니다!"-7쪽

우리가 사는 이 시대야말로 사상 초유의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를 낳게 한 장본인이다 이 말씀입니다. 궁지에 몰린 공권력과 떠도는 풍문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이름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팡토마스라는 괴이한 존재 말이에요! 팡토마스…… 실은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설명하는 건 물론이고, 얼추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때로는 신분이 확실하다 못해 다들 알 만한 인물이다가도, 어떨 땐 동시에 서로 다른 두 인물로 둔갑하기도 하니까요! 아, 팡토마스는 어디에도 없고 모든 곳에 있어요! 가장 난해한 수수께끼가 나도는 곳엔 반드시 그의 그림자가 배회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해명할 수 없을 것 같은 범죄사건들 주변엔 항상 그의 흔적이 감돈단 말이에요. -10쪽

세상 어디에도 완벽하게 안전한 자물쇠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아셔야죠. 어차피 열쇠로 열리는 것이 자물쇠인 한 말입니다. 만약 문에 간단한 구식 걸쇠가 설치되어 있었다면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걸쇠로 문이 잠긴 곳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뿐이니,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은 게 분명하다고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열쇠만 있으면 얼마든지 열리는 자물쇠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한데 본을 뜰 수 없는 열쇠란 존재하지 않고, 일단 본을 떠놓으면 어느 열쇠든 위조할 수가 있지요. 결국 범인은 그와 같은 위조 열쇠를 가지고 성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93~4쪽

아, 팡토마스는 존재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요. 하지만 과연 그가 누구냐 이 말입니다! 적어도 가늠할 수는 있는 위험이라야 물리치고 극복하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으니 그저 벌벌 떨 수밖에요. -101쪽

"잔느 양, 지금 같은 여름 저녁에 이렇게 멋진 경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해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전 별로 안 그런데……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죠?"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보다시피 나는 불행히도 좀 감상적인 타입이랍니다. 여태껏 따스한 애정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것을 무척이나 힘들어하고 있지요. 가슴속에 간직할 진정한 사랑이 절실하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베르비에 씨를 보는 프런트 담당 여직원의 눈빛에 살짝 빈정대는 기색이 어렸다.
"그런 것 모두 부질없어요. 사랑처럼 어리석은 게 또 어디 있다고…… 몹쓸 병처럼 조심해야 하죠!"
하지만 앙리 베르비에는 부드럽게 반박했다.
"그럴까요? 사랑은 결코 어리석은 것 같지 않은데요. 오히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부자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런 부자가 되어봐야 배만 곯기 십상이죠."-2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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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29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는 문외한인데 이거는 좀 땡겨요.^^

이매지 2012-03-30 09:43   좋아요 0 | URL
읽어보세요! 스텔라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 ㅎㅎ
 
고토바 전설 살인사건 명탐정 아사미 미쓰히코 시리즈
우치다 야스오 지음, 한희선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품절


일반 사람들은 대개 경찰관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대전제를 갖고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사회 질서가 잡힌다. 정치가 부패했다고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그럭저럭 안정된 번영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사법권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경찰에 국민이 신뢰와 기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25쪽

"재미있냐는 식으로 함부로 말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연구란 뼈를 깎는 듯이 힘든 겁니다. 게다가 고토바 법황이라는 큰 인물이 역사의 큰 파도에 끝내 저항하지 못하고 스러져간 과정에서 정치의 중추와 민중이 어떻게 관련되어 행동했는지는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전설이라고는 하지만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짧은 이야기 하나하나에 권력을 얻은 자와 잃은 자, 그리고 양자의 갈등 사이에서 몸 기댈 곳을 찾으며 조용히 역사를 바라보던 토착민들의 숨결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169쪽

"왜 그런 식으로 패배주의에 빠진 말씀을 하십니까. 경찰 조직은 분명 강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강대하기 때문에 행동이 불가능한 일도 있습니다. 게다가 조직, 조직 해봐야 현장의 일선은 수사원이라는 개인이 아닙니까. 개인의 착안, 개인의 추리를 무시한다면 경찰의 조직력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199~200쪽

"말씀드리기 전에 약속해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뭘 말입니까?"
"그게, 저도 수사를 도울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노가미는 어안이 벙벙했다.
"돕는다? 수사를 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긴다이치 코스케 비슷한 거죠."
"그렇지만 일반인인 당신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제가 멋대로 형사님에게 정보를 넘기거나, 가시는 곳에 우연히 나타나더라도 아무도 불평은 못 할 겁니다."
"그거야 뭐 그렇습니다만……."-20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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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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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곳에서 약간 기이하고, 토론을 좋아하고, 수줍어하는 사람으로 이미지를 심으리라. 하지만 보도를 걸어가면서 혼자 중얼거리기 따위의 사랑스러운 버릇 한두 가지는 가지리라. 좀 낡은 버릇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늘날 이미 낡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낡기는 했어도 그의 시대에는 충성스러운 사람인 것이다. 결국 일정한 시기가 되면 누구나 선택을 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뒤로 물러설 것인가? 현대풍이라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그 모든 바람에 떠밀려 가지 않는 것도 나름대로 명예로운 것이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붙들고 딱 버티는 것, 그 시대의 참나무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46쪽

"그걸 이제야 알았네. 하지만 1년 전에는 몰랐어. 부하를 믿어 주고 또 믿지 말아야 하는 타이밍을 잡기란 쉽지 않지. 자네는 다소 다른 기준에 따라 생활하고 있지. 또 그렇게 해야 하고. 나는 그걸 현실로 받아들이네. 난 결코 그것을 판단하려는 건 아닐세. 우리의 방법은 다를지라도 목적은 같지." 그가 작은 도랑을 건너뛰었다. "누군가 도덕도 결국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 자네 그런 견해에 동의하나? 자넨 아마 동의하지 않겠지. 도덕은 당연히 목적 속에 들어 있는 거라고 할 테지.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그 목적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는 거야. 특히 영국인의 경우에는 복잡하거든. 우리는 자네 같은 조직 속의 사람들에게 우리를 대신하여 정책을 만들어 내라고 할 수가 없어. 자네들에게 그 정책을 충실히 수행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 뿐이지. 그렇지 않나? 이건 정말 까다로운 문제야." -108쪽

"아무것도 안 하려는 사람에게는 늘 열 가지 이상의 핑계가 갖추어져 있지요." 앤은 즐겨 말했다. 실제로 그녀가 자신의 무수한 외도를 변명할 때 즐겨 쓰는 말이기도 했다. "어떤 것을 하는 데 필요한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에요. 그건 자기가 원하기 때문이에요." 아니면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인가? 앤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은 강하게 부인할 것이다. 대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게 뭔지 아세요. 그건 강요라는 말이에요. 물론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지 않는 데에도 그 말이 필요하겠지만."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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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3-2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르 카레 소설은 의외로 예전에 많이 번역된것 같더군요.르 카레 소설중 1~2권으로 나온 두 편의 소설을 각각 한권씩만 보유하고 있는데 나머지 책을 구하지 못해 영 답답하더군요.근데 그 책을 열린 책들에서 번역할 생각도 없는것 같네요ㅜ.ㅜ

이매지 2012-03-21 10:16   좋아요 0 | URL
이번에 영화가 잘 됐으면 탄력받아서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영화가...영화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