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Mr. Know 세계문학 24
제임스 A.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구판절판


나는 방금 전에 <영향력>이란 말을 사용하였는데, 그 단어는 60고개에 들어선 우리 부부의 삶에서 서서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부각되었다. 우리 부부는, 이 미국 사회에서 어느 분야의 예술가든 크게는 이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해 주는 영향력에서 자신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보답을 찾는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엠마가 그러했다. 원래 교회 단체에서 세운 대학인 메클렌버그 대학에서 나도 어느 정도의 교육은 받은 셈이지만 브린 모 대학을 나온 엠마는 더 섬세한 교육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언제나 강한 신념 하나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그 신념이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같은 작가들이 어렵사리 획득한 명성과 부를 훌륭한 사회 사업이나 학생들이 사회에 안전하게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녀가 즐겨 사용하는 말대로,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그릇된 방향으로 기울고 있는데도 호통을 치지 않는다면 그 명성이나 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단호한 생각이었다. -43쪽

나보다 훨씬 똑똑한 여자인 내 편집자 역시 나를 겁나게 하는 존재였다. 그래도 그녀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또 우리는 함께 내 원고가 형체를 갖출 수 있도록 무진 애를 쓰기도 했었다. 그러나 진짜 두려움은 딴 곳에 있었다. 원고가 서서히 인쇄 과정에 들어감에 따라 나는, 과연 비평가들이 내 작품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평을 해줄 것인지, 독자들이 과연 내 책을 사서 볼 것인지 정말 가슴 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내 뜻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된 것이 없었다.
책이 세상에 나왔다가는 곧 날개 찢긴 새처럼 퍼덕거기라다가 죽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더욱이 네 번씩이나 그러한 고통을 경험하다니! 정말 불운한 세월이었다. -49쪽

어떤 책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책의 장점을 발견해서 책을 구입하고 또 나중에 가서는 <이 작가가 다음번에는 무슨 책을 낼지 궁금한데>라고 말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바로 글쓰기고 또 출판이에요. -57쪽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미스 데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고나 그 원고를 쓴 작가와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항상 팔 하나의 거리를 유지해야 해요. 그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결국 당신의 성공은 당신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얼마만큼 올바르게 그들을 판단하느냐 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어요.」-164쪽

마멜스타인은 훌륭한 편집자로서 세 가지 자질을 지닌 여자야. 첫째는,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멋진 소설을 찾아내는 능력, 둘째는, 시류에 적합한 주제들을 찾아내고 또 그것을 논픽션 책으로 엮어 낼 적절한 작가를 발굴하는 능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15년이 지나도 읽고 싶어 하는 그런 책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지. -185쪽

글을 쓸 때 혈관을 통해 뜨거운 피가 흐른다는 강렬한 의식이 없으면, 그 글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담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글쓰기란 곧 신체의 모든 부분을 다 동원해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겁니다. 스트라이버트 교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주전자의 물이 끓을 때 그 속에 모든 재료를 다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226쪽

하지만 스트라이버트 박사님, 소설이 아닌 논픽션의 경우는 달라요. 그런 책들 가운데 성공한 책들의 절반 정도는 다 대중들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생각 깊은 편집자들이 제안해서 만들어진 책일 겁니다. 어쩌면 베스트셀러의 4분의 3이 편집자들이 제안한 책일지도 모릅니다.-278쪽

잘못은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데블런 교수님이 나에게 쏟아 부었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실제 상황에 있는 실제 인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네.> 그의 현명한 충고는 계속되었다. <추상적 개념에 관한 소설은 실패할 수밖에 없네. 유형적 인물에 대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물에 대해 써야만 하네.> 이러한 충고를 나는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강조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그러한 충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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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0-03-21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세상에 나왔다가는 곧 날개 찢긴 새처럼 퍼덕거기라다가 죽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아, 정말 슬픈데요. 하지만, 단 몇 %만을 위한 책이라 하더라도 필요해요.
'단 1명이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다면' '단 1명이라도 가슴이 일렁이 생겨
변화시킬 수 있다면' 이라는 마음이 있다면 좀 덜 슬프지 않을까, 그게 바로 작가의
마인드 아닐까 생각하긴 하지만...

이매지 2010-03-21 22:07   좋아요 0 | URL
물론 단 몇 %만을 위한 책도 필요하겠지만, 작가나 편집자 입장에서는 좋은 책이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 ^^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사실 책의 운명은 2주 안에 판가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좋은 책인데 그렇게 묻혀버리면 좀 안타깝죠^^;
 
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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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오항녕 하면, 일전에 있었던 이덕일과의 논쟁이 먼저 떠오른다. 이덕일이야 대중 역사서 분야에서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니만큼 그 파급력을 무시 못 하기에, 그의 논리(혹은 주장)는 꽤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지 않을까 싶다. (일례로 이덕일이 주장한 대로 정조가 독살 당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있다. 정조어찰첩의 발견 이후에도 이덕일은 이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주류 학계를 쏘다'에서 볼 수 있듯이 이래저래 이덕일은 학계와 부딪히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오항녕도 이덕일과 부딪힌 적이 있는데, 사실 내가 이 책을 읽은 것도 500년 동안 조선이 유지된 저력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부분보다도 이덕일을 논리 혹은 사료로 반박하는 모습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간 '왜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며, 그래도 500년이나 시스템이 유지됐는데 뭔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왔었다. 조선만이 가지고 있는, 조선만의 힘. 그 궁금증을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저자는 문치주의, 실록, 강상, 대동법, 성리학 등을 조선의 저력으로 평가한다. 그동안 역사를 '콩쥐-팥쥐' 프레임(동시에 있을 수 있는 정책이나 견해를 선/악 구도로 환원하는 '근대 한국 역사학의 포폄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이 책은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좀더 유연하고, 능동적인 사고로 역사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저자의 논리 전개를 보면서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던 사실에 대해 충격을 받기도 했고, 의문을 가졌던 부분(주기론, 주리론 그리고 퇴계와 율곡의 연관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해답을 얻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출판사 측에서 '쉽고 재미있게 써 달라'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는 프롤로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갈 정도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간중간 일상의 예를 들어 설명해 어느 정도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책이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조선시대에 포커스가 집중되어 있지 않고, 중간중간 MB정부에 대한 비난이 끼어들어 있던 것이었는데, 광해군의 궁궐 공사나 4대강 사업, 대동법과 쇠고기 협상을 연관지어 논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그 위치가 중간보다는 마무리에 어울리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사실을 왜곡하지는 말 것,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서 얘기할 것'. 저자가 역사에 대한 해석을 위한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과연 그것이 제대로 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비단 글을 쓰고 연구를 하는 저자만이 아니라 책을 접하는 독자도 되새길만한 구절이 아닐까 싶다. '천박한 역사의식'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런 달콤한 독을 받아들이는 대중에 대한 비판을 읽으며 어쩐지 뜨끔 하기도 했지만, 오랫만에 제대로 된 역사서를 만나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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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천자문 2010-03-20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덕일은 '학자'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인물입니다.

이매지 2010-03-21 11:02   좋아요 0 | URL
이덕일은 '학자'라기보다는 '필자'정도 될까요 ㅎㅎ

산그늘 2010-03-26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런 리뷰 잘 읽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지적 감사하고 지금 제작하고 있는 새로운 판에 반영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기화'는 못되게 이용하는 기회의 의미인 奇貨가 맞습니다.
문맥상 충분히 그렇게 지적하실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합니다.
역비에 지속적인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_ _)

이매지 2010-03-26 10:56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화에 그런 뜻도 있었군요.
새로운 단어에 대해 배우고 가네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것은 역시 ㅎㅎ
오자 수정하셨다고 하니 샤샥 삭제를 ㅎㅎ
 













애거사 크리스티의 탐정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미스 마플에게 바치는 오마주라는 점에서 관심이 가는 책. 주인공 그래디 골드를 비롯해 할머니들이 떼로 등장한다고;;;

<맛있는 살인사건>은 일종의 실버 타운인 라나이 가든에서 생일을 하루 앞둔 노인들이 잇달아 죽고, 이 죽음을 납득하지 못한 글래디 골드가 살인의 흔적을 쫓기 시작한다는 내용, <플로리다 귀부인 살인사건>은 남편의 불륜 현장을 잡아달라는 82세의 할머니의 의뢰에서 시작해 잇단 귀부인의 죽음과 연관되는 듯. 미스터리 요소보다는 유머러스할 것 같은데, 일단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이색 박물관에 대한 소개에 대한 책인가 싶었는데, 박물관에서 전시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지, 유물 혹은 작품은 어떤 순으로 진열되는 것인지 등에 대한 궁금증에 대한 책. 소개글을 보면 재미있어 보이고, 차례는 딱딱해 보여서 일단 실물을 한 번 봐야 할 듯.

















문동 세계문학전집 1번부터 정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이제 겨우 5번까지 읽은 참에 2차분이 출간됐다. 1차분에는 익숙한 작가나 작품이 많았다면 2차분에는 그동안 만나보지 못한 작품들이 많아서 신선하다. 양장/반양장 두 버전으로 동시에 출간됐는데, 둘다 나름의 매력이 있는 듯. <피로 물든 방>이나 <체스 이야기>, <파계> 같은 작품이 눈에 들어와 어쩐지 마음이 급해져 순서대로 읽는 걸 그만두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읽을까 싶어진다.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재미있게 읽어서 마크 해던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최근 그의 책이 연달아 소개 됐다. <마크 해던의 소문난 하루>는 동성애, 재혼, 불륜 등의 이야기를 한 가족을 통해 보여주는 책. <쾅! 지구에서 7만 광년>은 학교에서 우연히 선생님들의 외계어 대화를 듣게 된 문제아 짐보와 찰리, 그리고 짐보의 누나 베키가 얼떨결에 우주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 소개글만 보면 같은 작가의 책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두 작품 모두 궁금.


그 외 관심가는 책들 몇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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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0-03-1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위 두 권 ㅋㅋㅋ 크리스티에 눈이 번쩍 ㅋㅋ
코지 미스테리같아서 찾아봤더니 역시 그렇네요 꽤 많이 나온 시리즈인 듯...
근데 보통 한 권 먼저 내고 반응 봐서 후속 출간 결정하지 않나요? 자신있나봐요 ㄷㄷ
웰컴 투 박물관도 담아가요~~

이매지 2010-03-19 09:07   좋아요 0 | URL
표지가 코지 미스터리 풍이죠 ㅎㅎㅎ
일단 두 권 내고 반응을 볼 예정인지...
어쨌든 시리즈물은 이왕 나오는 거 쭉 나오면 좋을 텐데 그러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_ㅜ

hnine 2010-03-19 0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들이 떼로 등장...' ㅋㅋ
위의 책들 표지 제목 글씨체에서 요즘 어떤 경향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플로리다 귀부인 살인사건', '맛있는 살인사건', '웰컴 투 박물관', '소문난 하루' 등등. 저런 글씨체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요.

이매지 2010-03-19 09:0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런 장난스런 서체!
저런 서체랑 어울리는 책들이 많아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

카스피 2010-03-19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요즘 추세인 일본 추리 소설이 아니어서 무척 반갑습니다^^

이매지 2010-03-19 09:08   좋아요 0 | URL
일본 추리소설이 대세이긴 한데, 전 영미 쪽도 좋더라구요 ㅎㅎ

다락방 2010-03-19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밑에 [클래스]가 확 눈에 띄는데요! 아주 오래전에 '에릭 시걸'의 [클래스]를 읽은 적이 있던터라, 혹시 이작품이 그작품? 하고 지금 책정보 봤더니 전혀 다른 작품이네요. 또 보관함에 살짝. 훗

이매지 2010-03-19 09:08   좋아요 0 | URL
저 클래스 표지에 있는 남자가 작가라고 하더라구요.
작가가 직접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 ㅎㅎㅎ
영화 개봉하는 것 같던데, 재미있을 것 같아요 :)

무해한모리군 2010-03-19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두건 찜찜
문동2차분은 저도 흥미로운게 너무 많아서 막 좋아라 하고 있어요.
박물관은 이매지님이 보고 흥미로운지 전해주세요 ㅋㄷㅋㄷ
일단 땡투를 날리며~
좋은하루 이매지님 ♥

이매지 2010-03-19 09:09   좋아요 0 | URL
박물관은 언제 읽을 수 있을 런지 ㅎㅎㅎ
휘모리님도 좋은하루♥

그린브라운 2010-03-19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있는 살인사건은 "오늘도 안녕하세요"라는 제목으로 한번 나왔던 책입니다 출판사랑 제목이 바뀌어서 다시 나왔네요^^ 재미있었어요~~ 후속권이 나왔다니 기대됩니다

이매지 2010-03-19 12:32   좋아요 0 | URL
오호, 그렇군요 :)
처음 소개된 작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L.SHIN 2010-03-19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문난 하루], [쾅! 지구에서 7만 광년]
내 입에 낚시줄이 걸리고 말았어요. 책 구경 하러 가야지~ 냐하항항항~^^

이매지 2010-03-19 12:32   좋아요 0 | URL
쾅! 지구~는 엘신님 취향에 잘 맞을 것 같아요 ㅎㅎㅎ
 
파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절판


아버지는 또 덧붙여서, 세상에 나가 출세하려는 백정 자식의 비결- 유일한 희망, 유일한 방법, 그것은 오직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 고백하지 마라. 한때의 분노나 비애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거라 생각해라" 하고 아버지는 가르쳤던 것이다.
일생의 비결이란 이처럼 간단한 것이었다. '숨겨라'- 훈계는 이 한 마디가 다였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어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하며 흘려듣고, 다만 이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가득 차 집을 뛰쳐나왔던 것이다. 즐거운 공상의 시대에는 아버지의 훈계도 곧잘 잊고 지냈다. 그러나 갑자기 우시마쓰는 소년보다 어른에 가까워졌다. 갑자기 자아를 깨닫게 되었다. 꼭 재미있는 옆집에서 재미없는 자신의 집으로 옮겨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숨기려 하였다. -16쪽

강사 중에 천민의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전교에 퍼지자 모두 경악과 의심으로 동요했다. 어떤 사람은 렌타로의 인격을, 어떤 사람은 용모를, 어떤 사람은 학식을 들먹이며, 다들 도저히 백정 출신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고 우겨댔다. 내보내라는 소리는 일부 교사들의 질투로 일어났다. 아아, 인류의 편견이라는 거싱 없었다면 키시너우에서 살해당하는 유대인도 없었을 것이며, 서양에서 떠들어대던 황화설도 없었을 것이다. 억지가 통하고 도리가 막히는 세상에서 백정 자식이 쫓겨나가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 결국 렌타로가 출신 성분을 고백하고 많은 교우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갈 때, 이 강사를 위해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렌타로는 그렇게 사범학교 문을 나와서 '학문을 위한 학문'을 버린 것이다.-19쪽

아버지는 이 에보시가다케 기슭에 숨어 살기는 했지만, 공명을 꿈꾸는 마음만은 일생 동안 불같이 타오른 사람이었다. 그것이 욕심 없는 숙부와 아주 다른 점이었다. 그 누를 수 없는 심한 욕망 때문에, 세상에 나가 일할 수 없는 처지라면 차라리 산속에 들어가버리겠다는 울분이 그칠 길이 없었다. 자신은 뜻대로 살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식만은 뜻대로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꿈꾼 것을 꼭 아들이 이루게 해주고 싶었다. 설령 해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는 날이 오더라도 이 뜻만은 굳게 지키고, 변하지 마라, 나가라, 싸워라, 입신해라, 이것이 아버지의 정신이었다. 지금 우시마쓰는 아버지의 고독한 생애를 회고하며 당신의 유언에 담긴 희망과 정열을 한층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잊지 말라는 일생의 교훈의 생명감, 허덕이는 듯한 남성의 영혼의 호흡, 아들의 가슴에 흘러내리는 아버지의 핏발,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더욱 깊은 감동을 우시마쓰의 가슴에 남겼다. 아아, 죽음은 말이 없다. 그러나 우시마쓰의 지금 처지로는 그것이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보다도 한층 깊게 일생의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124~5쪽

심심한 배 안의 사람들은 시종 잡담을 했다. 특히 타카야기와 함께한 스님은 농담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로 어울리지 않는 정치 이야기를 한답시고 이것저것 되지도 않는 말을 꺼내서, 듣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이 스님은 선거는 일종의 유희이며 정치가는 모두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며, 우리는 다만 구경하고 즐기면 된다고 했다.-189쪽

설법의 1부는 원숭이 비유로 시작했다. 지식이 있는 원숭이는 세상일에 모르는 것이 없다. 많이 공부하고, 많이 외우고, 많은 경전을 암송하고 만인의 스승이 될 정도의 학문을 쌓았다. 짐승의 슬픔은 다만 한 가지, 믿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비록 이 원숭이만큼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믿는 힘이 있기에 비로소 범부도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숙명적인 고마움을 생각해서 아침저녁 염불을 게을리하지 마시오. 이렇게 주지는 설법했다.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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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3-19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가 국내에 번역되었군요.전 이 작품을 70년대 삼중당에서 나온 다까기 아끼미쯔의 파계 법정이란 책에서 알았읍니다.파계에는 일종의 천민 부락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더군요.우리네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백정과도 같은데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도 고기를 잘라 팔았던 정육점 주인은 무척 천대를 받았다고 하는군요.아무래도 백정이라는 인식이 강했던것 같습니다.
위에 적으신 것처럼 일본에서도 부락민들은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같은 일본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하며(당시 조선인보다도 더 천대받았다고 하네요),이른바 주민 대장에서도 부락민 출신이라고 명기되었다고 합니다.그리고 패전 이후에는 주민대장에서 출신 성분 명기가 없어졌지만 부락민 출신인것이 알려지면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네요.
파계를 다 읽으시고 시간이 되시면 삼중당에서 나왔던 파계 법정(절판이니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보셔야 될듯)을 읽어보시면 상당히 재미있으실 겁니다^^

이매지 2010-03-19 09:12   좋아요 0 | URL
사실 아직도 백정이니 천민이니 그런 개념이 뿌리 뽑히지는 않았죠. 싸울 때 꼭 나오는 쌍눔의 시키. 같은 표현을 보면.

그나저나 70년대라니! 세로쓰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드는 군요 ㅎㅎㅎ
어쨌거나,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조선의 힘 - 조선, 500년 문명의 역동성을 찾다
오항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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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500년 이상 지속했던 조선 문명의 저력을 찾는 글들로 엮여 있다. 조선인들의 삶의 양식, 생각, 제도 중에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주제를 다루어보았다.
그런데 여전히,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사람들은 조선이 근대로의 전환에 실패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근대로의 전환은 시험에 합격, 불합격을 따지듯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일부만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조선을 비롯해 대부분의 문명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를 자신들의 미래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목표나 결과에 어찌 실패와 성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길 가다 강도를 만나 상해를 당하면 그 사람에게 운이 없다고 하지, 그 사람이 실패했다고는 하지 않는다.-5~6쪽

이왕의 조선 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이나 해석에 동의하지 못하는 데가 꽤 있기 때문에, 즉 조선 역사에 깨진 데가 많다고 생각하고 이 글을 썼기 때문에, 독자가 읽다보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나 해석과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특히 독자들이 내가 '범凡식민주의'라고 부르는 '식민주의'와 '근대주의'에 오염되어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읽는 동안 불편할지도 모른다. 흔히 "진실은 불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에 기대어 나의 견해를 합리화할 생각은 없다. 그건 오해이기 때문이다. "정작 불편한 것은 편견이다."-13쪽

치자인 국왕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기능인이나 전문가가 아니다. '한 사람이 다 잘하기를 바라지 말라(無求備於一人)'는 점에서 보면, 관리는 기능인이자 전문가여야 한다. 그러나 '군자는 한 방면에만 치우치는 전문가여서는 안 된다(君子不器)'는 관점에서 보면, 치자는 '다 잘해야 한다(不器)'. 그런데 '다 잘해야 한다'니! 어떻게 영어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고 100미터도 잘뛰나? 어떻게 국방도 잘하고 외교도 잘하고 교육도 잘하나? 이게 다기多器(다재다능)지, 어떻게 불기不器가 되나?
그러나 옳은 말이다. 달리 말하면, '군자란 전문성으로 평가될 수 있는 차원의 인격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두 측면이 있다. 여러 방면에서 전문성을 나타낼 수 있는 내공이 그 하나이다. 상황과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감각과 몸의 훈련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둘째는, 그 내공이 갖는 보편적인 지향이다. 그리고 둘은 서로 맞물려 있다. 이것이 군자이다. 대개 소인은, 보편적 지향이 결여된 내공만 있는 경우가 많다.-39~40쪽

성군이란 호칭은 임금이 성인이란 뜻인데,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가. 아니다. '내성외왕內聖外王', 곧 유가에서 왕은 성인이어야 했다. 그것은 훈련, 공부를 통해서 달성된다. 지금은 성인이 아니라도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군주의 덕성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조선사회는 이런 군주가 가져야 할 이상적 인격을 경연이란 제도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41쪽

실록의 묘미는 아무나 볼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국왕은 물론이고, 사관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기록이었다. 조선 양반 관료제가 자정성自淨性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큰 힘이 바로 이 실록에 있었다. 역사라는 심판관이 쥔 판결문을 아무나 볼 수 없었던 것이다. -61쪽

방납은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대신 내주고, 그 대가를 받아 이득을 취하는 행위이다. '생산되지 않는 공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방납도 있지만, 이득을 노리고 농간을 부려 민폐를 끼치는 방납도 있다. 종래에는 방납이 으레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운운하면서 조선 후기의 '봉건제 해체기 양상'의 하나로 다루어졌다. 물론, 방납이 '상품화폐경제'를 발달시키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방납은 공납제라는 부세제도의 부산물(이었다가 구조가 된 현상)로 보는 것이 옳다. -143쪽

700년 가까우누 긴 시간 동안 동아시아의 사상계를 주도했던 탓인지, 주자에서 집대성된 성리학에 대해 사람들은 선입견이 있는 듯하다. 마치 주자의 시대에 이미 성리학이 주도 이념이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그리고 이 오해에는 좀 생각해보여야 할 데가 있다.
우선 오랜 기간 주도 이념이었다는 것이 이런 오해의 직접적인 이유인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성리학이 주도 이념이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언짢음에서 나오는 오해처럼 보인다. 여기에도 근대주의적 콤플렉스가 작동한다. 망국에 이르게 한 사상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발생사적 접근이나 이해를 미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꺼풀을 벗어던져야 한다. -164쪽

조선문명의 성격은 분명히 평화적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하면 "당하고만 사는 게 무슨 평화주의냐"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르지만,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성공한 나라는 아직 역사상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부'와 '강'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은 돈이 얼마나 있어야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과 같다. 과연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부'와 '강'으로 사회의 평안과 행복의 척도를 삼으려고 했다면, 그건 줄을 잘못 서도 한참 잘못 선 셈이다. 그것은 단지 '어떤 바람직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조건, 그것도 '조절되어야 할 조건'의 하나일 뿐이다. -218~9쪽

그런데 역사 연구에서 조심해야 할 두 가지 병폐가 있다. 하나는 천박한 역사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쓰는 글이다. 천박한 역사의식이란 자신의 인간 이해에 상응하는 사료를 편한 대로 주워 모아서 역사상을 구성하는 일이다. 특히 인물의 이해에서 이런 식의 서술이 많지만, 꼭 인물 연구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흔히 인물은 그가 활동하는 역사무대가 있고 거기서 사건이 펼쳐지기 때문에 곧장 역사상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개는 어떤 일이 발생하고 전개되는 몇 가지 이유를 이리저리 고민, 갈등하는 과정을 통해 차츰 마음 놓고 보여줄 수 있는 역사상에 도달하는데, 그런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에 간단명료하다. 그래서 쉽다. 더욱이 이런 결론이나 관점이 기존 대중들의 관점과 부합하는 데가 있으면 한층 더 설득력(?)을 얻게 된다. 역사학의 포퓰리즘이라고 할 만하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러하다. 이는 역사상을 구성하는 사건이나 인간의 복잡성에 대한 검토를 거치지 않는 단순화 때문에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결과이다.-248~9쪽

한편 포퓰리즘은 역으로 필자 자신의 관점과 해석을 강화한다. 대중의 호의가 그에게는 이제 독이 된다. 아니, 어쩌면 알게 모르게 필자는 독자의 달콤한 독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필자에 대한 독자의 호의는 언제나 경계할 일이다. 모든 생명이 그렇듯이 긴장이 사라지는 순간이 쇠락의 시작일지니.
아무튼 현상적인 인과성 또는 연관성의 경중을 고려하지 않은 사료의 선택과, 그에 따른 역사상의 구성이 습관화되면서 필자는 미다스의 손을 갖게 된다. 단장취의나 견강부회라는 말이 어울리는 글이 되고, 그래서 결국 이제는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내가 경계 삼아 가진 지론이 있다. 역사상을 완벽하게 재구성해주는 사료는 없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원하는 역사상을 그려내지 못할 정도로 사료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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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3-1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근히 재미있네요^^

이매지 2010-03-16 09:24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도 한 번 읽어보세요 :)
그렇게 무겁지 않고 괜찮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