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
시마자키 도손 지음, 노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절판


아버지는 또 덧붙여서, 세상에 나가 출세하려는 백정 자식의 비결- 유일한 희망, 유일한 방법, 그것은 오직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령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 고백하지 마라. 한때의 분노나 비애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거라 생각해라" 하고 아버지는 가르쳤던 것이다.
일생의 비결이란 이처럼 간단한 것이었다. '숨겨라'- 훈계는 이 한 마디가 다였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어서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하며 흘려듣고, 다만 이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가득 차 집을 뛰쳐나왔던 것이다. 즐거운 공상의 시대에는 아버지의 훈계도 곧잘 잊고 지냈다. 그러나 갑자기 우시마쓰는 소년보다 어른에 가까워졌다. 갑자기 자아를 깨닫게 되었다. 꼭 재미있는 옆집에서 재미없는 자신의 집으로 옮겨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숨기려 하였다. -16쪽

강사 중에 천민의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전교에 퍼지자 모두 경악과 의심으로 동요했다. 어떤 사람은 렌타로의 인격을, 어떤 사람은 용모를, 어떤 사람은 학식을 들먹이며, 다들 도저히 백정 출신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고 우겨댔다. 내보내라는 소리는 일부 교사들의 질투로 일어났다. 아아, 인류의 편견이라는 거싱 없었다면 키시너우에서 살해당하는 유대인도 없었을 것이며, 서양에서 떠들어대던 황화설도 없었을 것이다. 억지가 통하고 도리가 막히는 세상에서 백정 자식이 쫓겨나가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 결국 렌타로가 출신 성분을 고백하고 많은 교우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갈 때, 이 강사를 위해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렌타로는 그렇게 사범학교 문을 나와서 '학문을 위한 학문'을 버린 것이다.-19쪽

아버지는 이 에보시가다케 기슭에 숨어 살기는 했지만, 공명을 꿈꾸는 마음만은 일생 동안 불같이 타오른 사람이었다. 그것이 욕심 없는 숙부와 아주 다른 점이었다. 그 누를 수 없는 심한 욕망 때문에, 세상에 나가 일할 수 없는 처지라면 차라리 산속에 들어가버리겠다는 울분이 그칠 길이 없었다. 자신은 뜻대로 살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식만은 뜻대로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자신이 꿈꾼 것을 꼭 아들이 이루게 해주고 싶었다. 설령 해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는 날이 오더라도 이 뜻만은 굳게 지키고, 변하지 마라, 나가라, 싸워라, 입신해라, 이것이 아버지의 정신이었다. 지금 우시마쓰는 아버지의 고독한 생애를 회고하며 당신의 유언에 담긴 희망과 정열을 한층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잊지 말라는 일생의 교훈의 생명감, 허덕이는 듯한 남성의 영혼의 호흡, 아들의 가슴에 흘러내리는 아버지의 핏발,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더욱 깊은 감동을 우시마쓰의 가슴에 남겼다. 아아, 죽음은 말이 없다. 그러나 우시마쓰의 지금 처지로는 그것이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보다도 한층 깊게 일생의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124~5쪽

심심한 배 안의 사람들은 시종 잡담을 했다. 특히 타카야기와 함께한 스님은 농담이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로 어울리지 않는 정치 이야기를 한답시고 이것저것 되지도 않는 말을 꺼내서, 듣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이 스님은 선거는 일종의 유희이며 정치가는 모두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며, 우리는 다만 구경하고 즐기면 된다고 했다.-189쪽

설법의 1부는 원숭이 비유로 시작했다. 지식이 있는 원숭이는 세상일에 모르는 것이 없다. 많이 공부하고, 많이 외우고, 많은 경전을 암송하고 만인의 스승이 될 정도의 학문을 쌓았다. 짐승의 슬픔은 다만 한 가지, 믿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비록 이 원숭이만큼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믿는 힘이 있기에 비로소 범부도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숙명적인 고마움을 생각해서 아침저녁 염불을 게을리하지 마시오. 이렇게 주지는 설법했다.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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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3-19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가 국내에 번역되었군요.전 이 작품을 70년대 삼중당에서 나온 다까기 아끼미쯔의 파계 법정이란 책에서 알았읍니다.파계에는 일종의 천민 부락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더군요.우리네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백정과도 같은데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도 고기를 잘라 팔았던 정육점 주인은 무척 천대를 받았다고 하는군요.아무래도 백정이라는 인식이 강했던것 같습니다.
위에 적으신 것처럼 일본에서도 부락민들은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같은 일본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고 하며(당시 조선인보다도 더 천대받았다고 하네요),이른바 주민 대장에서도 부락민 출신이라고 명기되었다고 합니다.그리고 패전 이후에는 주민대장에서 출신 성분 명기가 없어졌지만 부락민 출신인것이 알려지면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네요.
파계를 다 읽으시고 시간이 되시면 삼중당에서 나왔던 파계 법정(절판이니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보셔야 될듯)을 읽어보시면 상당히 재미있으실 겁니다^^

이매지 2010-03-19 09:12   좋아요 0 | URL
사실 아직도 백정이니 천민이니 그런 개념이 뿌리 뽑히지는 않았죠. 싸울 때 꼭 나오는 쌍눔의 시키. 같은 표현을 보면.

그나저나 70년대라니! 세로쓰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드는 군요 ㅎㅎㅎ
어쨌거나,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