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노스케 이야기 오늘의 일본문학 7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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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슈이치에 대해서는 딱히 열광적으로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마땅히 꺼리지도 않는 어정쩡한 상태. 하지만 오랫만에 접하는 그의 청춘소설이기도 하거니와, 번역서로는 독특하게도 한일 양국에서 같은 시기에 발행된 책이라는 점에 관심이 갔다. 게다가 나온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9점이 넘는 꽤 괜찮은 평점이라는 사실에 낚여 주섬주섬 <요노스케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책은 '요노스케'의 이야기다. 쭉 시골에서 살다가 대학 진학을 계기로 마침내 도쿄로 올라와 홀로 살게 된 요노스케, 그의 풋풋한 도쿄에서의 일 년이 매달 하나의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난다. 4월의 어느 날, 고등학교 졸업 앨범과 낡아빠진 학교 체육복, 늘 사용하던 대리석 받침대의 탁상시계 등이 든 묵직한 가방을 메고 비틀비틀 신주쿠에 등장하는 것에서부터 입학식, 삼바 동호회 가입, 야간 호텔 아르바이트, 풋풋한 데이트 등으로 요노스케는 바쁘게 살아간다. 딱히 아는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자신만의 색깔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그의 모습은 지금은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명료하지만, 10년 쯤 지났을 때 어떤 형상을 만들기 위한 과정처럼 그려진다. 

  어리바리하고 별다른 걱정이나 계획도 없어 보이는 요노스케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이 술술 잘 읽힌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 없는 부잣집 아가씨 쇼코와의 긴가민가 갸웃갸웃한 연애도, 야간 아르바이트와 학교 생활을 병행하는 빡빡한 신입생 시절도 어쩐지 '아, 나도 저렇게 멋 모르고 순수한 때가 있었지'라는 아련한 추억에 잠기게 했다. 요노스케의 낙천적인 면모와 풋풋함은 왠지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띤 채 책을 읽어가게 만들었다.

  요노스케의 도쿄에서의 1년을 다룬 이 책은 제법 두께가 있지만, 요시다 슈이치의 다른 작품도 그렇지만 딱히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인생이라는 것은 한순간의 경험으로 바뀔 수 있다는 기본적인 메시지 외에는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요노스케와 친구들의 왁자지껄하고 약간은 맹한 에피소드에 어쩐지 키득거리기도 했지만, 책을 내려놓고 나니 크게 인상 깊은 부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앞전에 접한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이 <악인>이라 더 비교가 된 듯한데, 역자도 후기에서 밝혔듯이 <악인>의 경우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 선악 판단과 같은 문제제기와 심오한 의미에 압도'되었다면 <요노스케 이야기>는 '가볍고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쪽이다. 역자는 '소설 구조의 묘미와 소설 쓰기의 전범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이 책을 평했는데, 사실 구조 면에 있어서도 어쩐지 끼어맞추기 식으로 진행된 것 같아 썩 흥미롭지 않았다.

  책 속에서도 요노스케의 매력으로 어중간함을 꼽는데, 이 책의 매력도 요노스케의 매력과 같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 친숙한 느낌이 들고 마음을 터놓게도 하지만, 어딘가 못 미덥기도 한, 요노스케라는 인물에 걸맞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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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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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2009년의 마지막 책이라 생각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해를 넘겨 1년 만에 끝냈다. 워낙 두꺼운 책에 겁을 먹었지만 오래 전부터 '꼭 한 번은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던 책이기에 나름 굳게 마음을 먹고 읽기 시작. 같은 책을 페이지가 암만 두꺼워도 어지간해서 삼 일 내로 끝냈던 내게 근 보름이 넘도록 붙잡고 있게 한 톨스토이와의 첫 만남은 역시 예상처럼 녹록치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성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던 것은 나도 모르게 이 작품에 빠져 들었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니나>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100페이지가 넘도록 도무지 주인공 안나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1권 중반이 되서야 오랜 기다림 끝에 안나는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려 위기에 처한 오빠를 구해줄 사랑스러운 여동생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오빠를 위해 달려온 모스크바에서 안나는 브론스키라는 젊은 귀족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애초에 애정이 없는 결혼을 했던 안나와 결혼이라는 매개로 한 여자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브론스키의 불꽃 같은 사랑. 하지만 톨스토이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을 마냥 행복한 것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남편도, 아이도 버리고 결국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선택하는 안나는 자신의 부정한 행동으로 인해 사교계에서 배제 당하고, 기존에 알고 지냈던 이들과의 관계도 무너진다. 누구보다 매력이 넘쳤지만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씩 잃은 안나에게 남은 것은 브론스키뿐. 이에 안나는 끝없이 브론스키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의 사랑을 확인받고자 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조금씩 파먹기 시작한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안나는 자기 자신으로서의 자유로운 삶이 아닌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고, 브론스키의 사랑을 확인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자기 자신과 브론스키에게 얽매인 삶을 살아간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안나가 조금씩 사랑에 집착하고 삶이 자신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아 정신적, 육체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새삼 '사랑이란 얼마나 파괴적인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외줄 위를 홀로 걸어가는 안나. 그 끝에는 행복이, 그리고 사랑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안나는 불안한 발걸음을 내딛지만, 결국 그녀는 그 끝에 이르지 못한다. 
 
  사실 처음에는 대체 '안나 카레니나'가 어떤 여자길래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책을 읽으면서는 안나보다 레빈에 더 관심이 갔다. 19세기 러시아에 대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그의 사상에 대해서는 백퍼센트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톨스토이가 독자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레빈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만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에 그것을 두려워하는 모습, 무신론자에 가까운 그가 신의 존재에 대해 번뇌하는 모습, 열심히 일하지만 그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는 농민들을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찾는 모습 등 레빈의 삶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것은 당시 러시아는 물론이고 현대에까지 그 생명력을 가진 인간 보편의 문제였다. 부의 재분배, 종교적 갈등, 사랑, 죽음, 탄생 등 레빈을 통해 톨스토이도, 독자도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번뇌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느려졌던 것은 순전히 레빈 때문이었지만, 책을 읽고 나서도 자꾸만 이 책이 생각나게 만드는 것도 안나가 아닌 바로 레빈이었다.(물론 안나도 매력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으지만)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어 이성 혹은 감성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두 인물의 캐릭터 자체가 상반돼 더욱 균형 잡힌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안나가 반짝 타오르는 불꽃 같은 존재라면, 화로 속 불씨처럼 겉으로 보기엔 잘 보이지 않아도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씨를 가진 레빈의 대비는 이야기의 또 하나의 재미였다. 안나의 삶은 처참하게 끝나지만 레빈의 삶이 계속되는 까닭도 그의 사유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레빈의 끝없는 고민은 어쨌거나 그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자양분이 된다. 그저 탁상공론으로 그칠 '사고'가 아닌 직접 풀베기에 동참하는 것 같은 '행동'이 있었기에 레빈의 삶은 좀더 현실적이고, 온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만약 <안나 카레니나>라는 제목에 걸맞게 처음부터 끝까지 안나의 이야기만을 담았다면 나는 그저 사랑의 포로가 된 안나를 그저 불쌍히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빈의 이야기와 안나의 이야기를 함께 접함으로 오히려 안나를 그저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버렸지만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여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과 한 여자로서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한 여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책의 중심축이 안나와 레빈에 있기에 자연스레 그들에게 관심이 집중됐지만, 주변 인물들도 결코 가벼이 넘겨볼 수 없었다. 애정과 관계 없이 살아가지만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가는 안나의 남편 카레닌이나 아직은 엄마가 그리운, 하지만 엄마를 마음껏 그리워할 수 없는 가엾은 세료쥐아, 한때는 브론스키에게 반한 적이 있지만 결국 레빈의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된 키티와 같이 레빈과 키티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이들 외에도 레빈이 만나는 일꾼들까지 누구 하나 쉽게 넘겨볼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등장은 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3권 모두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 무지막지한 분량에 곳곳에 철학적인 면이 담겨 있어 녹록치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한 번 읽고 나니 다시 한 번 이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나 발레 공연 등 지금도 끝없이 변주되고 있는 <안나 카레니나>. 이전에 <톨스토이 단편선>이 유행했을 때에도 안 읽었던 톨스토이를 이제사 읽어보니 '이것이 톨스토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가 톨스토이 100주기라고 전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행사도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데, 겸사겸사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도 한 번 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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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15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에는 안나 카레니나를 꼭 읽어보겠어요. 불끈!!

이매지 2010-01-15 09:08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다락방님 지금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보시겠다고 불끈하시고는,
추천도 한 방 안 해주시고 가신거죠? ㅎㅎㅎ

다락방 2010-01-15 11:41   좋아요 0 | URL
그래서 지금 다시 돌아와서 추천 했어요. ㅎㅎ

이매지 2010-01-15 11:4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역시!

카스피 2010-01-15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무지막지하게 깁니다.저는 러시아에서 제작된 영화 안나카레리나를 봤는데 처음 눈이 내리는 벌판에 마차기 클로즈업 되는 장면만 30분이라 기겁을 한적이 있지요(이영화 8시간짜리더군요) ㅜ.ㅜ

이매지 2010-01-15 11:46   좋아요 0 | URL
헉. 8시간짜리 영화라니!
하기사 안나 카레니나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기엔 8시간도 부족할 것 같네요ㅎ

... 2010-01-15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성으로 읽으신 안나 카레니나를 리뷰까지 근성있게 쓰셨군요. 저도 추천!
읽을 때도 좋지만 좀 지나고 나면, 와아아아~~ 정말 대단한 책이었잖아? 하게 되지 않던가요?

이매지 2010-01-16 00:31   좋아요 0 | URL
리뷰도 근성으로 ㅎㅎㅎ
읽을 때는 좋았다가 시무룩했다가 왔다갔다 했는데,
좀 지나고 나니까 확실히 와아아아~가 되더군요 :)

순오기 2010-01-1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니 존경스러워요~ 학창시절 도전했다 나가 떨어졌던 책이라, 아직도 잡을 생각 못해요.ㅜㅜ

이매지 2010-01-17 23:20   좋아요 0 | URL
이 참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보심은 ㅎㅎㅎ
확실히 어떤 책들은 나이가 좀 들어서 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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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우연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한 챕터를 읽고는 모리미 토미히코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언제 <밤은 짧아->를 끝까지 읽어봐야지라는 생각만 하다가 <유정천 가족>으로 드디어 모리미 토미히코를 오롯이 만날 수 있었다. <밤은 짧아->의 경우에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자유로운 상상력 때문에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미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작품이었다면, <유정천 가족>의 경우에는 애초에 인간이 아닌 너구리나 텐구를 등장인물로 내세웠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발휘된 작품 같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신하는 너구리에,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이어졌지만, 오히려 그런 말도 안되는 판타지 속에서 생생한 현실감을 느꼈다. 

  너구리 사회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아버지 시모가모 소이치로가 금요구락부의 희생양으로 냄비 요리가 된 후, 시모가모 집안의 이야기가 기본 구조인 이 책에는 너구리 사회는 물론이고 텐구들에게서까지 인정을 받았던 아버지와 달리 찌질한 사형제가 등장한다. 어쩌다보니 아버지의 장점을 하나씩만 닮아 따로따로 떨어뜨려놓으면 찌질하게 그지 없는 시모가모 사형제. 형제 중에 가장 강단이 있지만 위기에 빠지면 누구보다 먼저 패닉 상태에 빠지는 장남 야이치로,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개구리로 둔갑해 우물 속에서 칩거중인 둘째 야지로, 오직 재미만을 추구하는 셋째 야사부로, 겁이 많아 조금만 긴장을 하면 둔갑이 풀려 꼬리를 드러내고 마는 막내 야시로. 이 바보 사형제에 세상에서 천둥을 가장 무서워하는 어머니, 텐구 수업을 받아 반쯤은 텐구로 살아가는 마성의 여인 벤텐, 시모가모 가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작은 아버지 에비스가와 소운과 그의 쌍둥이 아들 금각과 은각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 들이 이야기에 재미를 더한다. 

  '유정천'이란 다소 낯선 단어는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천 가운데 맨 위에 있는 하늘이란 뜻으로, 형체가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데, 이런 뜻 외에도 무엇인가에 열중하여 자기 스스로를 잊는 상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 굳이 따지자면 어쨌거나 바보의 피가 흘러서 재미있는 일을 좋아하는 시모가모 가의 이야기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에 가깝다. 아니, 어쩌면 시모가모 가의 엉뚱한 일화는 책을 읽는 독자를 유정천에 오른 것처럼 책을 읽으며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든다.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 소이치로다. 그의 친구이자 사형제의 스승인 텐구 아카다마 선생의 기억 속의 소이치로, 금요구락부의 멤버가 기억하는 소이치로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그렇게 빼어난 아버지가 왜 금요구락부의 냄비요리 신세가 되었는지에 대해 추적하는 것까지 아버지 소이치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아도 가족들의 기억 속에, 그리고 그를 만난 모든 사람(혹은 너구리, 텐구)에게 큰 비중을 차지한다. 통찰력 있는 아버지의 말처럼 넷이 뭉쳤을 때 힘을 발휘하는 사형제. 결국 그들을, 시모가모 가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마침내 형제애로 똘똘 뭉친 그들 자신이었다. 

  책 속에서 몇 번이나 등장하는 '재미있는 것은 좋은 거야'라는 메시지처럼 지루할 틈 없이 곳곳에 등장하는 유머러스한 대화나 상황이 좋았다. 익살스럽고 만화 같지만, 그렇다고 유치하지 않은, 너구리 사형제의 가족애와 형제애가 따뜻하게 담긴 책이었다. 총 3부작이라고 하는데, 시모가모 가 너구리 사형제를 조만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전에 모리미 토미히코의 다른 작품도 읽으며 천천히 기다려야겠다. 만사가 귀찮고, 피곤할 때 읽으면 생활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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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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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2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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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7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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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서점가에는 영미권 이민 2세 작가의 책들이 유독 눈에 띄는 것 같다. 김연수 작가의 추천으로 관심이 생긴 줌마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을 비롯해서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소년>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민 2세의 소설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미국의 경우 말할 것도 없이) 점점 다문화 사회로 흘러가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굳이 작가의 국적(혹은 이민 여부)을 따지는 것은 어쩌면 촌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민 2세 작가의 작품은 토박이(?)의 소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부모 세대가 가진 모국에 대한 문화를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소설은 제국주의적 색채에서 벗어나 좀더 객관적으로 제3세계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오랫만에 만나는 한인 2세 작가 재니스 리의 <피아노 교사>라는 책에 관심이 쏠렸다. 

  2차 대전 시의 홍콩과 전후 홍콩을 오가는 이 책은 아쉽게도 한국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윌이라는 한 영국 남성을 중심에 놓고 1940년대의 포르투갈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국적인 전갈' 트루디와 1950년대의 남편을 따라 홍콩으로 와서 상류층 사회의 신기루를 갈망하는 '영국 장미' 클레어의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등장한다. 10년의 텀을 두고 홍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게 진행된다. 제각각의 색깔을 자랑하고 있는 트루디와 클레어가 씨실과 날실처럼 이야기를 만들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 속에서는 트루디도, 클레어도 아닌 윌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랑, 배신, 전쟁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지루할 틈이 없이 진행된다. 윌과 트루디의 정열적인 사랑도 클레어의 맹목적인(혹은 복종적인) 사랑도 모두 매력적이었지만 그들의 사랑보다도 내 눈을 더 끈 것은 전쟁으로 인해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혹은 전쟁통에 한몫 잡을 기회를 얻기 위해 변하는 모습도 그랬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의 변절을 정당화하거나, 그 당시 변절했던 사람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은 인간의 본성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어서 꽤 흥미로웠다. 전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물리적인 충격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은 단순히 건물을 파괴하고,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게 하기 때문에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을 통해 본의 아니게 변해가고, 그렇게 변해가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어 결국 자기 자신도 용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아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말(때때로 나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 영국 식민지 시절의 홍콩에서 살았던 영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런 질문에 나는 작가가 소설의 주제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종종 주제가 작가를 찾아내기도 한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처럼 그야말로 그녀를 찾아온 것 같은 주제. 재니스 리가 아닌 다른 작가였다면 윌, 트루디, 클레어의 이야기가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책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재니스 리. 다음에는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쓸 예정이라고 하는데 왠지 그녀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수키 킴의 <통역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일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피아노 교사>의 감상을 정리하며 코타로 오시오의 Twilight(黃昏)을 듣게 됐는데,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보니 눈앞에 세 사람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 같다. 애잔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지만 격정적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열정적인, 그리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이 가을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얼마 전 방문한 재니스 리는 아쉽게도 직접 만날 수 없었지만, 글로 만난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감 있고, 누구보다 따스함을 가진 작가일 것만 같다. 이 책 덕분에 모처럼 출퇴근 시간을 꾸벅꾸벅 조는 대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작가의 다음 작품, 그리고 그녀가 아직 보여주지 않은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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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1-0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건 몰라도 김연수 작가가 저랑 취향은 비슷한거 같아요 ^^*

"작가가 소설의 주제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종종 주제가 작가를 찾아내기도 한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 저도 이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요, 그녀뿐만 대부분의 이민소설을 쓰는 작가들 역시 두번째 경우가 해당된다는 걸 (특히 데뷔작의 경우엔) 그녀는 모르는 걸까, 잠시 생각했답니다. 그들에겐 찾아나서지 않아도 너무 절실하게 몸 안에 박혀버린 주제가 이미 있는 경우가 대다수 이던걸요..

이매지님의 리뷰를 보니 이 책을 빨리 읽어보긴 해야 할것 같은데... 휴.

이매지 2009-11-02 00:21   좋아요 0 | URL
김연수 작가와의 취향은 <그저 좋은 사람> ㅎㅎ
저도 그 책 어여 읽어봐야할텐데... 휴.

이 작품은 뭔가 절실하게 박혀버린 주제랑은 거리가 있었어요.
오히려 이민자로 갖는 고뇌(?)나 아픔이 덜했거든요.
그래서 한국인이 주인공이라는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되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락방 2009-11-0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지금 읽고 있는데요 이매지님. 쉽게 읽히질 않네요. 책장이 넘어가는게 더뎌요. 그런데 다른분들 평을 봐도 아주 좋기만 하더라구요. 일단 끝까지 읽어봐야 겠어요. 흐음..

이매지 2009-11-02 09:44   좋아요 0 | URL
엇. 다락방님이 이 책을 힘들게 읽고 계시다니. 왠지 의외인데요 :)
뒤로 갈수록 점점 속도가 붙더라구요~
다락방님의 평 기대할께요~~

2009-11-02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2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3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3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09-11-0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궁금해요

이매지 2009-11-03 23:05   좋아요 0 | URL
궁금하다면 추천도 한 방! ㅎㅎ

미미달 2009-11-0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역사>였던가요. 또 읽고 싶어지네요. 정말 괜찮은 책이었는데...

이매지 2009-11-04 09:37   좋아요 0 | URL
통역사는 수키 킴 책이구요,
이 책은 재니스 리요^^
영국인이 주인공이라 영국 사람들을 직접 겪은 미미달님의 어떻게 보실 지 궁금한데요~ ㅎ
 
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신작이 나올 때마다 관심은 가졌지만 정작 미우라 시온의 작품을 접한 것은 2006년에 나오키 상을 수상한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밖에 없었다. 아직 한 권 밖에 읽어보지 않아서 딱히 '이 작가의 스타일은 이것!'이라는 느낌은 서지 않았고 그저 청소년 소설 분위기의 밝고 가벼운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인식만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기존의 작품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소개에 끌려 미우라 시온을 두번째로 만나게 됐다.

  도쿄 근교에 있는 작은 섬 미하마. 별다른 사건도 없이 평온하기만 한 이곳에 세 명의 아이가 있다. 섬에서 가장 예쁜 여자아이인 미카, 그런 미카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는 노부유키, 늘상 아버지에게 학대당하지만 노부유키에게 이상스럽게 애정을 보이는 다스쿠. 온통 일상으로 가득차 있어서 별다르게 기억할 만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이들은 어느 날 쓰나미를 경험한다. 섬에서 살아남은 것은 마침 밀회를 즐기기 위해 집을 나섰던 노부유키와 미카, 그리고 이들을 따라온 다스쿠, 누구보다 죽기를 바랐던 다스쿠의 아버지와 미카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냈던 관광객 뿐.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가족과 이웃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 이들. 예상치 않았던 폭력으로 짓밟힌 이들은 섬에서 나와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나영이 사건'이 떠올랐다. 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잔인하고 비참한 사건. <검은 빛> 속에 그려진 사건도 나영이 사건처럼 한없이 무겁고 절망적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아버지에게 학대 당하는 아들, 다섯 살배기 아이가 너무 둔하다고 끊임없이 구박을 하는 엄마, 누군가를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사람,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을 일삼는 사람 등 책 속에는 온갖 폭력이 담겨 있다. 그리고 한 번 폭력을 당한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고통은, 그 절망은, 그 폭력은 한 사람의 내면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아 끊임없이 그를 흔든다. 

  책 속에서 노부유키는 '폭력에 대항할 수단은 폭력 밖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폭력이 폭력을 낳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정이나 애정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등장인물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도 그랬지만, 남겨진 노부유키의 딸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소설이지만 이것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알기에 너무나 불편하고, 너무나 마음이 무거웠다. 

  얼핏 소재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백야행>의 중심이 '사랑'에 있다면 <검은 빛>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폭력'을 그려낸다. <백야행>과 <검은 빛>이라는 상반되는 제목처럼(白과 黑) 읽고나서의 느낌도 달랐던 책.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 글처럼 확실히 미우라 시온의 다른 작품과는 급이 다른 작품이었다. 밝고 가벼운 미우라 시온도 좋지만, 이런 식의 어둡고 무거운 미우라 시온도 괜찮은 것 같다. 아직 읽지 못했던 미우라 시온의다른 작품을 읽더라도 이 작품의 여운만은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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