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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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서점가에는 영미권 이민 2세 작가의 책들이 유독 눈에 띄는 것 같다. 김연수 작가의 추천으로 관심이 생긴 줌마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을 비롯해서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소년>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민 2세의 소설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미국의 경우 말할 것도 없이) 점점 다문화 사회로 흘러가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굳이 작가의 국적(혹은 이민 여부)을 따지는 것은 어쩌면 촌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민 2세 작가의 작품은 토박이(?)의 소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부모 세대가 가진 모국에 대한 문화를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소설은 제국주의적 색채에서 벗어나 좀더 객관적으로 제3세계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오랫만에 만나는 한인 2세 작가 재니스 리의 <피아노 교사>라는 책에 관심이 쏠렸다. 

  2차 대전 시의 홍콩과 전후 홍콩을 오가는 이 책은 아쉽게도 한국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윌이라는 한 영국 남성을 중심에 놓고 1940년대의 포르투갈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국적인 전갈' 트루디와 1950년대의 남편을 따라 홍콩으로 와서 상류층 사회의 신기루를 갈망하는 '영국 장미' 클레어의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등장한다. 10년의 텀을 두고 홍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자못 흥미롭게 진행된다. 제각각의 색깔을 자랑하고 있는 트루디와 클레어가 씨실과 날실처럼 이야기를 만들고, 그렇게 완성된 작품 속에서는 트루디도, 클레어도 아닌 윌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랑, 배신, 전쟁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은 지루할 틈이 없이 진행된다. 윌과 트루디의 정열적인 사랑도 클레어의 맹목적인(혹은 복종적인) 사랑도 모두 매력적이었지만 그들의 사랑보다도 내 눈을 더 끈 것은 전쟁으로 인해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혹은 전쟁통에 한몫 잡을 기회를 얻기 위해 변하는 모습도 그랬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의 변절을 정당화하거나, 그 당시 변절했던 사람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은 인간의 본성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어서 꽤 흥미로웠다. 전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긴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물리적인 충격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은 단순히 건물을 파괴하고,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게 하기 때문에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을 통해 본의 아니게 변해가고, 그렇게 변해가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없어 결국 자기 자신도 용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아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말(때때로 나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 영국 식민지 시절의 홍콩에서 살았던 영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런 질문에 나는 작가가 소설의 주제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종종 주제가 작가를 찾아내기도 한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처럼 그야말로 그녀를 찾아온 것 같은 주제. 재니스 리가 아닌 다른 작가였다면 윌, 트루디, 클레어의 이야기가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책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재니스 리. 다음에는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책을 쓸 예정이라고 하는데 왠지 그녀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수키 킴의 <통역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일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피아노 교사>의 감상을 정리하며 코타로 오시오의 Twilight(黃昏)을 듣게 됐는데,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보니 눈앞에 세 사람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 같다. 애잔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지만 격정적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열정적인, 그리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이 가을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얼마 전 방문한 재니스 리는 아쉽게도 직접 만날 수 없었지만, 글로 만난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감 있고, 누구보다 따스함을 가진 작가일 것만 같다. 이 책 덕분에 모처럼 출퇴근 시간을 꾸벅꾸벅 조는 대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작가의 다음 작품, 그리고 그녀가 아직 보여주지 않은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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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1-01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건 몰라도 김연수 작가가 저랑 취향은 비슷한거 같아요 ^^*

"작가가 소설의 주제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종종 주제가 작가를 찾아내기도 한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 저도 이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요, 그녀뿐만 대부분의 이민소설을 쓰는 작가들 역시 두번째 경우가 해당된다는 걸 (특히 데뷔작의 경우엔) 그녀는 모르는 걸까, 잠시 생각했답니다. 그들에겐 찾아나서지 않아도 너무 절실하게 몸 안에 박혀버린 주제가 이미 있는 경우가 대다수 이던걸요..

이매지님의 리뷰를 보니 이 책을 빨리 읽어보긴 해야 할것 같은데... 휴.

이매지 2009-11-02 00:21   좋아요 0 | URL
김연수 작가와의 취향은 <그저 좋은 사람> ㅎㅎ
저도 그 책 어여 읽어봐야할텐데... 휴.

이 작품은 뭔가 절실하게 박혀버린 주제랑은 거리가 있었어요.
오히려 이민자로 갖는 고뇌(?)나 아픔이 덜했거든요.
그래서 한국인이 주인공이라는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되는지도 모르겠어요^^;

다락방 2009-11-02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지금 읽고 있는데요 이매지님. 쉽게 읽히질 않네요. 책장이 넘어가는게 더뎌요. 그런데 다른분들 평을 봐도 아주 좋기만 하더라구요. 일단 끝까지 읽어봐야 겠어요. 흐음..

이매지 2009-11-02 09:44   좋아요 0 | URL
엇. 다락방님이 이 책을 힘들게 읽고 계시다니. 왠지 의외인데요 :)
뒤로 갈수록 점점 속도가 붙더라구요~
다락방님의 평 기대할께요~~

2009-11-02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2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3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3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09-11-0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궁금해요

이매지 2009-11-03 23:05   좋아요 0 | URL
궁금하다면 추천도 한 방! ㅎㅎ

미미달 2009-11-0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역사>였던가요. 또 읽고 싶어지네요. 정말 괜찮은 책이었는데...

이매지 2009-11-04 09:37   좋아요 0 | URL
통역사는 수키 킴 책이구요,
이 책은 재니스 리요^^
영국인이 주인공이라 영국 사람들을 직접 겪은 미미달님의 어떻게 보실 지 궁금한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