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파리. 반갑지 않은 해충이다. 소나 말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다. 그래서 소나 말에게 여간 성가신 존재다.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쇠파리처럼 귀찮은 사람이라고 비유했다. 말 그대로 사람들을 귀찮게 해서 그랬다. 사람들에게 , 자신을 알라!”고 계속해서 말하니 듣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귀찮은 존재였을지 짐작이 간다. 나라면 쇠파리를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한 무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을 얼마쯤 가지고 있으니까.

 

밀란 쿤테라의 불멸을 읽는 도중에 귀찮은 쇠파리라는 말을 다시 들었다. 작가는 인생의 어느 순간을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인생의 3단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에 따르면 인생의 어느 순간은 죽음이다. 죽음은 인간 모두에게 해당되는 현상이다. 인생의 1단계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신경쓰고 근심할 필요가 없다. 죽음이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가장 행복하다.

 

그러나 인생의 2단계에 이르면 죽음이 보인다. 때로는 죽음이 찰싹 달라붙어 있다. 죽음 때문에 인생을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을 지경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3단계에 이르면 죽음에 무감각해진다. 예전처럼 죽음에 대해 전망도 사그라든다. 죽음을 너무 잘 아는 탓에 오히려 죽음에 대해 피로를 느낀다. 피로에 지친 나머지 죽음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3단계는 새로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죽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음이다. 일종의 마음이 건강해지는 자기 돌봄이다. 자기 돌봄이 풍부하고 깊어질수록 우리는 순수한 자유를 느낀다. 그래서 활력적인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당한 매력을 느끼면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만끽하며 귀찮은 쇠파리라고 말하게 된다.

 

나는 소크라테스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 탓에 스스로를 귀찮은 쇠파리라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대신에 긴 세월 동안 공부(工夫)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독서는 내게 귀찮은 쇠파리라는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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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환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의사, 아니 자기 자신과 세계를 치료하는 의사인 것이다. 세계는 병이 인간과 뒤섞이는 증상들의 총체이다. 따라서 문학은 건강 계획서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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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이 이 니라에 놓아 둔 쇠파리처럼 귀찮은 사람이다. 

그래서 하루 종일 어떤 곳에서든 당신을 붙잡아 자극히고, 설득하고, 나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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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혼은 종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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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무수히 흘리는 땀, 그중에서도 마음에 와닿는 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인생에 커다란 땀이 있다. ‘마천십연(磨穿十硏) 독진천호(禿盡千毫)’라는 말이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풀이하면, “벼루에 먹을 가느라 10개 정도의 벼루가 가운데가 뚫렸고 모지랑이 붓이 다 닳아 없어진 붓이 1,000개 되었네라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추사 김정희가 글씨를 쓰기 위해 얼마나 힘든 노력과 땀을 흘렸는지 말해준다. 추사라는 이름을 되뇔 때마다 몸과 마음이 시렸다. 그의 숨막히는 절대고독함으로 뭉클해졌다.


생각해보니, 지금도 여전히 글쓰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내 땀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려는 내게 이 글은 큰 힘이 되었다. 글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아 숨 막혀 답답할 때 글쓰기의 좌표로 삼기엔 안성맞춤인 가르침이었으니까.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을까?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런 막막한 물음 앞에서 10개의 벼루와 1,000개의 붓은 부지런함의 대명사이다. 마음을 확고하게 잡아야 부지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부지런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함이 막힌 것을 통()하게 한다.


만약 이것으로도 부지런하지 못하다면 2,000번의 실패는 어떨까? 에디슨은 전구를 만들 때 2,000번이나 실패를 거듭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기자가 2,000번이나 실패를 했는데, 어떻게 극복했느냐? 고 질문을 하자 에디슨은 실패가 아니라 단지 2,000번의 과정(process)을 거쳐 전구를 발명했다고 말했다. 만약에 에디슨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촛불을 켜며 살아가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독일의 역사학자 에밀 루트비히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발견한 이후 인류는 두 번째 불을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에디슨은 발명왕의 대명사이다. 무려 1,093개의 특허권을 가져 다고 하니 발명왕이라고 불러도 명성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발명왕보다는 다른 이름이 좀 더 특별히 다가왔다. 노력왕이다. 노력왕이라는 타이들은 ‘99%의 땀으로 만들어진 결정체이다. 에디슨은 천재는 1% 영감과 99% 노력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이 말의 전문을 보면 내 발명 중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충족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요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험하고 또 실험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1%의 영감과 99% 땀이다라는 것이다.


에디슨의 말을 생각해보면 99% 땀에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지금과 다른 이미지일 것 같은 자신감이 스며들어 있다. 99% 땀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험하고 또 실험하는 것이며 1%가 아닌 99%이다 보니 그만큼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99% 땀의 수치가 높다고 해서 1% 영감이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적다고 하여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노력 하나만으로는 뭔가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1% 영감은 99% 땀의 시작이자 방향이다. 이런 방향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노력했다는 허탈감으로 끝나고 만다. 반대로 1% 영감이 있다고 해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1% 영감은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세상에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노력만 하면 만사형통하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노력을 하는 데도 거짓말처럼 이기지 못한다. 죽도록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헛된 노력으로 되돌아온다면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이러한 죽을 맛은 99% 땀만 잔뜩 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정작 99% 땀을 흘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면서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99% 땀을 흘려야 에디슨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심리학 교수이자, 일명 천재에게 주는 상으로 유명한 맥아더 펠로상을 수상한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GRIT)에서 성취의 패러다임을 말했다. 성취는 기존에 가진 성공이라는 기준을 바꿔 볼 만큼 의미가 남달랐다. 그녀는 재능과 노력에 좌우되는 성취(성공과 같은 맥락)의 공식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성취= 재능× 노력²

위의 공식을 풀어보면,

 

기술=재능 × 노력, 성취=기술× 노력

 

재능과 노력으로 기술자가 될 수 있다. 여기까지 노력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부문에 있어 성취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함께 다시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무조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연습(deliberate pratice)’을 수천, 수만 시간 동안 하라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그녀가 말하는 노력의 결정체이다. 노력은 당신의 잠들어 있어 잠재력을 춤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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