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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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작은 책이 본책과 함께 왔다. 필사를 해보라고 권하는 작은 노트인가보다.)

 

 

김이설 작가의 모든 소설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 책<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의 주인공은 적어도 내가 읽은 이전 작품 속 어느 주인공과도 다르다. 나 자신 일수 있고 작가 같기도 하고 그 어느 누구일 수 있을만큼 튀지 않고 도드라지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이다. 주인공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도 그렇다.

처음의 몇장은 주인공이 남자와 오랜만에 해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야기의 감을 잡느라 긴장하며 읽는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지나가는 모습, 계절이 바뀌는 모습, 즉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묘사한 문장들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그리고 처연해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눈길을 자꾸 붙잡았다. 작가는 여자가 남자와 함께 한 시간들, 그리고 헤어지고 혼자 보낸 시간의 흐름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었나보다.

 

계절이 변하는 걸 절감할 때마다 나는 그사람을 떠올렸다. 기어이 시멘트 틈으로 고개를 내민 민들레를 보았을 때, 후텁한 공기에서 물기가 맡아지거나, 인도에 떨어진 은행을 밟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걷다가, 창틀을 뒤흔드는 혹한의 바람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문득문득 그 사람과 내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의 맏딸로서 하고 싶은게 뭔지 자신도 몰랐고, 아무도 물어주지 않았고, 알아야할 필요도 없었던 시기를 보내며 자라 어른이 되어버린 주인공은 뒤늦게 시쓰기를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뒤늦게 자기의 꿈을 알게 되었다는 언니를 위해 주인공의 여동생은 언니에게 용기를 주며 뒤늦게 대학에 진학하고 시창작 실습을 배우러 다닐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언니와 다르게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야무지고 공부를 잘해서 집안의 기대를 안았던 여동생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획에 없던 이른 결혼을 하게 되는데 남자의 폭력으로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들어와 살게 된다. 동생이 직업 전선에서 친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대신에 여동생의 아이 둘은 주인공인 언니의 몫이 된다. 자기가 힘들던 시절 자기 손을 잡고 용기를 준 동생의 따스한 체온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은 뒤늦게 가진 시에 대한 꿈을 미루고, 남자하고 연애도 접고, 집안 일과 여동생의 아이 둘을 건사하기 위해 지치고 소모되는 시간을 보낸다. 자기를 위해서 유일하게 해오던 일이었던, 좋아하는 시 한편 필사하는 시간 조차 짬을 내기 힘든, 암담하고 희망없는 시간이었다. 여자는 자기 꿈을 접고, 슬픔을 한쪽으로 밀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볼 뿐이다.

 

오늘은 쓸 수 있을까. 저 창문에 흔들리는 목련 가지에 대해서, 멀리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대해서, 늦은 밤 귀가하는 이의 가난한 발걸음 소리에 대해서, 갓 시작한 봄의 서늘한 그늘에 대해서 쓰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누워버렸다. (23쪽)

 

아이들의 엄마인 여동생이 집을 비운 동안 주인공이 아이를 건사하는 모습이 아이를 키워본 엄마들이면 너무나 공감할수 있게 묘사되어 있다. 아침부터 잠재우기까지 해줘야 하는 일의 순서, 아이들과 어느 대목에서 부딪히는가 하는 것 까지.

주인공이 뒤늦게 대학에 입학하여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 환하게 불밝히고 있는 동네 작은 서점에 들려 시집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삼는 대목, 그러다가 서점을 지키고 있는 젊은 남자와 말을 트게 되고 친해져 가는 대목에선 책에서 온기가 전달되는 듯,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양 체온이 따뜻해져가는 경험에 행복했다.

 

여자는 시인의 꿈을 이루었을까. 아니면 저 지지부진한 상황에 붙들려 계속 그렇게 존재의 투명성만 유지한채 살아갈까.

나는 작가가 이 소설의 결말로 선택한 방식이 개인적으로 너무 좋다. 삶이라는게 그렇지 않은가.

 

여섯개의 작은 제목중 두개를 골라 책의 제목을 삼았다. 첫번째 「우리의 정류장」과 세번째 「필사의 밤」. 둘이 만나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이라는 독특하고 의미있는 제목이 만들어졌다. 제목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건 책을 다 읽고 나서였다. '정류장'이 잠시 멈춰가는 곳, 쉬어가는 곳, 바꿔타는 곳, 멈춘 시간의 의미라면 '필사'에서 느껴지는 것은 느리지만 계속해감이다. 꾸준히, 혼자서,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간다는 뉘앙스. 삶의 긴 여정을 이루는 두가지 요소일 수 있다.

 

작은 노트 첫장에 작가의 손글씨체로 써있는 글이 있다.

당신이 서있는 그길이 바로 당신의 길.

기어이 피어오르게 될 당신의 언어는 더없이 찬란하기를.

 

당신이 서있는 그길이 혹시 당신이 가고 싶던 목적지로 데려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길을 걸어온 당신의 시간은 충분히 찬란했다고, 그것까지 알게 되는 시간이 곧 온다고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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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0-3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나인 님의 리뷰 너무 좋네요.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지점에 눈길이 머문다는 것도 너무 좋고요.
저는 얼마전에 이 책을 친구에게 선물했거든요. 친구가 책 속 등장인물과 비슷한 상황이라서요. 제 경우엔 아버지의 말이 무책임하고 싫었는데, 친구는 읽고서 아버지의 말이 위로가 되어 눈물이 핑 돌았대요.
오늘 나인님의 글에서는 제가 딱히 생각하지 못했던 정류장과 필사를 연결시킨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제가 짚고 넘어가지 못했었는데 말예요. 이래서 같은 책을 읽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큰 기쁨인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나인님. 너무 좋아요!

hnine 2020-10-30 13:04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읽는 작가 소설이라서, 다른데 한눈 팔지 않고 단숨에 읽었어요.
확실히 이전과 많이 달라진 것 느끼며 시간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되새겨보게 되었답니다. 저도 다락방님도, 그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깎이고 다듬어지고 없던 부분이 생기기도 했겠지요. 그러니 작가의 변화는 새삼스런게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같이 주문한 <잃어버린 이름에게> 바로 읽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이 두권의 책이 며칠 사이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출간되었는지.
정류장과 필사에 대한 의견은 그저 제 개인적인 해석인데 혹시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짚었다면 어떡하나 소심한 걱정도 해봤답니다.
이 책에 대한 다락방님의 리뷰를 읽은 날 바로 주문했어요. 이미 읽으신 책이라서 아마 제 리뷰를 더 좋게 더 넓은 마음으로 봐주셨겠지요. 감사드려요.
또 금요일이네요! ^^
 
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 사계절 1318 문고 123
김민경 지음 / 사계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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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이 책이 내 손안에 들어와 오랜만에 청소년소설을 읽는다.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을 좋아한다. 이제 내 아이도 청소년기를 지났건만 그런 것 상관없이 내가 청소년기일때보다 어른이 되고 나서 더 많이 읽은 듯 하다. 작가의 이름이 생소하고 이 책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책이 손에 들어오자 마자 읽은 것도 여전한 그 애정때문이다. 청소년소설은 아주 좋음 아니면 보통, 이 둘중 하나인것 같은데 이 책은 과연 어떨까 기대를 하면서.

 

두명의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고등학교 1학년 새봄이 (여)와 지석이 (남). 둘은 같은 고등학교 클라스메이트인데 4년동안 학교를 쉬다나온 새봄이는 지석이보다 한살이 많다.

그런 새봄이가 지석이에게 읽어보라고 권해준 책을 지석이가 망설이면서 읽기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 책은 다름아닌 허먼 멜빌의 <모비딕>. 새봄이는 왜 모비딕을 읽어보라고 했고 이것은 둘 각자의 인생에, 그리고 둘 사이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사실 새봄이의 경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기게 해주는 리더 역할을 이 책이 해준다.

좋아하는 새봄이가 권해주긴 했지만 두껍고 재미없어보이는 책을 앞에 두고 지석이는 처음에 망설이지만 몇장 읽어나가며 이 책의 묘한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3월초 새봄이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이후 내용은 1인칭 서술 형식으로 지석이가 모비딕을 읽으며 이해해가는 과정이 나오고 중간 중간 새봄이의 지난 일기가 삽입됨으로써 새봄이의 지난 4년에 대해 설명이 된다.

새봄이의 엄마는 4년전 새봄이가 열네살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엄마의 발인날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로 학교도 휴학할 정도로 마음을 잡지 못해 어려운 시기를 지내던 새봄이, 그렇게 4년을 보내고 마침내 다시 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여전히 적응이 힘들고 집중이 안되어 뛰쳐나가고만 싶다.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이 들때 새봄이는 우연히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하고, 그렇게 혼자 스스로 버티려고 애쓰던 어느 날 누군가 옆에서 같이 뛰어주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게 새봄이는 지석이와 친해지게 된다. 이러면서 모비딕이라는 책의 역할이 시작되는데, 모비딕이라는 고전 한권이 소설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인용되며 줄기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특이하다. 간혹, 모비딕이 이 소설을 위해 이용되었나, 이 소설이 모비딕을 위해서 쓰여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새봄이가 모비딕에 심취하게 된 경위가 그렇게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교실을 뛰쳐나와 찾아간 도서실 문 앞에 다른 아이들이 책 읽고 붙여놓은 포스트잇을 보게 되고 그 중 하나가 모비딕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구였다.

인간은 누구나 포경 밧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긴들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던 새봄은 '삶이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라는 문구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고 무시무시한 고래 눈이 표지에 크게 그려져있는 모비딕이라는 책을 읽어보기로 한다. 또하나의 계기가 있다면 세월호 추모식 포스터에 그려져 있는 고래이다. 그 포스터에서 고래의 모습은 모비딕이라는 책 속에서의 고래와 아주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고래가 바다에 떠있고 주위에 아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 고래가 아이들을 태우고 날아오르는 그림이었다. 고래를 보고 한가지를 이렇게 다르게 해석할수 있는가 새봄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모비딕을 다 읽은 후 새봄은 이 책은 죽음이 아닌 '삶'에 관한 책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살고 싶어졌어. 내가 겪어 보지 못한, 내가 모르는 세상이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았어. 나는......이미 모든 걸 다 겪었다고 생각했거든." (146쪽)

열여덟살에 이미 모든 걸 다 겪었다고 생각했던 새봄은 책을 읽으며 내가 모르는 세상이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더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열여덟살이 아닌 내 나이에도 다시 새겨보게 되는 말이다. 내가 모르는 세상이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는 것.

이 책 제목이 <지구 행성에서 너와 내가>가 된 것에 대한 설명은 지석이와 새봄이의 다른 대화에서 나온다. 역시 모비딕에 관해 둘이 나누는 대화이다.

"맞아.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 지구라는 행성에서 수많은 종들과 살아가는 인간의 자세, 인간의 시선에 대해서 말이야." (166쪽)

 

책 전체에 걸쳐 모비딕 구절이 자주 인용되고 그 구절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나오는 건 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작품 전체를 한정된 틀에 갖히게 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어떻게 인용되었든 본 작품의 서사가 뚜렷하고 강렬하면 주와 부가 혼동될 염려가 없겠으나 아쉽게도 이 작품은 그정도의 뚜렷하고 독창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다만 청소년기 주인공들답게 때묻지 않은 순수한 동기와 방법으로 자기의 문제를 헤쳐나가는 모습이 전형적이고 교과서적인 것 같으면서도 또 그래서 새롭게 보였다. 이 세상 청소년이 모두 새봄이와 지석이처럼 맑고 순수하고 긍정적인 영혼을 지켜나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책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해나갈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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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10-2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가 참 예뻐요. 색연필로 그린 것 같은 느낌도 좋네요.
그렇지만 내용은 밝고 가볍지만은 않은 모양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hnine 2020-10-30 04:43   좋아요 1 | URL
그래도 해피엔딩이랍니다.
다만 너무 교과서적이고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제 개인적인 소감이네요.
EBS에서 이책이 느닷없이 집으로 배송이 되어 와서 읽게 되었어요. 제가 신청한 적은 없는데 무슨 선물로 온 모양이어요.

2020-10-29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30 0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30 0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  이승희 시집, 창비 2006

 

 

 

이승희 시인이 등단 7년만에 펴낸 첫 시집.

 

 

읽다보면 그냥

눈물이 차오를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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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 이야기 - 63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 우리시대의 논리 27
조정진 지음 / 후마니타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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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장.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다. '임시', '계약직', '노인장', 세 단어 따로 봐도 우울하기만 한데 심지어 세 단어가 모였다.「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노동 일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의 저자는 63세. 처음부터 임시직은 아니었다. 38년간 정규직으로 열심히 일했고 2016년 60세 나이에 퇴직했다. 그에게는 출가한 딸과 대학3학년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의 진로로 인해 저자의 퇴직후 노후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아들이 대학 졸업후 취업 대신 전문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대학 졸업후 적어도 3년 더 고액의 학비를 조달해야 되는데 퇴직하기 얼마전 딸의 결혼 비용으로 저축해놓은 돈의 상당한 부분을 이미 소비하였고, 퇴직금은 오래 전에 중간 정산을 통해 미리 받아 집 마련하는데 써서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상태이다. 더구나 신용대출 받은 것도 남아있어 은행으로부터 빚독촉까지 받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임시직이든 뭐든 일을 더 해서 수입을 마련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60세 (60세 다음에 노인이라고 굳이 붙이고 싶지 않다. 예전의 60세와는 다른데다가 60세에 노인 소리 듣고 싶어하는 60세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의 퇴직자가 일할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저자는 직업의 귀천을 따져서 구직을 하진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예전의 자기 지위를 염두에 두고 일자리를 찾는다면 더욱더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임시 계약직 노인장으로서 겨우 찾은 일자리는 다른 말로 '고·다·자'라고 불리는 일인데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다고 해서 붙은 말, 전적으로 고용주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찾은 첫번째 일자리는 버스터미널, 고속버스 배차원이었다. 하지만 하는 일은 말처럼 한가지 업무가 아니었다. 펀하게 밥 먹을 사이도 보장 못하는 일정을 따라 바삐 일하다가 화물 운반용 손수레에 몸이 걸려 곤두박질 치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병가를 내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해고 당하고 만다. 다음 일터는 아파트 경비원. 나의 사촌 오빠도 아들 둘 다 키워 결혼까지 시켜 독립시키고도 지금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고, 평소에 아파트 단지 청소, 화단 정리, 쓰레기 분리수거, 주차 단속 등의 일로 늘 바쁘신 경비원 아저씨들을 보며 경비원 업무로 도대체 몇가지를 시키는 것인가 의문을 가지고 있던 터이므로 더 관심을 갖고 읽은 부분이다.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형편없었다. '늙은 소의 하루'라고 저자가 이름 붙인 경비원의 일과표는 두 페이지에 걸쳐 빼곡했다. 실제로 하는 일은 그 이상이라니, 그야말로 아플 사이도 없이 정신 놓고 몸을 움직여야 겨우 하루치 일과를 마치는 일정이었다. 저자는 결국 여기서 또한번의 부상을 당하게 되고 장기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처방을 받았으나 허락하지 않는 관리사무소의 처우에 주사와 약물 치료로 버티던 중 정작 해고는 다른 이유로 당하게 된다. 아파트 자치회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다음으로 찾은 일자리는 버스터미널이었는데 처음 일자리와 달리 말은 보안요원이었으나 버스의 하차, 주차, 경비에 이르기 까지 살인적인 일과였고 결국 또 버티다 못해 정신을 잃고 쓰러져 해고당한다. 7개월동안 투병생활을 거쳐 지금은 네번째 임계장으로서 주상복합건물 경비원 겸 청소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네번째가 n번째로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다.

최저 임금 인상, 경비업법 위반 처벌 방침 등의 변화가 있는 듯 보이지만 헛점을 더 많이 안고 있는 변화일 뿐이다.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고 임시직, 비정규직의 설자리만 더 좁히는 결과를 낳고 있다. 결국 아파트 주민들의 관리비 부담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대다수가 반대를 한다지만 아파트 주민들이 좀 더 부담을 하더라도 개선의 필요성이 분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을 대우하지 않고 이렇게 막 부리면 그 결과는 결국 어디로 갈지 모르는바 아닐텐데, 인권이고 뭐고 입으로만 인권일뿐 눈 앞의 이익 추구가 최우선이다.

이분이 이렇게까지 부상 당하고 치료도 제대로 못받는 처우를 감내하며 일을 계속 해야했던 이유중엔 자녀의 진학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대학까지 졸업시킨 후에도 이렇게 무리를 해가며까지 자식의 진로를 위해 부모는 희생해야 하는지, 그것도 갑갑했다.

한 가지 문제 뒤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그래서 더 문제 해결을 복잡해보이게 한다고 생각하니 도움이 안된다. 최소한 눈을 들어 내 주위를 좀 둘러볼 수 있어야겠다. 내 문제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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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0-22 1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일 큰 문제는 임계장 당사자에게 있지 않을까요.
아들이 대학 졸업하면 요샌 스물여섯. 대학원 학비를 왜 부모가 내주어야 하는지 이해가 좀 덜 갑니다. 넉넉한 가정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자신이 나가서 험한 일을 하면서, 산재를 당해가며 나이 든 아들의 학비를 내준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거나 안 했거나, 난 모르겠으니 이제부터 네가 알아서 살라고 집에서 아이들을 쫓아낸 제 입장에서, 딸 결혼할 때 부모 자산 헐어 과감하게 보태준 것부터 이해가 좀 덜 가네요.
아이들 쫓아내니까 생활의 폭이 갑자기 넓어지는 게 이젠 집에서 아내 찾는 것도 휴대폰 써야 할만큼 널럴하니(여기 휴지 없네. 좀 가져다줄래?), 무척 좋기만 하네요. 아이 장가들 때, 전 현금 3천, 저와 처의 결혼반지, 이렇게만 딱 주고 알아서 하라고 했답니다. 나이 든 사람들도 바뀌어야 해요.
제 생각엔, 임계장 스스로가 불행해지기 위해 노력한 사람입니다.

hnine 2020-10-22 23:44   좋아요 0 | URL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자식이 어른이 되는 시점은 부모가 자식을 놓아주는 때 라고 하지요.
언제까지나 양육하고 관여하려고 하는, 그걸 딱 끊어야 부모도 자식도 모두 자기 갈 길을 제대로 가는 것인데, 부모 입장에선 그게 어려운가봅니다.
자식 입장에서도 부모가 저렇게까지 해가며 자신의 학비를 조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요. 그간 사정을 가족들에게 자세히 알리지 않았었는지 저자가 이 책의 후기에도 썼더라고요. 책의 내용을 알고서 가족들이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기를 바란다고요.
그나저나 Falstaff님 자녀분들 모두 독립시키셨군요. 어려운 일 마치셨습니다.
 

 

 

 

1. 찬실이는 복도 많지

 

  • 2019년 제작, 2020년 개봉
  • 감독, 각본 : 김초희
  • 주연 : 강말금
                                                                          

 

 

 

 

 

 

 

 

우연히 TV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찬실이라는 이름도 정이 가고, 복이 많지 라는 제목을 보고 이거 영화 대부분은 뜻대로 안되는 얘기가 되겠구나 점친게 맞는지 확인도 해볼겸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끝까지 꼼짝 않고 다 보게 되었다.

영화 프로듀서로 의욕을 갖고 일을 시작한 찬실 (강말금 역). 하지만 본의 아니게 꿈은 무산되고 당장 먹고 살일이 걱정이다. 산동네 셋집으로 이사를 하고 퉁명스러워보이는 주인집 할머니 (윤여정 역), 비루한 상황에서도 선배를 챙겨주는 후배들, 영화배우 후배의 프랑스어 과외 선생님 (배유람 역) 과 친해지는 과정. 무자극이지만 무감동은 아닌 이야기가 흘러가듯 진행된다.

사는건 복이 있든 없든 해내야하는 것, 버텨내야 하는 것.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도 떠오른다.

 

 

 

 

 

2. 당신의 부탁

 

  • 2017년 제작, 2018년 개봉
  • 감독, 각본 : 이동은
  • 주연 : 임수정, 윤찬영

 

남편을 사고로 잃고 혼자 작은 공부방을 운영하며 무기력하게 근근히 살아가는 효진 (임수정 역)에게 어느 날 시동생이 찾아와 죽은 효진의 남편과 그의 전처 사이의 16살 아들 종욱 (윤찬영 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오갈데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종욱을 맡아주기로 결정하는 효진.

 

이 영화에서 임수정은 배우 임수정이 아니라 효진 자신이었다.

개인적으로 낳은 엄마, 길러준 엄마의 정의를 뛰어넘어 엄마의 정의를 새롭게 해준 영화.

 

감독 이동은이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토대로 이 영화의 각본을 썼고, 단행본으로도 나와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시작으로, 독립영화의 맛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되기 때문인지 자극적인 장면이나 대화, 줄거리 없이 감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분명히 하는데 실패하지 않는다. 대개 감독이 곧 각본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TV에서 보았고 이후로 넷플릭스에서 독립영화를 검색해서 찾아보고 있는 중인데 별로 많지 않아 유감이다.

위의 당신의 부탁 이후로 본 <용순>, <흔들리는 물결>에 대한 것은 다음에 또 올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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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0-10-21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의 부탁은 영화 소개를 본 적 있어요.
페이퍼를 읽으면서 제목은 기억을 못했는데, 간단한 내용소개와 임수정 출연은 생각납니다.
hnine님,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hnine 2020-10-22 00:15   좋아요 1 | URL
전 아무 정보 없이 그냥 보게 된 영화인데, 기대보다 훨씬 좋았어요. 언제 한번 다시 보고 싶을만큼.
쓸쓸하면서 따뜻하다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