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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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책을 다 읽으면 버릇처럼 하는 일이 있다. 책의 시작으로 돌아와 몇 페이지 다시 읽어보는 것이다. 그럼 처음 읽을 때 놓쳤던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이해되는 시작인 것이다. (역자 후기에 보니 번역하는 동안 저자인 클레어 키건도 역자에게 이와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고 써 있어서 반가왔다.)

클레어 키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지는데 그녀가 지금까지 남긴 책은 단4권. <맡겨진 소녀>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 외 <남극>, <푸른 들판을 걷다>가 더 있을 뿐인데 그나마 아직 국내에 번역되어 나오기 전이다. 

첫 페이지 시작에서부터 작가는 의도하는 모든 의미까진 못된다 해도 앞으로 소설의 분위기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할 만큼 묘사를 풍부하게 해놓고 있다.

사람들은 침울했지만 그럭저럭 날씨를 견뎠다. 상점 주인, 기술자, 우편 업무를 보거나 실업 급여를 타려고 줄을 선 사람들, 우시장, 커피숍, 슈퍼마켓, 빙고 홀, 술집, 튀김 가게에 있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 추위에 대해 또 비에 대해 한마디씩 하며 서로 이게 무슨 의미냐고-이 날씨가 어떤 조짐은 아니냐고-아니 또 이렇게 매운 날이 닥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물었다. (11)

날씨가 그냥 날씨가 아니다. 살면서 겪는, 매일 달라질 수 있는 '상황', '현실'을 의미했다고 본다. 하지만 사람들은 맑은 날도 궂은 날도, 침울해하면서도 어쨌든 그럭저럭 견뎌내고 살았다고 한다. 매일 좋은 날일 수는 없고, 오늘 날이 궂었다면 내일은 좋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버텼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험난한 날씨가 미래의 어떤 조짐이 아닐까 걱정도 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 중에 아내와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는 펄롱이 있다. 그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채 어머니마저도 어릴 때 여의고 어머니가 모시고 있던 주인집 미시즈 윌슨의 보살핌으로 컸다. 맘껏 배우지 못했지만 건실한 가장으로서 낮이나 밤이나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그것이 가족을 위하고 본인이 할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매일 맡은 일에 충실하며 아내와 함께 두 딸을 키우고 공부시키는 것에 감사하며 산다.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 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느낌을 느끼곤 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20)

아내와 나란히 누워 우린 참 운이 좋지 않냐고 말하는 사람.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아는 펄롱은 그런 사람이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22)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가 우연히 수녀원에서 아이를 낳고 도망쳐 나온 어린 여자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아이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지만 그 여아자이 말대로 수도원에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올바른 일은 아닌 것 같다는 것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하고 배달만 끝내고 돌아온 것이 양심에 찔려 두고 두고 생각한다. 자기의 출신 성분, 부모로부터 일찍 떨어진 자기를 도와주었던 미시즈 윌슨을 생각하며, 나의 아버지는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까지, 잠시 하던 일을 멈춰서 생각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떠돌게 한다. 그동안 모르고 살았지만 자기를 지켜봐주면서 돌보아 주는 손길, 은총의 손길이 있었음을 알게 되고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것들이 가장 보기 어려운 것일까 생각한다.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기로 할 때 그를 움직인 것은 검게 흘러가는 배로강의 강물을 보면서였다.

강을 건널 때 검게 흘러가는 흑맥주처럼 짙은 물에 다시 시선이 갔다. 배로강이 자기가 갈 길을 안다는 것, 너무나 쉽게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간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117)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 길이라고 여기는 길을 선택해 행동에 옮기는 그는 다짐한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21)


저자가 역자에게 해주었다는 말 중에 이런 인용이 있었다.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클레어 키건은 그말을 염두에 두고 쓰는 작가라는 것을 알겠다. 진술이 없고 암시를 택하는 작가, 작가로서 독자에게 설명하지 않으면서 알수 있도록 하고 싶은 작가이다. 읽으면서 그 암시를 얼마나 찾아내는지는 독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겉으로 명시하지 않았지만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독자라면 그 독자도, 작가도 그만큼 만족할 것이다.

펄롱에게 평생 자기의 진심을 말로 전달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을 살았던 네드, 그리고 미시즈 윌슨.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소박하지만 겸손한 그들의 사랑 덕분에 지금까지 펄롱이 거친 세상을 버티고 설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닫고 펄롱은 그런 사랑을 자기도 베풀기로 한다. 그것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가져다 줄지 예상하면서도,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믿는대로 하기로 한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오랜 세월 우리를 받쳐주고 있었던 중요한 것들이 존재한다. 사소해 보여서 모르고 지나치는 것, 가까이 있는 것들을 다시 돌아보자. 그리고 알아냈다면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괜찮은 인생일 것이다. 그런 것들을 지나치지 않고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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