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나의 며칠 동안의 독감 증세도 이제 거의 나아가고, 밤에 있을 시어머님 제사 준비도 다 해놓았고, 제사 때마다 남편에게 부탁하는 파트, 즉 집안 청소가 이루어지는 몇 시간 동안 나가서 오랜만에 바깥 바람도 쐴겸 영화를 보고 들어오고 싶었다. 몇 안 되는 극장을 둘러보아도 별로 보고 싶은 영화가 없다. 할 수 없다. 인터넷 영화 포털에서 검색을 하다가 이 영화를 골랐다. 

블루 프린트

블루프린트
 

 

2007년에 개봉된 독일 영화이다.
잘 나가는 피아니스트 '이리스'는 자신이 다발성경화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잃고 싶지 않다는 절실한 생각에 체세포복제학자인 피셔 박사를 설득하여 자신과 동일한 복제 인간 딸을 낳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 없이 태어난 딸 '시리'는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착한 딸로 잘 자라고 있었는데 자신의 과학적 업적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피셔 박사가 이리스와의 약속을 어기고 매스컴에 알리게 됨으로써 자신이 복제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때무터 엄마와의 갈등,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방황을 겪게 된다. 엄마와의 듀오 연주회를 마치고 나오며 스스로 '복제품'이라는 이름표를 자기 가슴에 붙이고 보란 듯이 걸어나오기도 하고 자해 시도도 하는 딸은 결국 집을 나가 외딴 섬에서 사진을 찍으며 홀로  안정을 찾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자신의 재능을 자식에게 재현시키고 보전하고 싶어한 엄마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엄마의 복제품으로 계획되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딸. 인류를 위해 결국 좋은 일을 한거라고 믿는 과학자. 각기 다른 입장들을 보는 관객의 마음은 착잡하다.
계획된 탄생은 축복받을 수 없는 것인가? 누군가의 대리 인생이란 느낌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만약 그것이 영원히 비밀로 붙여진다면 그럼 상관 없는 것인가?
비록 체세포 복제 방법에 의해 엄마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자식이 태어난다고 해도 그 엄마의 완전한 복제품은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모든 유전 정보가 발현되는데는 환경이라는 변화 요소가 영향력을 미친다. 엄마가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와 딸이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가 동일하다 할지라도 그들이 각각 얼마나,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란성 쌍동이들이 정확히 같은 성질을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인드일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의 보조품이나 대리품으로 '제작'되었다고 받아들일 때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긴박감있게,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볼만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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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12-2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못 본지 좀 되었네요
님이 알려주셨는데 감사하단 인사도 못해드린 것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늘바람 2010-12-2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인지 크리스마스인지 감각이 무뎌져서 살고 있네요

hnine 2010-12-27 10:15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얼마나 몸도 마음도 힘드시면 태은이 소식도 사진도 통 못 올리고 계신지 알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하늘바람님 건강 주의하시고,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어제 리뷰 올린 책 <아벨라, 그리고 로사, 그리고>는 <빨간 모자 울음을 터뜨리다> 리뷰가 채택되어 보내는 사은품이라고 배달된 책인데 저야말로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드렸어요.
새해에는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길거예요. 우리 희망을 가져보기로 해요.

마녀고양이 2010-12-2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동네는요,
CGV랑 메가 박스가 있는데 둘이 얼마나 히트작 위주로만 선정하는지
조금 예술성 있겠다 보고 싶은 영화네 하는 영화는
상영을 전혀 안 하거나, 며칠만 살짝(그것도 하루 1회 정도) 해주고 그친답니다.
글쎄,,, 이번 톨스토이 생애를 그린 영화도 상영 안 했어요!! 아, 짱나요~

나인 언니, 행복한 연말되셔요~

hnine 2010-12-27 10:21   좋아요 0 | URL
서울 한복판에 살때 버스 한번만 타고 나가면 흔한게 영화관이었던 그때가 생각나는 순간이지요. 저는 그래서 요즘 이렇게 한가하게 다운받아서 영화를 보는 것도 괜찮더라고요. 보다가 잠깐 부엌에 나가 가스불을 끄고 들어올 수도 있고요, 아줌마 생활 방식에 적합하지요? ^^
저는 사실 코미디 영화가 보고 싶어 얼마전에 혜덕화님께서 소개해주신 로맨틱 할러데이를 볼까 했었어요. 검색 중에 저 영화가 먼저 눈에 띄어 보게 되었지요. 요즘 듣는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마지막 멘트를 이렇게 하더군요. "여러분, 하시고 싶은 것 꼭 하면서 사세요!" 그 말이 참 좋더군요. 내가 하고 싶은 것, 소신있게 하면서 사는 사람은 보기에도 멋있어요. ^^ (It's YOU!)

카스피 2010-12-2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이 책을 구해서 봤어요.sf소설이라고 해서 사봤는데 뭐랄까 흔히 우리가 아는 sf소설이라기 보다는 좀더 철학적인 내용이더군요^^

hnine 2010-12-27 21:39   좋아요 0 | URL
SF소설로 분류될 수도 있겠어요. 저는 그냥 사전 정보 없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길래 보게 된 영화인데 카스피님은 원작을 읽어보셨군요.
영화도 그냥 흥미 위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그런 식은 아니었어요.

2010-12-27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28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30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0-12-28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으로 다운 받아 보셨다는 거군요.
전 한번도 안해봤어요, 시작하면 왕집착하게 될까봐...
저도 모든 유전 요소에는 환경이라는 변화 요소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요.

어찌보면, 계획이란 건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게 아닐까요?^^


hnine 2010-12-28 09:41   좋아요 0 | URL
왕집착하게 되지 않으실걸요? ^^
계획이란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라는 말씀, 맘에 듭니다. 유전학, 생물학의 매력이기도 한 것 같아요.

진주 2010-12-29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나왔군요.
저는 책으로 읽었는데, 예전에 학생들 가르칠 때 말이죠. 무분별한 과학의 발전은 끝내는 인간을 더 불행하게 한다는 정도의 주제로 몇권의 책들을 묶어 읽고 감상문도 쓰고 토론도 했었죠. 으..지난 번 이사하면서 누군가에게 책은 줬나봐요. 책꽂이에 없네요.

hnine 2010-12-29 13:38   좋아요 0 | URL
어디까지가 '무분별'한 것인지, 누구도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이런 주제로 감상문 쓰고 토론을 하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네요. 저는 이 제목도 처음 보고 고른 영화였는데 이 영화 (혹은 책)를 알고 계신 분들이 꽤 계시는군요.
 
브루클린 오후 2시 - 낯선 곳에서 시작한 두 번째 삶 이야기
김미경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김 선주의 <이별에도 예의가 있다>를 읽고난 소감이 괜찮았던지라 그녀가 교장으로 있는 sunjooschool.com에 고정적으로 글을 올리고 있는  김 미경의 단행본이 나왔다고 할 때 조금은 기대를 했다. 그녀 역시 짧지 않는 세월 한국에서 언론계에 몸을 담았던 사람인데 모든 타이틀을 내려놓고 2005년에 미국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열 여섯 된 딸을 혼자 키우며 살고 있다. 아마 책 표지의 '두 번째 삶 이야기'라는 말은 그녀의 이런 이력을 뜻하는 것 같다. 뉴욕의 브루클린이란 낯선 땅에 사는, 올 해 나이 쉰의 그녀의 인생은 하루로 친다면 오후 2시쯤 되지 않을까 해서 붙친 제목이란다. 내가 나고 자란 땅이 아닌 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며 그 동안의 자기 생활 방식을 다시 돌아보는 이야기 ('나 지금 뉴욕에서 철학한다'), 사춘기 딸과 친구처럼 지내는 이야기 ('나 지금 뉴욕에서 엄마한다'), 뉴욕 생활 즐기기 ('나 지금 뉴욕에서 논다'), 그리고 영어 이야기 약간 ('나 지금 뉴욕에서 영어한다'), 이 책은 이렇게 구성이 되어 있다.
사진이 군데 군데 들어가있고 저자의 글발이 있어서 읽기는 금방 읽힌다. 하지만 그 글발이 김 선주의 그 글발과는 다르다. 읽으면서 느낌도 많이 다르다. 무엇이 다를까, 왜 김 선주의 책을 읽으면서의 공감이 이 책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던터라 어쩔 수 없이 여기에 털어놓지 않을 수  없겠다. 김 선주의 책은 글에 충실하다. 사진이 약간 첨부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글을 넘어서지 않는다. 한 꼭지마다 해야할 말들을 넘치지 않게, 분명하게 하고 있다. 빈 지면이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사진이 비교적 많다. 그것도 모두 칼라 사진들. 빈 지면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페이지는 빨리 넘어가지만 그만큼 마음 속에 채워지는 것이 많지는 않다. 김 선주의 문체에 비해 이 책 저자의 문체에서는 과장이 느껴진다. 쓰다보면 자기의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과장된 표현을 쓰는 수가 있겠지만 그게 지나치면 금방 표가 나며 글의 격이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과장된 표현이 눈에 많이 띄었고 생각의 비약이 있었다. 또 하나, 글의 소재가 다르다. 김 선주의 책은 사회 현상, 정치 현실, 변해가는 세태 등을 소재로 삼은 반면 이 책은 그저 일상이 주 소재이다보니 뉴욕이란 곳에서 몇 년 살다보면 이 정도는 쉽게 나올 수 있는 소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감히 드는, 가벼운 이야기들이 많다. 뉴요커들의 일상, 갤러리 순례라는 새로운 취미, 뉴욕의 크리스마스, 고등학교 올라가는 딸과 친구처럼 나누는 키스와 섹스 얘기, 뒤늦게 대학에서 예술 비즈니스 코스 과정에 들어가게 된 얘기, 이 모든 이야기들이 그저 단순한 에피소드 식으로 지극히 가볍게 '이야기'하고 휙 지나간다.
책의 뒤표지에는 만화가 박재동과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추천사가 올라있다. 그들이 칭찬하는 만큼 매혹적인 글이라는 인상을 받지 못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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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0-12-28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보셨군요, 이책.
그러게 말이죠...인터넷에서 볼 때랑 종이책으로 볼 때랑 느낌이 이렇게 틀려지기도 하더군요.
특히, 글의 중량감에 있어서 말이지요~^^

hnine 2010-12-28 09:43   좋아요 0 | URL
글쓰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해주는 책이었어요.
글은 기교만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책으로 낼때에는 특별히 사람들을 향해 자기의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 뚜렷한 의견이 있어야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구드른 멥스 글 <할아버지는 내 친구> 
  
언젠가 신문 광고를 보고 쥬디스 윌슨의<엄마 돌보기>와 함께 내가 아이에게 사주었던 책이다. 아이만 읽고 나는 못읽어봤길래 어제 아이에게 두 권 중 어떤 것 부터 읽어볼까 물었더니 이 책부터 읽어보란다.
친할아버지도 아니고 연금을 받으며 혼자 살아가는 이웃집 할아버지와 천진난만 소녀 수지의 이야기이다. 할아버지와 꼬마는 왜 서로 끌리는 것일까. 사람이 나이가 들면 다시 아이로 돌아간다는 말이 이야기 속에서도 확인이 되는 것 같아 정말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른으로 성장해가면서 한꺼풀씩 뒤집어 써온 가식과 허영을 다시 하나 하나 벗어 던지게 되는 시기일까? 노년의 시기란 말이다. 할아버지는 아이 앞에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체면을 앞세우지 않고, 어떤 대우를 바라지 않는다. 실제로 이 책에서  아이와 할아버지는 누가 누구인지 거의 구분이 안가게 묘사되어 있다. 아이가 할아버지 같고 할아버지가 아이 같은.
구드른 멥스는 독일에서 태어난 연극 배우 출신의 작가로서 수상 경력도 화려한데, 이 책에서 그는 교훈을 앞세우려 하지 않고 아이들이 읽으며 웃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재미있게 썼다. 그에게는 그것이 더 우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읽는 아이들도 아마 그 편을 더 좋아할 것이다. 

 


임 정진 글 <일자무식 멍멍이>

가끔 임 정진 작가의 홈페이지에 놀러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운좋게 작가의 최근작인 이 책의 사인본을 받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은 흔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대상이 아이들이 아니라 개이다. 우울증이 있는 개라는 것도 특이하지만 이 개를 위해 도서관에서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을 마련해놓고 있다는 것도 독특하다. 미국의 한 도서관에서 실제로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이 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데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아이는 그런 도서관이 어디 있느냐면서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이다. 평소에 읽기에 자신이 없는 아이 영후가 개에게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되는데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개는 열심히 듣고 영후는 점차 책 읽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어간다.
독특한 발상인데 비하여 이야기 자체는 평이하게 흘러간다는 점, 제목이 내용에서 조금 비껴가지 않았나 하는 점 등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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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0-12-2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아버지는 내 친구에 더 호감이 가네요. hnine님, 혹시 위 상품 두 개 다 알라딘 상품 넣기로 집어넣은 거예요? 최근에 이렇게 페이퍼에 등록된 상품들이 첫번째 상품만 링크가 바로가기 안 되어 있는 걸 발견하고 알라딘에 신고했는데 오류 없다고, 작성자가 잘못한 것 같다고 대답이 돌아왔거든요. 이런 현상을 지금 네 번째 발견했는데 오류같은데 말입니다. 상품넣기를 하는데 첫번째는 그림만 링크하고 그 다음 상품부터는 상품을 넣고... 이렇게는 안 하잖아요. 없는 상품이라면 모를까...;;;;

hnine 2010-12-26 11:00   좋아요 0 | URL
어라! 정말 그렇네요? 첫번째 상품도 당연히 알라딘 상품 넣기 한건데 링크가 안되네요!

무스탕 2010-12-26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자무식 멍멍이는 제목이 정말 재미있네요 ^^

근데 정말 오류 맞네요. 알라딘에선 다시한번 검토해 봐야겠어요.

hnine 2010-12-26 20:25   좋아요 0 | URL
일자무식 아닌 멍멍이도 있는지...^^
위의 상품 넣기는 다시 했더니 되는데 왜 한번에 안되는지 오류는 오류네요.
 
아벨라 그리고 로사 그리고... 십대를 위한 눈높이 문학 9
벌리 도허티 지음, 고수미 옮김 / 대교출판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괜찮은 구성이다. 각각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두개의 스토리가 하나로 만나는 결말. 그 한 스토리는 영국의 열세살 소녀 로사, 또 하나의 스토리는 탄자니아 출신의 아홉 살 소녀 아벨라이다. 풍족하진 않지만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잘 크고 있던 아벨라는 아버지에 이어 엄마도 에이즈로 잃고 어린 동생도 잃는다. 죽어가는 엄마에게 약이라도 써보게 하기 위해 아홉 살 소녀의 몸으로 엄마를 부축하여 먼거리 버스 여행을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병원에도 약이 없다는 것이 아프리카 빈민국가의 현실이다. 그렇게 엄마를 잃고 위장 결혼하여 영국에 이민가고 싶어하는 삼촌의 계략에 말려 강제로 할머니와 헤어져 아무도 없는 영국에 떨어진 아벨라의 인생은 좌절과 절망의 연속이다. '이제 나에게 행복이란 없다'고 확신해가는 어린 아이의 마음은 치유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비하면 영국의 셰필드에서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로사는 행복하다. 책의 중간 쯤에 가서야 알게 되지만 로사의 엄마는 백인, 하지만 로사는 흑인 아버지를 둔 혼혈이다. 탄자니아 출신 아버지가 영국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혼자서 로사를 키우지만 로사의 엄마는 긍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품성을 지닌 사람이어서 언제나 남을 도울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가 로사에게 입양을 하고 싶어하는 엄마의 생각을 꺼내는데, 처음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반대하던 로사의 마음이 서서히 움직여 간다. 책의 300여 쪽이 거의 다 넘어갈 무렵에 영국의 소녀 로사와 탄자니아의 소녀 아벨라가 만나게 되기 까지 그 여정이 짧지 않다. 하지만 허술하지 않고 짜임새 있게 작가가 이야기를 잘 이끌어나가고 있어 읽기에 수월했고 흥미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실제로 작가는 이 책을 위해 탄자니아로 날라 가서 그 곳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조사했다고 한다. 실제 그 곳 출신의 아이를 모델로 하여 이야기 구상을 하게 되었다니 이 책이 어색한데 없이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몇 년 전 입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이 어설프게 들렸기 때문일까? 듣는 그 누구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마음 어느 한 켠에 쭉 밀어놓고 있던 것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 고개를 들으며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사랑과 보호 속에서 커야할 아이들이 사랑과 보호가 아니라 무방비와 무관심, 애정의 결핍 속에 방치 되어, 그렇게 절망과 결핍을 배우며 자라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안좋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뭔가 내가 할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에이즈에 걸려서도 약 한번 못써보고 죽어가는 상황, 그렇게 부모를 모두 잃은 아홉 살 어린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국가. 왜 이 세계는 이렇게도 불공평한 것인지, 새삼 마음을 무겁게 한다. 작가는 그것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으리라. 뉴스가 아닌 스토리로 우리가 모르는 삶을 세상에 알리고 관심을 돌리게 하고 싶었으리라.
불공평, 불균등, 무지와 이기심, 이런 것들이 우위를 다 차지하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는가. 로사의 엄마 같이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도 버티고 있음을 자꾸 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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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처음엔  

 

                                                  이 안 

 

대추나무도 처음엔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꽃도 시원찮고 열매도 볼 게 없었다 
 

암탉도 처음엔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횃대에도 못 오르고 알도 작게만 낳았다 


모두들 처음엔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조금씩 시원찮고 조금씩 서투르지만 


어느새 대추나무는 내 키보다 키가 크고
암탉은 일곱 식구 거느린 힘 센 어미닭이 되었다 

 

 

 

 

좋은 동시란 이런 시가 아닐까, 혼자 생각해보았다.
쉬운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안에 시인의 분명한 목소리가 들리는 시
느낌이 전해져 오는 시  

아이가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던 며칠 전 어느 날. 듣고 있자니 계속 틀리는 부분이 있길래 그 부분만 계속 반복해서 쳐보라고 했다. 몇번 치더니 같은 걸 계속하는 것이 짜증이 난다고 투덜거렸다.
"다린아, 생각 안나? 다린이 그렇게 해서 걸음마도 배웠고 말도 배웠는데?"
그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사실 어른인 우리도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잘 안되는 것에 대해 짜증내고 투덜거리긴 마찬가지이다. 한술 더 떠서 난 안될거라느니 (얼마나 해보았다고), 괜한 짓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느니, 내가 왜 이걸 시작했냐느니 (그걸 누구에게 묻는건지), 오히려 아이보다 이런 저런 이유를 더 붙쳐 투덜거린다. 
오늘도 시를 읽으며 배우고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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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시 잡지를 정기 구독하다
    from 내 인생은 진행중 2011-08-22 01:01 
          오리 박 성우 엄마가 예쁜겨울 옷을 사왔다 오리털 파카라고 했다 입어보니까 정말 따뜻했다 근데 오리야, 미안해 춥지?
 
 
담쟁이 2010-12-24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과 선배의 시라서 급반가움이..ㅋㅋ
hnine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hnine 2010-12-24 23:01   좋아요 0 | URL
가슴뭉클님 어떤 과 출신인지 급궁금~~ ^^
혹시 '가슴뭉클과' 아니신지...
조만간 이 시인의 시집이 또 제 손안으로 들어올것 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0-12-25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너무 이뻐요. 이 시를 어딘가 저장해 두고 싶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조금 해보고 안 되면 능력이 없어서 결코 못 할거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다시 해보면 능력이 조금 늘어있는거예요.
요즘은 지겨워도 한걸음씩 나아가자 라고 다짐해요. 그래도
짜증은.......... 어쩔 수 없는거 같아요. 큭큭.

행복한 연말 되셔염~

hnine 2010-12-25 18:13   좋아요 0 | URL
어제 읽은 어린이책 <일자무식 멍멍이> 중에 소개된 시랍니다.
동시는 어쨌든 희망을 심어주는 내용이 많아서 좋아요.

어느날 다시 해보면 능력이 조금 늘어있더라는 말씀이 새롭게 와닿네요~ ^^
그러기 까지 지겹고 짜증나는 단계를 잘 견뎌낸 선물인가봐요.

비로그인 2010-12-2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hnine님. 여유 있는 토요일의 저녁 보내고 있으신지요?
누군가에겐 더 특별한 날이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 특별함을 좀 더 생각하는 저녁으로 다가오네요.

조촐하고 간단한 저녁 먹으면서 들렸다가 시도 읽고 갑니다 ㅎ
잔잔한 웃음이 피어오르는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좀 몸은 괜찮아지셨는지..건강하셔야 하는데..

hnine 2010-12-26 07:03   좋아요 0 | URL
제 몸은 이제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전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것 보다 시어머님 기일 하루 전이라는게 더 신경이 쓰이는 맏며느리인지라 오전에 몇가지 음식 준비 해놓고 나머지는 내일, 혹은 잠 안오면 오늘 밤 하려고 맘 먹고 지금은 널널합니다.
몸 건강이 최고니라, 다른 불평 삼키거라, 그런 가르침을 새기라고 아팠었나봅니다. 웃고, 울고, 화내고, 토라지고, 속상해하고, 이런거 다 몸이 그만 하고 정신이 살아있으니 가능한 거니까요.
바람결님, 건강하세요 ^^
(11, 10, 9,...,0, -1, -2, -3... 이렇게 계속 갈 수 있는 거예요, 그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