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후애사전
이나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내 인생 여정의 중간에 서니'라는 이 리뷰의 제목은 이 책의 권두시로도 인용된 단테의 <신곡> 지옥편 서문 중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런 제목을 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최승자 시인의 싯구처럼.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사실 이 책을 신간 코너에서 보자마자 바로 주문을 한 이유는 제목보다는 '이 나 미'라는 저자의 이름을 보고서였다. 오래 전에 그녀의 '때론 나도 미치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서, 정신과 의사이면서, 한가지 시각이 아닌 이렇게 다방면의 지식을 가지고 폭넓은 얘기를 할 수 있구나 놀라서 이후로 새 책이 나올 때마다 거의 다 따라 읽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새 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싶었는데 오랜만에 나온 책의 제목에 '오십'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녀의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내 나이도 거기서 멀지 않은데.
그녀의 글 스타일은 어떻게 보면 딱딱하고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필요없는 과장이 없고 미사여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그 박학다식이란 평소에 독서와 공부에 얼마나 시간을 쏟았을지 짐작이 되게 한다. 읽으면서 밑줄 긋고 싶었던 곳을 옮겨 적는 것으로 리뷰를 대신해야겠다. 오십대를 겨냥하면서 쓴 글이기 때문에 이십대, 삼십대를 대상으로 한 책들에 비해 내용이 무거운 부분도 많다.

의학의 목적을 꼭 장수에만 둘 것이 아니라 마지막 사는 날까지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자신이 원할 때 깨끗하게 죽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데 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말기 암에 걸리거나 식물인간 상태에 놓이면 무의미한 연장술을 하지 말라고 유언하기 좋을때가 오십 대이다. 나도 죽음이 확실하게 임박한 중병에 걸리면, 무의미하게 호스와 링거 줄을 달고 침대에 누워 지내기보다 쓰러지는 그날까지 사는 것처럼 살다 화끈하게 죽고 싶다. (101쪽) 
 
만약 지금 당신이 고립감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그만큼 당신이 그 누구를 위해서도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헌신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이 외로움이다. 친구는 하나도 없지만, 노숙자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고아들과 외로운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사람들, 그래서 남을 돕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고립감은 없다. (132쪽)
 
이제 사랑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되었으니,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인생에 대한 열정을 찾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사랑이 물론 별건 아니지만, 별것으로 만들어 즐기는 것도 나의 책임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정말 내게 깊은 즐거움을 주고 있는 것인지 냉철하게 점검하고 관찰해보는 것, 또한 상대방 역시 나를 만나서 행복하게 성장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내 의무다. (141쪽)


많이 아는 척을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게 유익합니다. 하지만 더 유익한 것은 자기 발로 다니며 묻는 것입니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척해봐야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145쪽)

할 말도 많고, 추억도 많고, 억울한 일이나 자랑할 일도 많겠지만,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남 앞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가 겪은 그 사람들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듣는 입장에서는 재미도 없다. 무엇보다 과거만 자랑하거나 집착하고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결국 내 현재만 처량하고 빈곤해질 뿐이다. (153쪽)

거절을 할 때는 우선, "나를 배려해서 해준 참 좋은 제안이긴 한데 나름대로 검토해볼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고, "그러나 가능성은 별로 크지 않을 것 같으니 아쉽지만 많이 기대하지는 말라" 고 덧붙여도 좋다. 다른 사람이 그런 제안을 받아들여 시행한다면 무척 근사하겠지만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거나 내 능력이 닿지 않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이 오십이면 그 정도의 사회적 기술은 갖추고 있어야 한다. (182쪽)

 

(부부문제)
제일 중요한 원칙은 일단 모든 문제를 배우자에게 투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자신은 희생자, 상대방은 가해자라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불변의 공식에 매달리는 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마법의 해법은 없다. 아무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다.
자신의 문제는 냉철하게 보지 못하고, 격한 감정에 휘말려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야"를 외치며 남 탓을 하는 한 자신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올 수는 없다. 스스로 '희생자'란 딱지를 붙이고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히 '희생자 되기'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완고하건, 자신의 선택과 감정에 책임을 지는 사람은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먼저 적극적으로 자신부터 바꿀 줄 안다. 그러면 상대방은 느린 속도지만 당신을 따라 변할 것이다. (195쪽)

 

인간을 포함해 세상 모든 만물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처럼 작은 존재는 그저 자연이 허락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왔고, 또 우주의 섭리가 허락할 때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꼭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일종의 아집이다.
어쩌면 이 세상의 반은 지옥일지도 모른다. (265쪽)
 나, 이 생각을 종종 하면서도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주저했었다.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도 있듯이 뭐든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얘기해야 호응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전히 그렇지 않아보이고, 오히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하고 앞날을 생각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는데 저자의 이 구절을 보고 참 반가왔다고 고백해야겠다.
   
장자는 "땅은 내게 몸과 삶을 주어 나를 고단하게 했지만, 늙어 내가 편안해졌으며 죽음으로 내가 쉴 수가 있다. 삶이 좋은 것이라면 죽음 또한 좋은 것이다." 라고 말했다. 어떡하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려고 하는 현대인이 책상 앞에라도 붙여놓고 들여다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우리를 조종하는 운명의 노끈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즉 현해(懸解)라 표현한다. 세상 근심 걱정을 다 놓고 떠나는 것을 기뻐하면서 죽어가는 경지, 얼마나 멋진가. (273쪽)

 

오십 무렵에 배워야 할 제일 큰 덕목은 이처럼 늙음과 죽음에 대한 소박하지만 성숙한 태도이다. 또한 그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숨은 스승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 스승들은 지식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실패했거나 큰 고통을 겪었거나 큰 좌절을 경험한 아주 평범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중에 큰 스승이 있다. 자녀를 앞세운 농어촌 촌로들, 도시에 대한 집착을 벗어던지고 귀농한 용감한 분들 중에 그런 이들이 숨어 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소박하지만 위대한 지혜를 좀처럼 남들에게 떠벌리거나 자랑하는 법이 없다. (277쪽)

 

인생의 수레바퀴를 완성하기 위해서
기를 불어 넣고 힘을 들여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깨달음은 세상을 초월하는 비밀스러운 무엇이다.
궁극적인 것이 무언지 의문이 드는 순간
인생의 수레바퀴가 너를 성장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먹는다고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도를 버릴 때
진정한 성숙이 찾아온다.

<태을금화종지>, 여동빈 저, 고성훈, 이윤희 역, 여강출판사, 1992 (286쪽)


책의 후기에서 그녀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 날 부터인가 어느 자리를 가도 자기가 가장 연장자가 되어 있더라고 했다. 내가 요즘 어딜가든지  '언니'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심정과 비슷하리라.
새삼 자신의 나이를 깨닫게 되면서 앞으로 그동안과는 달리 새롭게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해본다며 예로 든 것들을 보니 나의 상상력보다 훨씬 근사하다. 어디에 적어두고 싶었다.
동서양 고전을 넘나들며 거침없이 예시를 보이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구석 자만심을 보이지 않는 그녀가, 나보다 조금 앞서 가면서 이렇게 계속 좋은 글을 내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7-28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깨달음을 얻은 척해봐야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를 읽고
그만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피식 웃어버렸습니다. ㅎㅎ.

바로 며칠전 옛날에 해주던 <바람돌이> 만화를 EBS에서 해주는거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할머니가 하루동안 바람돌이의 마법으로 처녀 시절로 돌아가는거였답니다.
정말 순식간에 팔랑팔랑 나비처럼 날아다니더군요.

hnine 2011-07-28 05:38   좋아요 0 | URL
팔랑팔랑 나비처럼~ ^^ 문득 제게도 그렇게 팔랑이던 때가 있었나 싶어서요. 그렇게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대신 어떡하면 잘 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날지도 않고 바위 구석에 앉아 보낸 시간들이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책의 저자도 공부가 의무가 아니라 취미인 것 처럼 보이는 사람이지요. 동양, 서양, 이 종교 저 종교, 철학, 문학 할 것 없이 해박해요.

stella.K 2011-07-2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벌써 50을 생각해야 하는군요.
그렇지 않아도 눈 뜨고 일어나면, 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때가 종종했어요.
난 어제 40이었던 것 같은데 뭐지? 어디갔지? 그런 거...
저도 이제 다시 어디 봉사할 곳을 찾아 볼까 생각 중입니다.
예전엔 의무감이 컸는데 지금은 필요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50 어떻게 보면 그 나이도 젊지 않나요?ㅋㅋ

hnine 2011-07-28 13:55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엔 20대에서 30대, 30대에서 40대 넘어오는 동안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보냈기 때문에 나이를 먹는지도 미처 느끼지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젠 그때만큼 치열하게 살지 않아서 나이 먹는게 피부로 느껴지고 50대는 40대와 어감부터가 너무나 다른 느낌이 들어서요.

'그런데 50 어떻게 보면 그 나이도 젊지 않나요?' --> stella님은 이래서 좋다니까요 ^^

하양물감 2011-07-28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고민이 많아요. 40이 딱 되어서 그런가? ㅎㅎㅎ 10단위로 생각하는 거 이것도 습관이겠지만, 올해는 유독 고민이 많답니다. (몸도 예전같지 않아요 ㅋㅋㅋ)

hnine 2011-07-29 07:23   좋아요 0 | URL
고민, 될 수 있으면 잘, 생산적으로 하셔서 방법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40에 들어갈 때라든지, 50에 들어갈 때, 또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 등, 한번씩 나의 시간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는데 그것도 잘 이용하면 나쁘지 않겠지요. 아이에게 올인하며 살면 언젠가는 꼭 후회할 것 같은, 저도 다 겪어보지 않아 모르지만 그런 예감이 설풋 들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7-2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기는 피해자고 남은 가해자라는 식으로 단정을 해놓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참 곤란한 존재더군요.이런 사람은 남의 고생을 인정해주질 않으니까요.나이값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로 알 수 있는데 말입니다.

hnine 2011-07-29 07:25   좋아요 0 | URL
그렇게 한번 생각을 고정하고 나면 거기서 벗어나는데 참 오랜 세월과 노력이 소모되더군요.
나이값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 여부로 알수 있다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그래서 책도 읽고 다른 사람 얘기도 듣고, 그러는 것 아닌가 싶고요.

상미 2011-07-29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최승자 시인님 시 읽고 블로그에 올리려고 담아뒀었는데....

hnine 2011-07-29 08:06   좋아요 0 | URL
나는 '너무' 공감될까봐 이분 시집 고의적으로 안 읽고 있는 중.
가끔씩 이렇게 눈에 띄는 부분들에도 너무나 공감이 되거든.

순오기 2011-07-29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쉰이 넘었으나 여전히 소녀처럼 혹은 새내기 주부처럼 갈팡질팡 답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어요. 책에서 얻는 지혜가 삶에도 적용돼야 하는데 그건 또 별개일때가 많더라고요.ㅜㅜ
마음에 담고 새김질하며 살면 좀 나아지겠지요.^^

hnine 2011-07-29 09:17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을 보면서 많이 배우고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사는건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고 저 책에도 나오더군요. 다 할 줄 아는 말이지만 잊고 살때가 더 많은 말이지요. 책에서 얻는 지혜를 삶에도 적용하도록, 계속 노력하며 살 뿐 입니다.
여기는 아침부터 바람이 서늘하네요. 하지만 요즘 날씨는 워낙 변화 무쌍해서 오늘 낮은 또 어떻지 모르겠어요. 날씨가 어떻든, 꿋꿋한 하루가 되도록 노력하려고요.
 
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그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 이 물고기는 남쪽 바다로 가기 위해 변신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그의 등은 태산과도 같이 넓고 날개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 같으며 한번 박차고 날아오르면 구만리를 날아간다 ('장자' 중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국어 사전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작가가 있다. 많이는 못 읽고 기껏해야 스무 쪽 내외라고. 이 책의 저자인 구병모 작가이다.
그걸 기억하고 있어서인가. 그녀의 문체가 얼마나 개성이 강한지 다시 보게 되고 그녀가 사용하는 어휘들이 컴퓨터 화면에서 (전자책을 구입했으므로) 톡톡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여러 번 받는다.
생활고라고만 표현하면 드러나지 않는 극한의 상황을 견디다 못해, 그야말로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목숨을 붙이고 있는 어린 아들을 더 보다 못해 "편하게 해줄께"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함께 물에 투신하는 남자. 그 아이를 구조해낸 노인, 그리고 그 노인이 데리고 살고 있던 외손자 강하. 그 아이는 '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세사람은 이렇게 한 가족의 형태로 살기 시작한다. 정작 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화자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역시 투신했다가 곤에 의해 구조된 양해류라는 여자이고, 강하의 엄마 이령의 등장은 이야기의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과거에 강하의 엄마 이령은 일곱 살 난 강하 손에 짐가방을 들린채 버스에 태워 물건 부치듯이 자기 아버지에게 보내버렸고, 자기의 그런 배경을 아는 강하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은 불만의 대상일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물에 빠진 어린 아이를 할아버지가 건져와 함께 지내게 되자 그 아이'곤'을 대상으로 자기의 온갖 불만과 컴플렉스를 해소하는데, 정말 못되고 잔인한 방식의 해꼬지도 많이 하고 '곤'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지만 당하는 곤만큼이나 가여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보통 인간의 모습과는 다른, 수중 생활에 적합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곤은 이래 저래 외부 출입을 되도록 삼가고 집안에서만 지내기 때문에 그에게 이 세상은 할아버지와 강하,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사는 집이 전부이다. 자기 생각을 표현할 기회도 없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받는 것은 강하로부터의 폭력과 구박이 전부인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강하의 엄마 이령으로부터 들은 "너 참 예쁘다." 라는 말은 곤의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바꿔놓게 된다.

곤은 한마리의 생선이 되어 도마 위에서 토막 나지 않도록, 자신의 살과 내장에서 간유를 짜내고 그 찌꺼기가 어박과 어분으로 분리되어 어느 짐승의 입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어딜 가든 감추는데 급급해온 자신의 몸이 누구도 들려준 적 없던 그 말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이미 약물 중독이 심각한 수준에 달했던 이령을 구해보려던 곤의 시도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부르게 되고, 강하의 지시에 따라 집을 떠나가게 되는데, 그 상황에서 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저항도 반항도 아닌 겨우 이런 말이었다.

"사정이 나아지면 다시 와도 돼?"
강하는 얼굴을 딴데로 돌린 채로 손을 펄럭였다.
"다시는 오지 마."
곤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강하는 이녕 앞에 다가가 마주 앉았다. (...)
"아, 나 진짜 ...... 도대체 왜 그랬어 이 여자야......"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의 무기는 섬뜩하게 날이 서있고 처절하지만 그 무기로 막상 그녀가 지어낸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얼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흐물흐물 녹아내리게 한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 영애의 연기가 그러했듯이 싸늘한 표정 속에 감춰져 있는 깊고 깊은 물길 속 같은 사람의 마음이랄까.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위저드 베이커리'가 나온 것이 2009년이었다. 2년만에 내놓은 작품이니 다작의 작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다작이 아니어도 좋으리라. 한줄 한줄, 작가의 범상치 않은 필력과 독창성이 번뜩이는 수작(秀作)이라고 평하고 싶다. 하나 더,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녀가 어휘 선택에 매우 신중하다는 것, 숨어 있는 우리 말을 찾아 쓰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여기 저기서 보인다. 나도 모르게 읽으며 메모하게 되었다.
앞으로 나올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작가, 다음 작품에 대해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될 작가라고 내 마음 속 카테고리에 넣어두기로 한다. 

(해설을 쓰신 최정우님은 알라디너이신 그분?)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7-22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괜찮나요? 하긴 다들 괜찮다고 그러긴 하는데
전 아직 마음이 동하지는 않네요.
근데 괄호안의 그분은 닉넴이 어떻게 되시길래...?

hnine 2011-07-22 22:26   좋아요 0 | URL
위저드 베이커리도 그랬지만 이 책도 호, 불호가 갈릴만해요. 현실과 환타지가 접목된 플롯, 작가의 노련한 문체 등, 저는 좋았는데 stella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람혼님이요~ ^^)

람혼 2011-07-23 02:15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쓴 해설 맞습니다.^^

hnine 2011-07-23 09:59   좋아요 0 | URL
와, 맞군요! 해설 부분, 다시 읽어보러 갑니다~
아 참, 안녕하세요? (꾸벅)

람혼 2011-07-24 14:06   좋아요 0 | URL
네, 안녕하세요! 너무 반갑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7-2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에 곡우님이 이 책 괜찮다고 리뷰의 댓글에 달아주셨는데
결국 아직도 못 읽었네요. 솔직하게 위저드 베이커리도 사놓고 못 읽고.
그런데 인용구가 너무 맑은데요... 확 끌리네요.

hnine 2011-07-22 22:28   좋아요 0 | URL
음...일단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아무나 흉내내지 못할 세계를 확실하게 확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 전 이런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이 책, 한마디로 독특합니다!

가슴뭉클 2011-07-22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끔 트윗멘션을 읽으면.. 굉장히 생각많고 예민하단 느낌이 들어요. 좀 어둡기도 하구요. hnine님 말씀대로 뭔가 묘하고 독특하단 생각이 들더군여.

hnine 2011-07-23 00:15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하는 작가 이미지 그대로군요. 생각 많고 예민하고 어두운 면도 있고요. 한가지 더 있다면 빈틈없어 보인다는 것? 작품으로 작가의 성향을 짐작해보는 것, 이거 좋은 취미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2011-07-23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23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1-07-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위저드 베이커리 때 톡톡히 예방주사를 맞아서 그런지...그렇게 까지는 아니었어도 별 다섯개가 아깝지 않은 수작임에는 틀림없더군요~^^

근데, 컴퓨터 화면으로 읽게되는 책 어때요?
전 전자책은 아직이거든요~

hnine 2011-07-23 14:34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도 이 책 읽으셨군요. 위저드 베이커리 읽으며 독특하고 어둡고 서늘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일단 독특하면 저는 오래 기억에 남더라고요. 현실과 환상을 이렇게 미끈하게 접목시키기 까지 작가의 노력과 시간과 땀이 존경스럽기도 하고요.
저는 스마트 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빨리 읽고 싶어서 전자책을 구입해서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보통 책 읽는 것 처럼 똑같은 자세로 읽었어요. 더 빨리 읽게 되고요, 음... 컴퓨터 화면 자체가 환하니까 따로 방에 불 끄고 읽어도 되어서 좋고요. 아직 밑줄 치고 접어 놓고, 그런 기능들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더군요.

세실 2011-07-23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저드 베이커리의 그 작가이군요.
곤. 강하, 이령...이름들이 참 예뻐요.
산다는 건 참.....문득 사람은 어디까지 참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hnine 2011-07-23 14:40   좋아요 0 | URL
이름도 무지 신경써서 지었대요. 읽다보면 어느 하나 대충 했을 것 같지 않은, 작가의 그런 성향이 막 느껴져요.
목숨이 참 모질다는 말을 예전에 어른들이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어요. 극한 상황이 되었을 때 적어도 어린 아기들에게서는 초능력적인 힘이 발휘되어 상황을 견딜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작가가 했다더군요.
물에 잠겨가는 방에서 혼자 눈만 말똥거리며 말도 못하는 아기가 아빠를 기다리는 상황, 아내가 집을 나간 후 분유 담긴 젖병을 다섯개 아기 머리 맡에 놓아두고 밖에서 방문을 잠그고 출근하는 아빠...여기서 그 아기가 바로 주인공인 '곤'이라는 아이여요. 에공...마음이 아픕니다.

순오기 2011-07-25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저드 베이커리는 봤는데 '아가미'는 읽을 생각 못했어요~~~~
이 리뷰를 읽으니 건너뛰면 안 될 거 같아요.^^

hnine 2011-07-25 22:06   좋아요 0 | URL
위저드 베이커리만큼 독특하고 상징이 있는 책이고요, 아가미가 생겨난다는 발상을 어찌 할 수 있었는지 감탄하게 되어요.

청학 2011-08-1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정말 문장 하나 하나가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더군요. 님의 댓글이 한번 더 가슴 속
샘물 방울을 자극합니다.
 

민들레 꽃 

 

                                                 박 소명 

 

귀퉁이에
납작 엎드려 있다고? 


꽃밭 맨앞자리의 채송화 
안 부러워  


햇빛 좋은 담장 앞 맨드라미
안 부러워


골목길 내려다보는 키 큰 해바라기도
안 부러워 


왜냐고?


훨훨 날아갈 생각이거든 


달나라까지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우수동시 선정, 2011. 6)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오고 있지만
동시를 쓰는 시인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시각을 지닐 수 있는 것인지.
난 어릴 때 조차 이렇게 어린이 특유의 낙천적이고 당당하고 희망적인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동화랍시고 끄적거린 것을 읽어본 사람들로부터
이건 소설이지 동화가 아니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의 말인지 몰랐었다.  
그러다
가 최근에 와서 알게 되었다.
동화란 단지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내용도, 문체도, 어휘도,
동화를 위한 것들은 다 따로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알게 된 제일 중요한 사실이라면 그것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1-07-21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1-07-21 17:07   좋아요 0 | URL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드려요. 돈벌이로 동화작가를 생각한다는 사람이 저는 더 신기하네요 ^^

하늘바람 2011-07-21 16:55   좋아요 0 | URL
동화가 소설 담으로 돈이 되어서 사실 돈이 될 때는 엄청 되거든요. 그래서 돈벌이로 생각하는 사람 무지 많아요

sslmo 2011-07-2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작년에 올려주신 님의 그 동화, 참 좋았어요.
따라 읽는 재미가 쏠쏠했었어요.

비록 혼자 끝내버리셔서 그렇지~^^

hnine 2011-07-21 16:41   좋아요 0 | URL
나름대로는 결말을 짓긴 지었는데 여기는 결말 부분은 안 올렸나보네요?
제가 그때 참 얼굴이 두꺼웠습니다 ㅋㅋ 그걸 갑자기 깨달았던 모양이어요.
아무튼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니 감사드려요. 누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겠어요 ㅠㅠ

파란놀 2011-07-2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더 차근차근 삭여서 아름답게 나눌 동화 하나 나누어 주셔요~

hnine 2011-07-22 17:59   좋아요 0 | URL
예, 그래야지요. 다른 사람들의 땀과 시간과 노력은 안보고 그들이 이룬 것만 보아서는 안되니까요.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1-08-06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호호 아줌마 2012-06-22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시를 써봤는데 비교가 안되네요
정말 잘 쓰셨어요.
 

내가 학교 다닐 때와 달리 요즘은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도 학생으로부터 평가를 받는다. 이른바 강의 평가라는 것이다. 전공 과목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교양 과목으로 강의를 한 경우에 있어서는 늘 강의가 너무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나름대로 깊이보다는 '흥미' 위주로 강의를 하려고 노력함에도 노력 부족인지. 거기다가 내가 알아서 들은게 그렇다는 것이지 학생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기가 꺼려질 정도로 막된 표현들도 많다. 솔직히 상처를 받는다. 상처는 상처고 아무튼 학생들의 의견이 그러하니 나는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더 이해하기 쉽게 강의를 할 수 있을까. 쉬운 예를 많이 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또 아이러니한 것은 고등학교 때 배운 것에서 더 배운 것이 없다, 수준이 너무 낮다는 의견들도 꼭 올라온다는 것이다. 이래 저래 학기 끝나고 강의 평가 내역을 보고 나면 여기 저기 퍼렇게 멍이 드는 기분이다. 그 멍이 풀리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이런 와중에 또 나는 이번엔 대학생이 아닌 초등학생 정도 아이들에게 과학을 실험으로 체험할 수 있게 가르치는 사람을 양성하는 코스를 신청해서 지난 한 달 동안 듣게 되었다. 교육이 끝난 마지막 시간에 한사람씩 각자의 지도안을 작성해서 발표했는데, 강의 개요에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 어려운게 아니라 쉽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라는 말을 하더라.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과연 과학이 쉬운가?

과학의 한 분야를 전공하고 있다는 나는 지금까지 한번도 과학이 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하면 할수록 어려워서 과학이란 분야에 아무리 흥미가 있고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할지라도 이런 줄 알았더라면 전공으로까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다. 
실험으로 직접 보여줄 때 이해가 더 잘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모르는 상태에서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과학 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실험이 충분하지 않은 교육 환경 탓을 많이 한다. 실험이 충분한 교육 환경이란 어느 정도의 환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릴 때부터 자연을 가까이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변화를 직접 보고 자라는 것, 그 변화는 왜,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스스로 의문을 품어보고 왜 그럴까 생각해보는 기회가 만들어질 수 있는 생활 환경. 과학을 공부해보고자 하는 동기는 그런 자연에 대한 경외심, 호기심, 파헤쳐 보고 싶은 탐구심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과학이 쉽다는 생각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말하면 그야말로 내가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대학 때 다른 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자기 교수님으로부터 들었다며 내게 해준 말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DNA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다면 다섯 살 짜리 아이에게도 설명해서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할 때 들춰보는 책이다. 과학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동시에 이 세상이 과학만으로 이루어지진 않았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는 노과학자의 자기 성찰적인 글들로 꽉 차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slmo 2011-07-1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과학이 어려운 건,
시 같은, 인생 같은 학문이지만...시나 인생은 아니여서 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과목이 다 어려운데, 수학이나 과학이 상대적으로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건 독해의 문제라는 생각도 같이요.
어려운 얘기도 재밌게 풀어내면 좀 쉬워지기도 하니까 말이죠.^^

hnine 2011-07-20 04:06   좋아요 0 | URL
제가 머리가 굳었나봐요. 양철나무꾼님 댓글도 어려워 금방 접수가 안되고 있어요 ㅠㅠ

sslmo 2011-07-21 14:34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이 또 이리저리 널을 뛰었군요~
님의 머리를 탓할 게 아니라, 저를 반성해야 할 듯~ㅠ.ㅠ

hnine 2011-07-21 16:49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양철나무꾼님. 제 머리가 이제 풀렸나봐요. 어제 여러번 읽고 오늘도 몇번 읽어보니 무슨 뜻으로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조금 기다렸다가 댓글 쓸걸 ㅠㅠ
 
작가 - 작가가 되는 길, 작가로 사는 길
박상우 지음 / 시작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리뷰를 오늘까지 미룬 것은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잘 정리해서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지 하필 오늘, 이런 기분인 날이 될 때를 기다려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책 읽는 것을 좋아함에는 변함이 없지만 학교 다닐 때 한번도 장래 희망으로 작가를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최근에 와서 작가란 사람들을 선망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마도 창작 활동이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직업으로 해오고 있던 일에 대한 반항일 수도 있겠다.

작가가 되기를 꿈꾸던 사람이 작가가 되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작가가 된다는 것작가로 평생을 사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라는 직함만 붙이고 산다고 해서 작가의 인생이 조성되는 것도 아니다.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작가는 죽는 날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생 결핍감에 시달리며 자신을 보완하려는 열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 (103,104쪽)

 평생 결핍감에 시달리며 사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어야 한다. 또한 작가가 된다는 것이 곧 작가로 사는 일을 뜻하진 않는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것일까?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산다는 건 자기 방식의 인생을 배우고 터득하는 과정이다. 각자 다른 인생과 개성이 생겨나는 과정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보편성을 상실하는 과정이기도 하다....그처럼 인간의 삶은 굴곡을 만들고 그것은 정신에 주름을 남긴다. 소설을 쓰는 기초 단계는 결국 나의 주름진 정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신을 극복하는 초기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소설을 쓰기 어려워진다. (178쪽)

 글을 쓰게 하는 내적 동기가 무엇이었든, 어떤 치유되지 않은 한이 나의 손을 움직이게 했든, 그안에 갇혀서, 그것을 넘어서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작가란, 그리고 작가로서의 삶이란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참으로 다양하고도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한가지에 얽매여서도 안되고,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엔 그 천개의 눈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집중력도 필요한 삶.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평생을 정진해야 함은 비단 작가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도자와 같은 자세란 말 속에는 어떤 한가지 일의 무한반복 과정이 내포되어 있고, 그 말은 목표를 향하여 정진하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 올려두진 않겠지만 이 책에는 소설가로 서기 위해 습작을 위한 여러 가지 팁, 그리고 소설 작법에 대한 혼동하기 쉬운 사항에 대한 친절한 설명 등이 들어있는데 최근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예로 들어주고 있다. 가령 플롯과 줄거리는 어떻게 다른가, 서사와 묘사의 뜻, 서사가 쓰여야 할 곳, 묘사가 쓰여야 할 곳, 문학과 학문의 차이, 단편과 장편은 길이 외에 어떤 점이 달라야 하는가 등.

소위 화려한 등단이라는 것을 한 이후 주목받는 작가로서 순조로운 여정을 시작했으나 10년 동안의 침잠의 세월을 보내야했던 그의 목소리는 줄곧 진지하고 자기 성찰적 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도 진지하다 못해 때로 경건한 마음까지 들게 했다.
우연히 어떤 분이 같은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강력 추천하시기에 읽어보게 된 책이다. 2009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품절 상태여서 재판 요구 신청 해놓고 몇달을 기다려 구입할 수 있었다. 다 읽고서 권해준 그 분께 짧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감사하다고.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어느 신춘문예 당선자의 당선 소감은 소설이 아니더라도 자기의 길을 선택하여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이 될 듯하여 옮겨놓고 나 역시 나의 선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려한다. 그 선택을 위해 지불해야할 비용에 대하여, 그럴 때 나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선택은 선택하지 않는 것들을 비용으로 지불한다고 했다.
소설을 위해 포기했던 많은 것들은 때때로 내게 감당하기 힘든 대가를 요구했다. 춥고 어두운 터널을, 그 끝 어딘가에 있을 출구를 그리며 무작정 걸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의 끊임없는 아우성. 그것들에서 해방되는 순간은 오로지 글을 쓰는 시간뿐이었다. 달콤하고 불온한 유혹에서 나를 붙잡아준 것 역시 소설이었다.
두 평 남짓한 골방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따뜻한 나의 정원이었다. 싹을 틔운 글감은 그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때론 애만 태우다 시들고 말라버렸지만 그것조차 내겐 소중한 가르침이었다.
이제 첫 번째 터널을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얼마나 긴 터널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270쪽)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7-16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6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7-1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은 간직하고 있을 때가 좋은 거 같아요.
원재훈 작가가 어느 책에서 자신은 아직도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게 어찌나 마음에 와 박히던지요.^^

hnine 2011-07-16 22:25   좋아요 0 | URL
제멋대로 생각인지 모르지만 어쩐지 stella님의 댓글 첫줄이 무슨 말씀인지 저도 확 와 닿아요. 그럼에도 꿈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좋을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가 주저스러운걸요. 저는 꿈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본 적이 부끄럽게도 아직 없지만, 그렇지 않고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생각대로 목표를 이루지 못한 사람도 없지 않을텐데 그런 분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싶어서요.

비로그인 2011-07-1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개 주셨군요 ^^
실은 안보이게 한 열개쯤 더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요 ㅎ

hnine 2011-07-16 18:22   좋아요 0 | URL
예, 바람결님도 한번 읽어보시라고 하고 싶어요.
작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저자의 태도로부터도 배우는게 있었거든요.

sslmo 2011-07-1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우리나라 작가들의 처우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돼요.
글을 써서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잖아요.
어젠가 최승자님의 신작을 보다가...딸린 기사를 같이보게 됐고,
지병이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정부의 보조를 받는 아주 어려운 삶을 산다는 얘기를 듣고 한동안 어쩌지 못하겠더라구요~ㅠ.ㅠ

제가 글로 밥을 벌어먹을 정도로 글을 쓰지 못하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었어요.에효~.

hnine 2011-07-16 18:24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글 써서 생계가 유지되려면 일년에 한번 정도 소위 '대박'이 터져야 그나마 가능하다고 저도 어느 소설가가 하는 말을 들은 적 있어요. 그래서 글 쓰는 일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것 같아요.
생계가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중요한 문제이지요.

마녀고양이 2011-07-1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쓴다는게
그 사람이 가진 생각 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던 무의식적 상념을 얼마나 많이 투사하는지
알고난 이후로, 글을 쓴다는 자체에, 그리고 감히 작가의 길로 나서는 분들께
일종의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어요.

저는 자신이 쓴 글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소유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hnine 2011-07-16 18: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래서 나에게서 나온 내 글인데도 지나고 읽어보면 나의 본질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쓸 당시의 내 기분만 들어있을 뿐인 때가 있지요. 그래서 사실 요즘, 이렇게 아무 글이나 내킬 때 막 써올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어요. 마녀고양이님 말씀하신대로 일단 공개되고 나면 그것은 내 소유만은 아니니까요. 리뷰나 페이퍼 한편을 써도 정말 공들여서, 깊이 생각해서 쓰시는 분들을 볼때는 누구나 다 같지는 않다고 아무리 합리화 시켜도 슬그머니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프레이야 2011-07-16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되기와 작가로 살아가기.
많은 차이가 있는 말 맞네요.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비용으로 지불하고 선택한 한 가지 길에 얼마나 성심을
다하는지 가끔 돌아보면 부끄럽기도 해요.
최근 '내 인생의 키워드'라는 주제를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는데
'글'이라는 키워드로 머릿속에 정리만 해봤어요. 떠오르는 여러 기억들이 있는데
어쭙잖을 거 같아 글로 옮기진 않았네요. 근데 한 번 써봐야겠다 싶어요.
글로 나오면 그만큼 책임감도 들지 않겠어요? ^^
나인님의 리뷰와 페이퍼는 제겐 더없이 좋아요. 다른분들도 그렇게 느낄거에요.

hnine 2011-07-17 06:06   좋아요 0 | URL
'작가로 살아가기'에서의 작가란 말에는 더 이상 직업만을 의미하진 않는 것 같지요. 어떻게 보면 한 생을 살아가는 것도 무언가 자기만의 것을 지어내는 과정 아닐까 생각하니 작가의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고요.
내 인생의 키워드라니, 멋져요. '글'이 맨처음 떠오르시는군요!
정말 좋은 주제인걸요. 꼭 써보실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