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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그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한다. (...) 이 물고기는 남쪽 바다로 가기 위해 변신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그의 등은 태산과도 같이 넓고 날개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 같으며 한번 박차고 날아오르면 구만리를 날아간다 ('장자' 중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국어 사전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작가가 있다. 많이는 못 읽고 기껏해야 스무 쪽 내외라고. 이 책의 저자인 구병모 작가이다.
그걸 기억하고 있어서인가. 그녀의 문체가 얼마나 개성이 강한지 다시 보게 되고 그녀가 사용하는 어휘들이 컴퓨터 화면에서 (전자책을 구입했으므로) 톡톡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여러 번 받는다.
생활고라고만 표현하면 드러나지 않는 극한의 상황을 견디다 못해, 그야말로 매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목숨을 붙이고 있는 어린 아들을 더 보다 못해 "편하게 해줄께"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함께 물에 투신하는 남자. 그 아이를 구조해낸 노인, 그리고 그 노인이 데리고 살고 있던 외손자 강하. 그 아이는 '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세사람은 이렇게 한 가족의 형태로 살기 시작한다. 정작 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 화자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역시 투신했다가 곤에 의해 구조된 양해류라는 여자이고, 강하의 엄마 이령의 등장은 이야기의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과거에 강하의 엄마 이령은 일곱 살 난 강하 손에 짐가방을 들린채 버스에 태워 물건 부치듯이 자기 아버지에게 보내버렸고, 자기의 그런 배경을 아는 강하에게 이 세상 모든 것은 불만의 대상일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물에 빠진 어린 아이를 할아버지가 건져와 함께 지내게 되자 그 아이'곤'을 대상으로 자기의 온갖 불만과 컴플렉스를 해소하는데, 정말 못되고 잔인한 방식의 해꼬지도 많이 하고 '곤'은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지만 당하는 곤만큼이나 가여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보통 인간의 모습과는 다른, 수중 생활에 적합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곤은 이래 저래 외부 출입을 되도록 삼가고 집안에서만 지내기 때문에 그에게 이 세상은 할아버지와 강하,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사는 집이 전부이다. 자기 생각을 표현할 기회도 없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받는 것은 강하로부터의 폭력과 구박이 전부인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강하의 엄마 이령으로부터 들은 "너 참 예쁘다." 라는 말은 곤의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바꿔놓게 된다.
곤은 한마리의 생선이 되어 도마 위에서 토막 나지 않도록, 자신의 살과 내장에서 간유를 짜내고 그 찌꺼기가 어박과 어분으로 분리되어 어느 짐승의 입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어딜 가든 감추는데 급급해온 자신의 몸이 누구도 들려준 적 없던 그 말 한마디로 구원받은 것만 같았다.
이미 약물 중독이 심각한 수준에 달했던 이령을 구해보려던 곤의 시도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부르게 되고, 강하의 지시에 따라 집을 떠나가게 되는데, 그 상황에서 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저항도 반항도 아닌 겨우 이런 말이었다.
"사정이 나아지면 다시 와도 돼?"
강하는 얼굴을 딴데로 돌린 채로 손을 펄럭였다.
"다시는 오지 마."
곤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강하는 이녕 앞에 다가가 마주 앉았다. (...)
"아, 나 진짜 ...... 도대체 왜 그랬어 이 여자야......"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의 무기는 섬뜩하게 날이 서있고 처절하지만 그 무기로 막상 그녀가 지어낸 것은 사람의 마음을 얼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흐물흐물 녹아내리게 한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 영애의 연기가 그러했듯이 싸늘한 표정 속에 감춰져 있는 깊고 깊은 물길 속 같은 사람의 마음이랄까.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위저드 베이커리'가 나온 것이 2009년이었다. 2년만에 내놓은 작품이니 다작의 작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다작이 아니어도 좋으리라. 한줄 한줄, 작가의 범상치 않은 필력과 독창성이 번뜩이는 수작(秀作)이라고 평하고 싶다. 하나 더,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녀가 어휘 선택에 매우 신중하다는 것, 숨어 있는 우리 말을 찾아 쓰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여기 저기서 보인다. 나도 모르게 읽으며 메모하게 되었다.
앞으로 나올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작가, 다음 작품에 대해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될 작가라고 내 마음 속 카테고리에 넣어두기로 한다.
(해설을 쓰신 최정우님은 알라디너이신 그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