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우현히 오늘 전철 역에서 어떤 사람이 보는 신문에 정명훈 지휘자가 대문짝만하게 나와서 기사를 찾게 되었다.
클래식 애호가로서 정명훈 지휘자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세계적인 지휘자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기사를 보면서 그를 한국인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든다. 국적도 한국이 아니며, 지금까지 태어나서 약 6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자란 시기는 8년 밖에 되지 않고 그래서 한국어도 익숙치 않은, 어쩌면 문화나 모든 면이 한국보다는 다른 것에 익숙할 것 같은 그가, 우리가 생각하는 '한국인'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예전에 골프선수 미셸 위를 한국 어떤 한국 언론에서는 '위성미'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 사람들은 국적이나 문화적으로 한국과는 먼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국적만 가지고 따질 수야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국적과 문화적 동질성은 따져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가 '한국인'이라 할 때 '한국인'이란 무엇일까?
# 2. 기사 중간에 정명훈 지휘가 이런 말을 한다.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서는 날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가 없었다.” 비슷한 말을 피아노의 여제라 불리우는 마르타 아르헤치도 했다. 그녀는 혼자 무대에 서면 너무나 외로워서 미칠것 같아 독주회는 가지지 않겠다고 한적이 있다. 혼자는 외로운 법이다.
# 3. 정명훈 지휘자의 국제적인 명성과 지휘자로서의 전환점이 된 사건은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와의 만남이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잘 난 놈은 없는 것 같다. 날 알아주는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해 나가는게 인간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만남은 그 옛날 정명훈과 줄리니의 만남에 비견될 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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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11.2.10 정명훈 … 연말 공연 표가 벌써 동났다
올해 12월 3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이 연주된다. 지휘자 정명훈과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 공연이다. 티켓을 구할 수 있을까? 아쉽지만 늦었다. 이미 매진됐다. ‘합창’ 교향곡은 정명훈이 서울시향과 함께 2006년 말 시작한 고정 프로그램이다. 지난해 12월 22일 공연 티켓은 9개월 전인 3월 매진됐다. 티켓이 동나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매년 같은 곡을 연주하는데,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많은 교향악단이 ‘합창’ 교향곡을 연말에 연주한다. 그중에서도 서울시향과 정명훈의 공연은 ‘필청(必聽)’으로 꼽힌다.
‘합창’ 교향곡 내용을 모르는 청중은 있어도 정명훈의 이름을 못 들어본 사람은 없을 법하다. 대중에게 이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클래식 음악인을 찾긴 힘들다. 종영된 인기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천재 지휘자의 극중 이름이 ‘정명환’이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클래식 음악가에게 인기는 그 자체로 독이 된다. 대중이 많이 알수록 심각한 예술과는 멀어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정명훈은 여기에 강력한 방어막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부터 이끌었던 오케스트라, 함께 앨범을 낸 연주자들의 이름이 상당하다. 미국 LA필하모닉,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 등 동료들이 단연 세계 톱이다. 정명훈은 어떻게 인기와 무게를 동시에 가지게 됐을까.
어머니가 명훈에게 음악을 시킨다고 했다. 누나 명화와 경화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동생이 말이 없고 느렸기 때문이다. 그가 스물한살 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2등을 했다. 4년 뒤에는 지휘봉을 잡았다. 마침내 바스티유 오페라는 사상 최고 연봉을 제시했다. ‘한국에 세계적 오케스트라 하나 만들겠다’. 그의 하나 남은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7세, 데뷔
일곱 살 정명훈은 피아노 의자에 앉으면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그는 당시 서울시 공관(현재 서울특별시의회)에서 서울시향과 협연하며 데뷔했다. 그리고 2년 후 가족과 함께 미국 시애틀로 떠났다.
가족은 시애틀에서 한식당을 열었다. 일곱 남매 중 두 자매(정명화ㆍ경화)는 뉴욕 줄리아드 스쿨에 다녔다. 나머지 다섯은 레스토랑에서 식당ㆍ홀을 돌며 일을 했다. 식당 한 켠엔 피아노가 있었다. “집과 식당이 가까웠어요. 집에 있다 ‘손님이 너무 많다’는 부모님 전화를 받으면 자전거를 타고 식당으로 달려갔죠.”
주방엔 그만의 발 받침대가 있었다. 아직 키가 덜 자란 여섯째 아이는 그 받침대에 올라서서 주방 일을 도왔다. 훗날 요리책도 펴낸 정명훈의 요리에 대한 첫 기억이다. 손님이 빠져나가면 그 받침대를 피아노 앞으로 옮겼다. 식당 안엔 꼬마의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초콜릿과 피아노가 가장 좋았다. 자전거 타고 놀듯, 피아노도 즐기며 쳤다”고 기억한다.
어머니 이원숙씨는 ‘기다리기’의 명수다. 아이들에게 수많은 교육을 시켜본 후 적성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린 시절 정명훈은 춤부터 노래까지 두루 배웠다. 지휘자가 된 후 발레ㆍ오페라 연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유를 알 수 있다.
13세, 결심
아홉 살 위의 누나 정명화(첼리스트)씨는 “어머니가 명훈이에게 음악을 시킨다고 했을 때 나와 경화는 의아해 했다”고 말했다. 두 누나는 감정에 충실하고 생각을 잘 표현하는 편이었다. 반면 정명훈은 말이 없고 느렸다. “내가 언제 한마디라도 할까, 어머니가 내 입만 쳐다보고 있었을 정도”라는 농담도 한다. “나이를 먹고도 만나는 친구, 함께 식사하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고 할 정도로 내성적인 편이다. 무겁고 진중한 남자 아이에게 음악은 맞지 않는 듯 보였을 법하다.
정명화는 “하지만 나중에야 어머니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즉각적인 표현보다 넓게 보고 깊이 파는 데 소질이 있었고, 피아노에서 지휘로 진로를 바꾼 것도 이런 성격 덕에 성공적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정명훈은 요즘에도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했다’는 회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피아노가 아니라 ‘음악’을 하기로 결정했다.
13세 때였다. 시애틀에 살던 그는 로스앤젤레스(LA)로 날아가 주빈 메타를 어렵게 만났다. “쇼팽의 스케르초 2번을 연주했다. 내가 음악을 해도 되겠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긍정적인 답을 얻는다. 메타의 답을 들은 후 뉴욕 줄리아드 스쿨 예비학교를 선택해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한다.
“뉴욕은 충격적이었다. 내 또래 피아니스트들이 완벽하게 훈련돼 있었다. 어린 시절 뛰어 놀며 피아노를 친 내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는 몇 년을 연습실에 틀어박혀 지낸다.
21세, 콩쿠르
빛을 본 때가 1974년이다. 러시아에서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공동 2위에 오른다. 어렵고 배고픈 고국에 날아온 소식이었다. 정명훈의 국적은 미국이었지만, 귀국하는 그를 위해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가 준비됐다. 박정희 대통령 가족은 정명훈 가족을 만찬에 초대했다. 정명훈은 콩쿠르 상금으로 러시아 캐비어를 사 와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콩쿠르 당시 정명훈의 연주를 녹음한 실황 LP는 지금도 희귀 음반으로 꼽힌다. 화려함보다 절제된 표현, 진한 감정이 특징이다. 또 누나들과 함께 한 정트리오 활동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좋은 피아니스트로 입지를 다진다.
정명훈은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서는 날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질 때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요즘에는 독주자로 무대에 서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악기와 함께 연주라도 하는 날이면 종일 무대에서 손을 푸는 그를 만날 수 있다.
25세, 지휘
피아니스트로 성공했지만, 그는 지휘대를 넘보기 시작한다. 75년 매네스 음대 학사 과정을 피아노로 마친 후 줄리아드 스쿨에서 지휘를 공부한다. 처음엔 학생 오케스트라,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꿈을 점점 키워간다.
전환점은 미국 LA에서 시작됐다. 명문 악단인 LA 필하모닉의 부지휘자 선발 오디션에 응모했다. 악단의 상임 지휘자였던 고(故)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는 스물다섯의 정명훈을 부지휘자로 뽑았다. ‘지휘자 정명훈’의 고속 성장은 이때 시작됐다. 이탈리아 태생의 줄리니는 “당신은 타고난 지휘자”라며 피아노와 지휘 사이를 고민하던 그에게 확신을 안겼다. 정명훈의 초기 레코딩 중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가 유독 많은 찬사를 받았던 이유도 줄리니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줄리니가 달아준 날개로 유럽까지 날았다. 이탈리아ㆍ독일ㆍ프랑스를 차례로 섭렵했다. 특히 프랑스의 바스티유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그에게 사상 최대의 연봉을 제시했다. 동양 연주자에게 좀처럼 레이블을 붙여주지 않던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은 정명훈의 앨범을 잇따라 냈다. 정명훈은 생상스ㆍ라벨ㆍ메시앙 등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을 기품 있게 해석, 각종 음반상을 받으며 음반사와 상생 관계를 이어갔다.
서울올림픽 이후 늘어난 국내 문화 행사에선 섭외 1순위로 떠올랐다. 21세에 국제 콩쿠르로 세계 무대에 데뷔해 각종 일류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한국 출신 음악인에 대한 호기심이자 자부심 때문이었다. 정명훈은 런던필, 로열 콘서트헤보, 빈필,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등 세계적 오케스트라ㆍ연주자와 한 무대에 서며 명성을 높였다. 폭발하던 문화적 관심과 맞물려 스타가 탄생한 셈이다.
52세, 서울시향
“언젠가 한국을 위해 일하겠다.” 늘 하던 약속을 지킨 것은 1997년. KBS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를 맡았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각종 불화설이 나오고 5개월 만에 지휘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2005년 서울시향을 맡았다. 이후 이 악단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베토벤ㆍ브람스 시리즈를 통해 국내 관객과의 접점을 꾸준히 늘렸다. 실력 있는 단원을 미국ㆍ유럽에서 영입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지난해엔 유럽 4개국의 음악 축제에 참가하며 서양 음악의 본토에 진출했다. 올해는 한국 교향악단 최초로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음반을 내놓을 예정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세계적 오케스트라가 나오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나머지 인생은 이 목표 아래에서 흘러갈 듯하다.
정명훈이 걸어온 길
-1953년 서울생
-197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 2위
-1975년 미국 매네스 음대 졸업
-1978년 미국 줄리아드 스쿨 졸업
-1978~84년 미국 LA필하모닉 부지휘자
-1984~90년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
-1989~94년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 상임지휘자
-1990년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계약
-1997~2003년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1998년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5개월 만에 퇴임)
-2000년~ 현재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니,
도쿄필하모닉 음악감독ㆍ예술고문
-2005년~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시시콜콜] 요리하는 정명훈
음식은 그의 또 다른 관심, 이탈리아 식당에서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정명훈은 “내 평생의 관심은 둘”이라고 말한다. 물론 첫 번째는 음악이다. 그 다음은 음식이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가 거기에서 공부하고 자랐던 내가 유럽에서 살기로 결심한 것도 음식 때문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이 유럽 작곡가에게서 나왔는데 그들이 먹은 것과 본 것을 나도 느끼고 싶었다”는 것이다.
연주를 끝낸 지휘자는 귀가하는 길에 집에 전화를 한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한번은 집에 오징어가 조금 남았다고 해서 꺼내놓으라고 한 뒤 집에 도착하자마자 파스타를 해먹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이 다 끓기 전에 재료 준비를 마쳐야 하고, 총 요리 시간은 15분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게 원칙이다. 재료는 소박하고 조리는 간단하다. 그는 “독일ㆍ이탈리아ㆍ프랑스에서 다 살아봤지만 얼른 해서 빨리 먹는 이탈리아 요리가 가장 적성에 맞는다”고 한다. 격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작은 식당에 찾아가 수프ㆍ파스타와 메인 요리를 몇 가지 마스터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여덟 명을 위한 식탁’이라는 뜻의 『디너 포 에이트(Dinner for 8)』를 쓰기도 했다. 부인과 세 아들, 그리고 아들의 짝까지 여덟 명을 위해 손수 요리하고 싶다는 꿈이다. 정명훈의 요리에 대한 관심은 정확히 표현하면 “남들을 먹이는 것”이다.
“은퇴한 뒤의 목표도 둘”이라고 한다. 하나는 요리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 다른 하나는 한국어에 숙달하는 것이다. 여덟 살에 미국으로 이민간 후 한국어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휘대에서 내려간 후에도 두 종류의 배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