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 교육과정에는 기후 온난화에 관한 내용이 나와있으며 이와관련된 시험문제도 자주 출제되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들은 '지구 온난화'를 너무 맹목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난 물론 '지구 온난화' 문제를 대부분 받아들이며 그 문제성에 대해 동의하는 편이긴 하지만, 현재와 같은 무비판적인 '지구 온난화론'은 문제가 크다고 보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순수한 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영국의 교육과정 논의는 사실 '정치적'인 싸움인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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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6.14   영국 교과서 `기후변화’ 논란 증폭 

“지구온난화, 과학 아니므로 빼야” 주장에 반발 거세

영국 사회가 아이들의 커리큘럼(교육과정)에 ‘기후 변화’를 넣을 것인가를 놓고 논쟁에 휩싸였다. 이 논쟁은 과연 온실가스에 의한 기후변화가 과학적 사실이냐는 것부터, 정치적 의도를 교육에 개입하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것까지 다양한 쟁점을 담고 있어 영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논쟁을 이끈 사람은 올해 말까지 5~16살 교육 커리큘럼을 재개정하는 작업을 맡은 팀 오츠다. 유럽 최대 시험출제기관 ‘케임브리지 평가’의 연구책임자인 그는 12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동안 커리큘럼이 현재 시사에 발맞춰야 한다고 믿어 왔지만 이제는 가장 핵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며 기후 변화 내용이 커리큘럼에서 빠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의 시사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내용을 교과서에 담아 왔다는 말이다. 기후 변화는 1995년부터 11~14살 아이들의 커리큘럼에 포함돼왔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치 않다. 런던정경대의 기후변화 연구센터장인 밥 와드는 “기후 변화는 과학과 시사 문제를 연결하려는 현재 커리큘럼의 핵심”이라며 “이런 결정이 창조론자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아예 교육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부에서는 기후 변화라는 의제가 진보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는 점에서, 보수정권이 교육과정에서 진보 색채를 빼버리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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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15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현 사회에 대한 많은 시사점이 있는 논쟁이네요.
단순한 <기후 변화>를 교육 커리큘럼에 넣을 것인가 아닌가의 쟁점이
생각할수록 감자 덩이 달려나오듯 줄줄이 이슈가 많군요. 음.

햇빛눈물 2011-06-27 16:26   좋아요 0 | URL
특히, 교육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감자 덩이가 아니라 땅콩 알맹이처럼 줄줄이 땅콩입니다. 답답한 부분이 많죠.
 

"개인 차원의 좋은 시민 되기야말로 전체 차원의 공공성 제고에 핵심적인 요소"라는 박명림 교수의 애기는 현실 사회 문제의 많은 부분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들은 너무나도 '공과 사'를 구분하는 건 아닐까?     

생각난 김에 박명림 교수의 저서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는 얼마전에 나온 책이다. 기억나는 책은 김상봉 교수와 공동으로 지은 <다음 국가를 말하다>가 있다. 예전부터 찜해 놓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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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6.1   공공성, 사회적 영성, 시민성

모든 구성원들이 좀더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짧지 않은 시간 ‘세상읽기’를 써오면서 다룬 문제는 결국 이것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감사드리며 지금 공동체의 모습을 다시 상념해 본다.
지금 우리는 정치와 경제, 교육과 복지, 안보와 평화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말들을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점은 위의 영역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인간에 관계된 문제’이지 인간문제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에 관계된 문제’ 때문에 인간과 인간문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인간에 관계된 문제를 개선하려 논의하는 궁극적 이유는 바로 인간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모든 선택과 언설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위하려는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모든 이념과 권력은 다만 인간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회주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20년을 경과하며 오늘날 인간과 사회문제의 핵심가치로 공공성의 원리가 분출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국가전체주의와 폭력성, 신자유주의의 시장전체주의와 사사성을 모두 넘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지금 공공성의 해일 같은 붕괴에 직면했다. 철저히 무너진 공공성을 누가 언제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대한민국 초유의 가공할 최고경영자(CEO) 대통령 담론이 공화국을 장악하고, 최소 시민자격조차 결여된 사람들이 국가 고위공직에 대표시민으로 계속 임명되더니, 끝내는 국가 공공성 수호의 보루인 감독·감사·검찰·공정·사정 기구 자체가 전면적으로 부패·도괴하고 있다. 검찰·금융감독·시장감시·감사·민정·공정거래 관련 기구들의 공적 윤리의 붕괴와 사사화는 우리가 과연 최저 공공성이라도 갖춘 민주공화국에서 살고 있는지 묻게 한다. 필자가 오랫동안 공공 감독기구들을, 삼권분립을 넘은 제4부로서, 감독부로 독립시켜 의회와 국민의 통제 아래 두자고 주장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국가 고위공직 선출과 임명에서 공적 시민자격의 붕괴와 국가 공공기구들의 공공성 해체가 지진과도 같은데, 시민자격조차 결여된 장관들 밑에서 누가 공공성을 지키고, 누가 공직을 공적 헌신으로 삼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개인 차원의 시민성이 공동체 차원에서는 공공성의 필수요소임을 알게 된다. 아버지로서 직장인으로서 좋은 인간은, 가공할 부패와 비리 사례들에서 보듯, 얼마든지 나쁜 시민일 수 있다. 즉 개인 차원의 좋은 시민 되기야말로 전체 차원의 공공성 제고에 핵심적인 요소인 것이다.

반면 공공성 제고는 개인성의 보장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가 육아·복지·의료·교육 부문에서 예산배분을 포함한 사회적 공공성의 제고를 주장하는 이유는, 그를 통해 높아질 개별 삶의 안정성, 평안성, 복지성, 예측가능성 때문이다. 공공성은 개인 삶의 질 문제인 것이다. 즉 공공성의 목적은 개인성인 것이다. 결국 개별적 시민성이 전체 공동체의 공공성으로 연결되고, 공동체 공공성의 제고는 개인 삶의 질을 높여준다. 때문에 공공성과 개인성, 공공과 사사는 분리 불가능하며, 모든 인간에게 그것들은 시민성을 고리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공적 삶과 사적 삶에 대한 인류 최초의 고민을 열었던 소크라테스로부터 20세기 세계와 한국의 최대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와 함석헌이 한목소리로 한 개인에게 공사는 분리 불가능하며, 그것이 통합된 삶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고 강조한 연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들 삶의 본원적 가치의 회복을 위해 공동체를 바르게 사랑하는 사회적 영성, 즉 깨어있는 시민성을 갖춘 영혼이 되자. 

박명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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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6.2   세븐 서밋  

1985년 미국의 사업가 딕 배스는 7대륙 최고봉을 다 올랐다.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으로 돈을 번 그는 50대에 접어들면서 남들이 무모하다고 말린 도전에 나선다. 그는 56살에 네 번째 도전 끝에 에베레스트 정상을 마지막으로 올라 첫 완등 기록을 세웠다. 아마추어 등산가의 감동적인 도전 과정은 산악인이자 작가인 릭 리지웨이의 <세븐 서밋>으로 조명을 받았다. 국내에도 <불가능한 꿈은 없다>는 번역서로 소개돼 산악인들의 로망을 불러일으켰다. 죽을 고비와 좌절을 숱하게 겪은 배스는 “쉬운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비로소 성장한다”는 산상수훈을 남겼다.   

 

7대륙 최고봉은 아시아 대륙의 에베레스트, 유럽 대륙의 엘브루스, 북미의 매킨리, 남미의 아콩카과,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남극의 빈슨 매시프, 오세아니아의 카르스턴즈(또는 코지어스코) 등이다. 물론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가 다른 곳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요구한다. 다음으로 매킨리(6194m)가 북극권 빙하지대에 있어 7000m 이상의 고봉만큼 어렵다고 한다. 4897m의 빈슨 매시프는 접근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블리자드와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어 등정이 힘들다고 한다. 남극대륙 정상은 손에 잡힐 듯하지만 가도 가도 좁혀지지 않았다고 배스는 기록했다. 대기가 오염이 없고 투명해 거리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영국의 16살 소년 조지 앳킨슨이 에베레스트를 올라 7대륙 최고봉 최연소 등정을 기록했다. 70살에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지난해 74살에 킬리만자로까지 마친 일본의 아라야마 다카오가 최연장이다. 전문 산악인과 아마추어 등산가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불굴의 도전정신이라는 찬사와 함께 정복이라는 미망으로 세계 최고봉 등정이 상업화·이벤트화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ps : 요즘 학생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벌써 포기한 애들이 많은걸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수능까지 5개월 정도의 시기가 남았다. 사실, 공부한다고 성적이 오를수 있는 기간은 아니다. 사실. 그러나 어떻게 마음 먹으냐 따라 앞으로의 5개월이 인생에서 큰 '살'이 될 수 있는 반면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포기하는 포기하려는 학생들에게 딕 배스의 “쉬운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어려운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비로소 성장한다”는 말은 큰 깨우침을 주는 말 같다. 오늘 종례시간에 애기해줘야 겠다. ㅋㅋ 

ps 2 : 예전에 눈여겨 봤던 책이다. <에베레스트의 진실> 산행의 본질을 잊어버린채 지나친 상업화로 인한 현실의 비극을 다룬 내용이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를까? 이것에 대한 답이, 정복 또는 '산이 거기에 있기'때문이라는 답들이 지나친 산행의 상업화를 불러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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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메모지에 끄적거린 글을 이제서야 옮겨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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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19 10:37   경복궁 어느 건물 마루에 걸터앉아

냄새, 향기, 향, 체취 ...


난 개인적으로 냄새(후각)에 민감한 편이다. 버스에서, 전철에서 길거리에서 나의 코를 자극하는 그 무엇들이 많다.

여자의 향수, 고깃집의 누린내, 담배 냄새, 땀 냄새 등. 때론 즐겁기도 하고 불쾌해지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냄새에 의해서.

하지만 다양한 냄새 중에서 유쾌, 불쾌의 이분법적 구분에 들어가지 않는 냄새도 있다. 나를 차분하게 때론 상념에 젖게 만드는 향기들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나무 냄새다.

오늘은 3학년 졸업사진을 촬영하러 경복궁에 왔다. 학교 근처라 매번 지나는 곳이고 몇 번 와 본 곳이지만, 오늘처럼 마루에 걸터 앉아 느긋하게 펜을 든건 처음이다.

아이들 촬영이  끝나고(모이는데 2시간, 사진 촬영하는데 1시간이다. ㅋㅋ) 산책이 하고 싶어 경복궁 안을 혼자 여기저기 지나다, 사람이 좀 없는 곳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내가 편히 앉을 수 있는 곳에서 최대한 편한 자세를 취한다. 편하게 앉아 있으니 마루의 나무들에서 향이 스물스물 나와 나의 코로 들어온다. 말 그대로 '향'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 '향'에서 내소사가 내 고향 집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단순히 기분 좋은 냄새는 아니다. 그 보다 더 심원적인 느낌의 무엇인가가 느껴진다. 나를 편안하고 차분해지게 만드는,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거 같다. 예전 고향 집 마루에서 외가집 마루에서 지금처럼 마루에 앉아 있던 적이 있었다. 그 어린나이에 그랬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무언가 생각할게 많았었나보다.

그 10대 시절 나의 코 점막에 새겨진 향이 지금도 남아 30대인 현재의 나에게 그 시절의 기억을 살려주는 것일까? 어찌보면 시각, 촉각보다도 사람의 후각은 인간에게 더 원초적이며 실존적인 감각기관이 아닐까?

초등학교 저학년때 엄마가 잠시 존재하지 않았던(지금 생각해보면 '상실의 아픔', '사라짐'이란 걸 그때 처음으로 자각한거 같다.)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 나에게 엄마를 느끼고 '상실의 아픔'을 참을 수 있게 해준 유일한 수단은 엄마의 사진이 아닌 엄마의 '옷'이었다. 아니 그 옷에 남아있는 엄마의 '체취'였다. 어두운 방 구석에서 엄마의 옷에 코를 대고 엄마의 체취에 취해 있던 기억이 있다.

대단하다. 그 '냄새'가. 한 인간의 부재를 한 공간의 느낌, 순간의 장면을 기억하게끔 해주니 말이다. 이건 단순한 기억이라기 보다는 머리속에 박힌, 새겨진 무엇인것 같다. 누구나 몇개의 '냄새 조각'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조각들을 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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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다. 계속 시가 읽고 싶은, 시에 관심이 가는 때다. 내가 자주 찾아가는 양철댁님의 블로그에 오랜만에 들렀다. 시들이 많이 보였다. 역시. 나에겐 요즘 시가 '대세'다!!  

시집 제목도 희한하다. <5679는 나를 불안케 한다>이다, 5678도 아니다. 5679다. 그래서 불안한가. 그 중 한개의 시다. "헐거워짐에 대하여"  

우리들은 흔히 인간관계에 대해 애기할때 '난 저 사람과 안 맞아"라거나 "난 저 사람과 정말 잘 맞아"라는 말을 한다. 뭐가 맞는다는 건지 잘 모르지만, 나도 이런 애기를 잘 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맞음'과 맞지 '않'음에 대한 구분도 확실하게 의사표현하는 축에 속한다. 이런 나의 성격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박상천 시인의 이 시를 읽는 순가. "아...."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온다. "그건 아니었어"라고. 이제 나도 좀 '헐거워'저야 겠다. 그럴때가 된것 같다.
 
역시 나에겐 요즘 시가 '대세'인게 확실하다. 

 


헐거워짐에 대하여  

                                     박상천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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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6-04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 스스로를 따 시키는 '스따'의 경향이 농후해요.
전 '감당할만한 거리'도 좋았어요.^^

햇빛눈물 2011-06-14 11:17   좋아요 0 | URL
저도 제 스스로 주위와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죠. 근데 이게 다분히 제 기준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요. 거리를 가깝게 할때는 확...멀때는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