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읽으며 메모를 열심히 한 기사이다. 나와 관련이 많은 문제거리기에 관심이 많이 간다. 꼼꼼히 읽어보고 내 생각을 기사 내용 중간에 첨가한다. 메모하며 읽은 후의 느낌은 난 '회색분자'같다는 생각이다. ㅋㅋ  

ps : 사실 체벌은 소수의 교사가 다수의 대상 즉 학생들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런 체벌이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의해 현재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내의 상황은 체벌을 용인해주던 때와 바뀐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답은 간단하다. 학급당 학생수가 15명 정도라면 체벌,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체벌하는 교사들은 처벌해도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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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9.17  간접체벌 허용해야 하나? 

지난 14일 교육과학기술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수업 중 영상통화를 한 학생에게 5초간 엎드려뻗쳐를 시켜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한 교사에 대해 징계 취소를 결정했다. 지난 3월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간접체벌을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한 데 따른 것이다. 이는 간접체벌을 포함한 일체 체벌을 금지시킨 경기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와 배치되는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개정된 시행령이 간접체벌을 허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해석부터 엇갈린다. 찬반양론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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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대신 오리걸음, 빵 대신 과자?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와 서울시교육청의 체벌금지 이후 간접체벌 허용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지난 3월18일 개정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31조 8항은 “학교의 장은 지도를 할 때 학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하되, 도구·신체 등을 이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아니된다”고 정했다. 즉,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어디에서도 간접체벌을 허용한다는 의미의 구절은 없다. 그럼에도 “신체에 타격을 하지 않는 이른바 ‘기합’은 폭력이라고 할 수 없지 않으냐, 그마저 없다면 학교 내의 문제행동을 어떻게 제지할 것이냐” 등의 논리로 간접체벌이 부활할 기세다.

이것은 ‘체벌금지’의 의미를 잘못 읽은 것이다. 체벌금지는 체벌을 ‘사랑의 매’가 아니라 ‘폭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체벌=폭력으로 보는 관점도 체벌이 문제인 것 만큼 문제라고 생각한다. 때론 체벌이 폭력으로 변질된 경우도 있지만, 그건 폭력이지 체벌은 아니다.) 물리력이나 힘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형태는 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체벌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신체적 고통을 주느냐가 아니라, 학생들이 신체적 고통을 느껴 교사의 지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강제적 상황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다. 마치 사법체계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확실히 체벌은 그 어떤 벌보다도 문제행동을 즉각적으로 수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문제행동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고 내면화한 것이 아니라 당장 신체적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 그 행동을 멈췄을 뿐이기 때문에 잘못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효과를 거두려면 체벌의 강도도 점점 세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간접체벌도 마찬가지이다. 수업 시간에 떠들어서 수업 분위기를 방해하는 학생의 경우 그 문제행동의 원인은 여러가지일 수 있다. 선행학습을 해서 수업에 흥미가 없을 수도 있고, 학습부진이 누적돼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정서적인 문제나 가정불화로 인해 공부에 집중할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문제행동을 만드는 원인과 구조에 대한 분석 없이 ‘문제행동’만을 문제삼을 경우 그 문제행동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간접체벌 역시 이러한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백번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문제 학생들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과 구조에 대한 분석'을 얼마나 어느정도 수준에서 개개인 교사들이 그 수많은 학생들에 대해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교사이기때문에 학생들의 문제에 대해 교육적인 마인드로 접근을 해야하는 건 자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모든 문제에 대해 어떤 분석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만 한느 건 아니라고 본다.)

‘교육적 벌’은 문제행동의 원인과 구조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벌이라는 형태이지만 내용적으로 어떨 때는 학습부진을 보충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심리치료의 과정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문제행동의 원인 제거나 문제 해결과 관계없는 모든 벌은 ‘교육적 벌’로서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간접체벌 찬성론자들은 체벌금지로 인한 ‘학교 붕괴’를 이야기하고 ‘교권 실추’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학교가 붕괴되고 교권이 실추되는 이유는 체벌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배움’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 공간에서 ‘배움’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게 했던 체벌이 오히려 문제를 은폐하고 해결할 시간을 놓치게 하여 아이들을 학교로부터 빼앗아갔던 것은 아닐까?

‘체벌금지’는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한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문제행동을 억지하여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문제행동이 일어나는 구조(극심한 입시경쟁과 사회 양극화, 학교 내 상담 및 복지 시스템의 부재)가 개선되도록 학생들과 소통해야 한다. -(거시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며 정치적 행동을 때론 해야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사 공무원의 정치적 행동도 제한적인 현실. 그리고 체벌이 교사들의 소통능력 부재로만 발생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경험으로 소통을 하려하다 발생하는 웃지 못 할 경우도 많다.)

간접체벌 논란은 여전히 체벌의 형태와 정도에 대한 논란을 반복할 뿐이다. 이것은 봉건제 철폐 요구를 “빵을 달라”는 말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민중들에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신체적 고통을 대가로 강압적인 지시를 따르게 하여 그 순간 문제를 은폐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는 외침에 대해 ‘다른 형태의 고통이면 어떠니? 고통을 줄여주면 되겠니?’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학생인권으로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는 우리 교육은 어떤 역사를 쓰게 될 것인가?

조영선 서울 경인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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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라는 작은 사회에도 질서가 필요

지난해 체벌 논란이 한창이던 때 많은 나라의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두 가지 이유로 놀란 바 있다. 첫째, 미국·영국·프랑스 방송에 이르기까지 인터뷰에 응하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나라의 체벌 찬반 논쟁이 나라 밖 ‘월드뉴스’가 되었다는 사실이었고, 둘째, 자세히 설명해도 간접체벌을 이해시키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특히 프랑스 기자들은 교사가 문제 행동 학생들을 신체나 도구를 이용해 체벌할 수 없으나, 수업을 방해하고 여타 학생의 수업권을 침해하는 학생을 교사가 즉각 제지하고 교육적인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하며, 프랑스도 그러한 권한을 교사에게 부여하고 있는데 왜 그마저 못하게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체벌 전면금지를 규정한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이후 교실 붕괴, 교권 추락 현상은 암담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주광덕 한나라당 의원이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제출받은 1학기 학생징계대장을 기준으로 교권침해 현황을 살펴보면 총 1795건 중 교사에 대한 폭언·욕설이 1010건으로 가장 많고, 수업진행 방해 506건, 교사 성희롱 40건, 교사 폭행 30건 순이다. 또한 이상민 자유선진당 의원이 교과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일부 시·도교육청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거나 논의를 시작한 지난해 총 523건의 교권침해 사례가 발생해 지난 5년간 발생한 총 1065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학교 상황이 이러한데 서울·경기 교육감과 일부에서는 이를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부 문제 행동 학생들이 수업을 방해하고 교칙을 어겨도 학교와 교사는 자신을 벌할 수 없다는 해방감과 그러한 학생들을 실효적으로 제지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는 교사들의 무력감이 함께 나타나는 데 근본 원인이 있다. 이제 학생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만을 내세워 ‘교육벌’을 마냥 부정할 것이 아니라, 신체와 도구를 이용한 직접체벌은 금지하되, 수업을 방해하고 교사의 정당한 지도를 거부하는 학생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교육벌을 내릴 권한을 교사에게 부여하는 것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된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학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교사들의 '무력감'이다. 연배가 있는 교사일수록 더욱 심하다. '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하면 할 수록 자신만 힘들 뿐이며 변하는 건 없다.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ㅇ 관점이 이렇다 '학생인권'과 교사의 '교육권'을 상호배치된다.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소수의 교사와 다수의 학생들이 함께 배우는 작은 사회라는 점에서 상과 벌을 통해 질서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에게 시를 읽어주라’는 제안에 대해 교사들은 학교 현실을 외면한 낭만적 허구라고 냉소를 보낸 바 있다. 음주와 흡연이 의심되는 학생에게 측정기를 사용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학생에게 천을 덧대주라는 대안에는 파안대소하기까지 했다. 벌점을 주면 ‘교원평가점수 깎겠다’ 하고, 수업 중 떠들어 ‘조용히 하라’ 하면 ‘싫은데요’라고 하는 현실에서 교사는 제대로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 오죽하면 ‘교육감이 1주일, 아니 하루만 학교에서 수업해봐라’라는 교사들의 하소연이 나오겠는가? -(진짜로 이런 학생도 있다. 농담이 아니다. 진보, 보수가 문제가 아니다. 행정가들의 현실감각이 너무  떨어진다. 너무...그러니 '니가 와서 하루만 담임해봐'라는 넉두리를 늘어놓는 것이다.) 

경기도 어느 중학교 여교사로부터 “수업마다 대놓고 욕을 하는 학생이 있는 반에 들어가면서 ‘오늘은 아무런 일이 없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눈물의 편지를 받은 바 있다. 교육벌을 부정하는 일부 교육감들은 이러한 교실 실태가 단지 이 여교사에 국한된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솔직히 인정하고, 교사에게 최소한의 정당한 학생지도권과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간접체벌은 이미 상위 법령인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허용되었다는 점에서 하위 법령인 조례나 교육감 지침으로 이를 제한할 경우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라는 법치의 근간이 흔들리는 우마저 범하게 된다. 현장의 어려움을 모르쇠로 일관할수록 교실 붕괴, 교권 추락 현상은 점차 심화되고, 이렇듯 무너진 학교 질서를 점차 피부로 느끼는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왜 이 지경이 되도록 학교를 방치했는가?’라는 호된 질책이 교육벌을 허용치 않는 교육감에게 쏟아질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소중한 학생의 인권은 단지 맹목적 방치만으로 보호되지 않는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 교사가 교육적 훈계와 교육벌-(교육벌까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이것은 좀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훈계'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학생들은 자신의 잘못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에게 싫은 소리하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부모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그런 소리를 듣지 않은 아이들이 교사가 한다고 듣겠나. 단순히 외형적으로 보이는 학생에 대한 말과 행동으로 학생의 인권을 판단하면 더 큰 학생들의 잠재력과 미래를 저당 잡힐 수 있다.) 통해 바로잡아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학생의 권리 보호일 것이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 연합회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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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있는 기사를 보고 알게된 소설이다. 사실 기사의 시작은 딕의 <높은 성의 사내>를 애기하고자 한 듯 하나 내용의 대부분을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에 더 많이 할애하고 있다. 관심가지고 있었는데 며칠전 신촌의 숨어있는 책에 갔다 책이 있어 얼른 구입했다.(한권에 2000원에 구입했다.ㅋㅋ 90년대 나온 책이라 표지는 현재의 멋없는 허연 표지가 아닌 복거일씨 사진 옆에 있는 그림표지의 책이다. 화가가 누군지는 까먹었다.)

    

 

한겨레신문 2011.9.17  미국이 2차대전서 패한 뒤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면… 

승·패전국이 뒤바뀐 가정법
‘대체된 역사’에 맞서는 주인공
‘소설속의 소설이 된 현실’ 구성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의 원형

미국의 에스에프 작가 필립 케이 딕(1928~1982·사진)은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할리우드 영화의 원작자로 명성이 높다. 2013년까지 그의 대표 장편 열두 권을 완간한다는 목표로 출범한 폴라북스의 ‘필립 케이 딕 걸작선’이 그 네 번째 주자로 1963년 휴고상 수상작 <높은 성의 사내>를 내놓았다. 국내에서는 2001년에 한 차례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높은 성의 사내>는 2차대전에서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이 아니라 독일·일본·이탈리아 추축국이 승리했다는 가정 아래 전개된다. 소설 속 현재인 1962년의 미국은 독일이 지배하는 동부 로키산맥연방과 일본이 지배하는 서부 태평양연안연방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른바 ‘대체역사소설’이다. 미래와 외계를 주된 영토로 삼던 에스에프 장르가 상상력의 물꼬를 반대 방향으로 튼 것이 대체역사소설이다. 한국에서는 복거일의 등단작 <비명을 찾아서>(1987)가 이 장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비명을 찾아서>의 앞부분에서 작가가 <높은 성의 사내>를 다른 몇 편의 대체역사소설과 함께 언급하고는 있지만, 실제로 이 작품을 읽어 보면 두 소설 사이의 유사성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우선,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각각 미국과 조선을 식민 지배하고 있다는 설정부터가 동일하다. <높은 성의 사내>의 주인공인 미국인 로버트 칠던은 <비명을 찾아서>의 조선인 주인공 박영세(기노시다 히데요)에 해당한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제 나라를 일본이 지배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듯 보이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런 상황이 부당하다는 자각에 이르고 어떤 식으로든 그 현실에 맞서는 쪽으로 나아간다.

“나는 앞으로는 조선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조선인을 대변하는 시를 쓰려고 해.”

“이걸 만든 사람들은 미국의 자랑스러운 예술가들입니다. 나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싸구려 부적에 관한 제안은 우리에 대한 모욕입니다. 사과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의 인용문은 기업체 과장이자 시인이기도 한 박영세가 직장 동료인 일본인 여성 시마즈 도키에한테 하는 말이고, 뒤엣것은 칠던이 일본인 가소우라에게 하는 말이다. 주로 일본인 고객을 상대로 미국의 골동품과 공예품을 파는 것이 칠던의 직업인바, 미국의 예술적 수공예품을 기계를 이용해 대규모로 찍어내 팔라는 가소우라의 제안이 그에게는 모욕으로 다가온 것이다. 박영세가 일본인 장교를 살해하고 조선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는 데 비해 칠던은 이렇다 할 적극 행동에 나서지는 않지만, 적어도 식민 현실에 대한 회의와 저항이라는 점에서 두 주인공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  

두 소설의 더 크고 근본적인 유사성은 따로 있다. 복거일의 작품에서 박영세가 조선인으로서의 각성에 이르는 계기는 한 권의 책이 제공한다. 지은이가 밝혀지지 않은 <도우꾜우, 쇼우와 61년의 겨울>이라는 소설이 그것이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배하고 조선은 그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등 우리가 아는 실제의 역사가 이 책의 기둥 줄거리를 이룬다. <높은 성의 사내>에도 한 권의 소설이 등장한다. 호손 아벤젠이라는 작가가 쓴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라는 작품이다(아벤젠이 높은 성채와 같은 요새에 숨어 산다는 데에서 소설 제목이 비롯됐다). 이 소설 속 소설 역시 2차대전에서 추축국이 아닌 연합국이 승리했다는 ‘가정’을 담고 있다.

“라이스가 화나는 건 이 부분이었다. 아벤젠이 쓴 책에 묘사된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 히틀러와 나치당, 독일의 패배와 파멸. 그 모든 것이 왠지 더 웅장한데다 현존하는 실제 세계, 그러니까 독일이 패권을 차지한 지금 상황보다 옛 정신과 더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샌프란시스코 주재 독일 영사 후로 라이스의 독후감이 잘 보여주듯이, 이 소설 속 소설의 역할은 ‘가능할 수도 있었던 현실’을 상기시키는 데에 있다. 복거일의 소설에서 <도우꾜우, 쇼우와 61년의 겨울>이 박영세에게 그랬듯이, 딕의 소설에서 <메뚜기는 무겁게 짓누른다>는 칠던과 라이스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에게 지금과는 다른 현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다른 주요 등장인물 줄리아나가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해 말한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 놓인다.

<높은 성의 사내>는 딕의 소설을 원작 삼은 영화들만큼 충격을 주거나 흥미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복거일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원형’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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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샵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손에 잡힌 책이다. 우선 제목이 너무 맘에 들었다. '그늘'. 일본 문학가라고는 다자이 오사무 정도만 알고 있는 나에게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생소했다. 책은 준이치로의 대표적 산문 여섯편이 실려있다. 책의 제목인 '그늘에 대하여'는 그 중 한편일 뿐 책의 전체적인 내용과는 무관하다.

책의 디자인이 너무 좋다. 손가락에 닿는 거친 책의 표면의 느낌도 아주 매혹적이다. 표지의 연꽃그림도...디자인 뿐만 아니라 책의 내용 구성도 상당히 알차다. 책의 얼개는 이렇다.

일본 전통문화와 근대문학에 대한 성찰과 남녀관계에 대한 철학을 담은 '연애와 색정', 화장실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문학작품의 효시격인 '뒷간', 이 밖에 '게으름은 말한다', '손님을 싫어함', '여행' 등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화들을 예리한 관찰력으로 묘사한 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참고로 난 '연애와 색정'부터 읽었다. 제목과는 다르게 자극적이지 않고 상당히 심오한 통찰력을 볼 수 있는 글이다.

     

   

책이 집에 있어 나중에 책의 주요 줄 친 부분을 정리해야 겠다. 

ps : 준이치로의 책들을 찾아보니 대표작인 <치인의 사랑>과 <세설>이 눈에 띈다. <치인의 사랑>은 현재 절판이라 구할 수 없을 듯 하고 <세설>을 먼저 구입해야 겠다. 블로그 글들을 찾아 읽어보니 동양의 오만과 편견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표지 그림이 다분히 일본스러워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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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칼럼 페이지에 보면 오늘의 트위트가 있다. 거기에 아주 섬뜩한 글이 있어 옮겨본다. 섬뜩하다 못해 절망적이다.

김경찬 피디 @PDtheripper

최근 들은 섬뜩한 실화. 교육에 목숨 건 엄마는 학원가를 주름 잡았고 아들을 다그쳐 명문대 의대에 보냈다. 아들은 엄마의 뜻대로 의사가 됐다. 그런데 아들 손전화에 저장된 엄마의 명칭은 '미친년'. 성공의 유산은 증오였다. 믿고 싶지 않은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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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21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상하게 동하지 않아서 신문을 쌓아놓았더니
이런 칼럼이 있었군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저 한숨이~

햇빛눈물 2011-09-27 10:33   좋아요 0 | URL
저도 한숨이 나오더군요. 학생들에게 애기를 했더니 충격적이라고 반응하는 학생들도 있고 나름 이해를 하며 그럴수 있다라고 애기하는 학생도 있더군요. 그들 입장에서는 나름 또다른 할 애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한동안 읽었던 책이다. 읽은 느낌은 우선 저자인 헤르베르트 하프너가 상당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푸르트벵글러가 과연 '나치'인가 아닌가에 대한 어찌보면 가장 합리적인 답을 해놓았다는 것이다.  

푸르트벵글러는 독일민족을 사랑하며 그들의 문화에 자부심이 강하며 그래서 나치에 이용당한 순진한 민족주의자같다는 생각이다. 여러가지 정치적문제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남아있는 그의 수많은 음반이 음반사에 중요한 유산인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아울러 같이 읽고 있는 자클린느 뒤 프레에 관한 책이다. 동시에 읽기 시작했는데 푸옹의 내용에 흥미를 느끼면서 한동안 읽지 못했다 내일부터 다시 읽기 시작해야겠다.(천재들의 삶이란 사실 고달픈듯하다. 푸르트벵글러도 자클린느도 사실 삶이 그리 행복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 같다.) 

ps ; 이어서 읽고 싶은 책은 말러에 관한 책 세권과 드보르자크와 차이콥스키 책이다. 노먼 레브레히트의 <왜 말러인가?>도 예전에 좀 읽다가 중단했는데, 다른 책들과 같이 다시 읽어봐야 겠다. 나는 왜 말러의 음악에 빠져들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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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25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햇빛눈물님. 이거 다 읽고 나타나시려면 꽤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

조각조각, 그냥 하루가 자꾸 나눠지고, 온전히 뭔가에 몰두 할 수 없는 현실에 말러의 음악은 참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변화 무쌍하고, 노골적이고, 극과 극으로 흐르는.

푸르트뱅글러와 첼리비다케, 카랴얀. 뒤 프레와 바렌보임. 유명한 일화들이 생각나는데요. 다시 오실때 함께할 풍성한 이야기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햇빛눈물 2011-09-27 10:32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잘지내고 계시죠. 책을 읽어도 정리가 되지 않아 풍성한 이야기가 나올까 걱정입니다. 얼마전 아주 오랜만에 예당에 가 서울시향의 공연을 보고 왔습니다. 공연을 들으며 그냥 느낌을 메모하며 들었는데...얼른 페이퍼를 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