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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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이라는 것을 할 때부터 삶과 죽음은 영원한 화두가 되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천착해왔다면 어쩌면 지금은 삶과 죽음의 그 경계선에서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에 더 관심이 간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우리는 태어났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삶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 그 질문의 해답을 곰곰 생각해보게 되는 소설을 읽었다.

 


우리의 미래를 SF소설에서 예상한다. 더 발전되어가는 시대에서 기술적 발달로 인해 인간보다 더 인간 같은 존재가 우리와 함께 살아갈 거라는 건 예전부터 영화에서, SF소설로 만나왔다. 최근에 읽었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나를 보내지 마를 떠올렸던 소설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인물,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차이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던 소설이었다.


 



 

 

선이에게서 나를 보내지 마의 캐시를 떠올렸고, 민이에게서 클라라와 태양의 클라라를 떠올렸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휴머노이드의 이야기다.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철이가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며 삶과 죽음의 경계,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인간인가 인간이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존재로 삶을 계속할 것인가를 묻는다.

 


철이에게 아빠는 자신을 인간으로 살게 한 사람이다. 인간의 피부를 한 모습으로 문학, 철학 등 다양한 책을 읽고 사고하는 법을 배웠다. 철이가 아빠와 함께 살았던 공간, 휴먼매터스의 공간 밖으로 나오면서 자아를 찾는 과정이 시작된다. 아빠와 산책길에서 주워 온 고양이 두 마리와 고양이 로봇 데카르트와 함께 평범한 삶을 살았다. 죽은 직박구리를 묻어주던 날을 떠올리는 철이였다. 아빠가 산책가는 길에 따라가고 싶었던 철이. 자신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빠가 길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자 우산을 들고 아빠한테 향하던 길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철이가 아빠를 가리킬 때, 대부분은 아빠였다가 언젠가부터는 로 칭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 아빠에게 벗어나 새로운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더이상 자기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 휴먼매터스 제조사에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라는 사실, 아빠와 전처럼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부터였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은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69페이지)


 

인간을 위해 만들었던 로봇이 인간을 공격할 거라는 생각에 혹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 로봇들을 죽이는 세계에 인간이 있었다. 어떤 존재보다 악랄할 수 있는 존재. 자신이 살기 위해 장기이식용 인간을 만들어내질 않나, 곁에서 아이들 혹은 노인들의 심심풀이 놀잇감으로 여겼고 쓸모없다고 여길 때는 창고에 갇혀 있게 만들었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인간과 휴머노이드가 공존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책을 읽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소설의 상황에서 내가 인간이었다면 다른 인간들처럼 휴머노이드를 대할지도 모를 일이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276페이지)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 자아라는 것이 사라진 삶. 그것이 지금 맞이하려는 죽음과 무엇이 다를까? (295페이지)

 


가만히 누워있을 때면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해보면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불멸의 삶을 산다면 젊음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어느 소설에서처럼 가족 관계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깊이 없는 삶, 개인주의적 사회로 변할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깊은 시선과 통찰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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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 20주년 아카이브
정재은 외 지음 / 플레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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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안 간 지 1년이 조금 넘은 거 같다. 코로나 때문에 가지 못했었고, 이제는 영화관에 가는 게 조금 귀찮아졌다.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던 감정도 무디어지는 걸까. 배두나 배우 하면 회자 되는 게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였다. 그래서 궁금했다. 영화 개봉된 지 20주년을 기념해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으로 재개봉을 하고 아카이브 책을 만든다는 게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강렬하고도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영화로 기억되는 그 감정은 어떨까.

 


<고양이를 부탁해> 20주년 아카이브는 그리움을 간직한 사람에게 선물과 같은 책일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사진 자료를 보고는 영화를 찾아보았다. 그 시절 순수했던 스무 살의 청년들을 기리는 영화였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하여 불안함을 갖고 있던 그때로 우리를 안내했다. 스무 살의 우리는 방황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의 우정은 각자의 생활에 바빠 자주 만나지 못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 시절을 견뎌온 스무 살의 우리가 보였다.

 




 

 

태희와 혜주, 지영, 비류와 온조는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친구들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태희는 부모님이 하시는 맥반석 일을 도와주고, 혜주는 증권회사에서 고졸 사원으로, 지영은 다니던 공장이 폐업하는 바람에 밀린 급여도 받지 못하는 상태다. 화교인 일란성 쌍둥이 비류와 온조는 자기들이 만든 액세서리를 좌판에 놓고 판다.

 


고양이를 부탁해,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가족이 외국 여행 갈 때였다. 후배한테 부탁했는데, 심하게 낯을 가리던 녀석이 후배에게 다가가 몸을 부비고 안기고 있었다. 그 영상을 보내주었는데 눈물이 나왔다. 보고 싶은 마음, 안쓰러운 마음이 혼재했다. 영화에서 나온 고양이는 상당히 애교쟁이였다. 주저없이 다가갔고 얌전했다. 물론 그런 장면만을 담았을 것이다. 지영이 할머니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을 때 눈물을 닦아주듯 얼굴을 쓰다듬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각자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내용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있는 지영의 방황, 혜주와 더없이 친했으나 각자가 가진 상황때문에 친구 사이가 조금씩 벌어진 것, 증권 회사에서 미래를 꿈꾸었으나 고졸 사원이 갖는 잔심부름 등 한계에 부딪치는 모습, 혜주는 혜주만의 사정 때문에 방황하고 있었던 거다. 비교적 유복한 보통의 가정에 속해있는 태희의 자유를 향한 방황은 그 시절만의 특권이 아닐까. 다섯 명의 여성에게 일어나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여성들의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 개봉 20주년을 기념해 영화의 스틸컷과 최종 시나리오, 다양한 사람들의 에세이는 이 영화가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했나를 보여주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혜주를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큰 성과다. 혜주의 스무 살 생일에 선물로 주었던 고양이의 의미는 지영의 혜주에 대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양이를 키울 수 없다며 되돌려 받았을 때부터 틈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관에서 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스무 살 여성들의 현재에 더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00년대의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쉽지 않다.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을 우리. 훌훌 어디론가 떠날 태희와 지영의 삶이 기대되는 이유다. 친구 관계도 노력이 필요하다. 관심, 공감과 배려가 없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 말없이 곁에 있어 주고 기다려주는 마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마음을 열 수 있다.

 


한 권의 책이 영화를 좀 더 풍부하게 해주었다. 왜 이 영화를 이제야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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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5-16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벌써 20년전 영화군요.~

Breeze 2022-05-16 17:18   좋아요 1 | URL
20년전에 보신건가요?
저는 이번에 봤습니다. ^^

mini74 2022-05-16 17:24   좋아요 0 | URL
젋었던 시절 ㅎㅎ 친구들과 봤던 기억이 나요. 그땐 참 인기가 없어서 금방 극장에서 내렸던 ㅠㅠ

그레이스 2022-05-20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도 영화도 못 봤어요
찾아봐야겠어요
20년이나 됐나요?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 - 암을 지나며 배운 삶과 사랑의 방식
양선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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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의 차이는 쉽게 드러난다. 어느 한순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드러난다. 다만 사람은 변하는 법이다. 타인의 일로만 알았던 세상에서 비로소 나의 삶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변화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암투병하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 사람의 고통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것이기에 짐작만 할 뿐이다. 내가 아파야 비로소 고통이 피부에 와닿을 것이다. 이 책을 쓴 저자 또한 유방암 진단을 받고부터 삶에 대한 생각과 행복의 비전이 바뀌었다.


 

 

한겨레에서 20년간 기자 생활을 하는 저자는 2019년 처음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암 진단을 받고부터 암을 이겨내고 있는 현재까지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던 투병일지를 엮어 만든 책이다. 실제로 암 환우들의 생각과 생활을 있는 그대로 나타냈다. 항암제 투여의 힘든 과정을 글로 보여주었다.


 

저자의 글에서 특별한 건, 암에 걸렸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암 투병에 관한 책을 읽고, 마음을 치료해줄 책을 읽으면서 가족을 더 사랑하는 법을 터득했다. 기자답게 투병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담아 이후에 암에 걸릴 환우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게 했다. 수술을 앞에 두고 챙겼던 준비물에서부터 8회차에 걸친 항암제 주사를 맞았던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저자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유방 왼쪽 림프절 쪽에 암이 발생했다. 건강 검진 시 초음파에서 발견한 양성 종양 때문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검사를 하고 있다. 계속 자라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나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기에 여러모로 관심을 두고 읽었다.


 

삶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왜 나인지 고민하고 부정 혹은 거부해보고 싶지만, 이미 일어난 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제대로 대처하는 게 맞다. 이번에 책 읽으면서 발견한 건데, 암투병하는 사람들에게 우울감은 상당할 것 같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던 건 독서와 가족의 사랑, 주변에서 도와주는 친구들이었다는 점이다. 친정어머니께서 저자를 간호함과 동시에 어린 자녀들을 챙겨주었고, 남편과 아이들은 자기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해주었다.

 


책에서 느껴지는 저자는 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다. 항암제 주사를 맞을 때 TV 예능 <아는 형님> 등을 켜놓고 깔깔깔 웃으면서 보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두려운 마음에 시도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항암제로 인해 탈모가 되었을 때 필요할 비니나 모자도 세심하게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심리학자는 행복은 (좋은) 관계순이라고 말한다. 암이라는 위기가 없었다면 나는 내가 맺어오던 관계방식을 그대로 유지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현재의 관계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편되겠지만, 이렇게 인생의 어느 길목에 멈춰 서서 한 번쯤 자신의 관계를 탈탈탈 털어 괜찮은 관계인지 성찰해보고 재정비해보는 일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253페이지)


 

아프지 않았다면 모를 관계의 변화다. 심각한 병일수록 내 곁에 남은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 가족 외에 아주 친한 친구만 남아있다. 어쩔 수 없다. 관계의 폭은 좁아지고 더 깊어진다. 관계가 확장되면 소홀할 수밖에 없다. 더 가까워지고 깊은 관계에서 우리는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아파도 계속되는 삶,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진중한 질문이 있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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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고백들 에세이&
이혜미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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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입맛 돋우는 책을 만났다. 말로 하는 요리가 있듯, 글로 하는 요리다. 시인이 쓴 글이기에 요리에 관한 시로 읽힌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식탁 위의 재료들로 자신의 특기인 요리를 한다. 여러 편의 시가 되어 우리를 요리의 세계로, 글의 세계로 이끈다. 시인이기에 가능한 시 같은 요리 때문에 눈이 즐겁고 마음이 즐겁다.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아낸 요리 같습니다.

 


라고 시인은 말했다. 요리하기 좋아하는 시인의 에세이를 읽으며 설명만으로도 너무 예쁜 요리가 사진에 담겨 있지 않으면 어떨까, 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요리보다 멋진 사진으로 오감을 즐겁게 한다. 요리를 해보니, 색감이 곱고 모양이 예쁜 요리가 식욕을 더 자극한다는 것을 안다. 정성으로 만든 음식에서 준비한 사람의 마음이 엿보여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한다.


 



 

 

텃밭에서 나는 재료들을 썩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잊어버린다. 이러저러한 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말이다. 요리하는 사람은 부지런하다. 재바른 손놀림을 가져야 요리도 더 잘하는 것 같다. 여름에 가지가 많이 나와 다 먹지 못하기에 뜨거운 물에 쪄 간장으로 무치거나 버터를 발라 굽고 장아찌를 만들고는 했다. 여러 가지 채소를 동그랗게 잘라 미리 만들어놓은 라구소스를 넣고 구운 라따뚜이는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그리스 전통음식 무사카와 이탈리아식 요리 멜란자네를 만들어봐도 좋겠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때 내놓으면 더 좋겠지. 그림처럼 예쁜 요리를 먹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그려보았다. 텃밭 정원엔 꽃양귀비도 필 것이고, 수국도 조금쯤 꽃망울을 머금고 있지 않을까.


 

작년 겨울 텃밭에 달래를 심었다. 올봄, 가느다랗게 초록색으로 올라온 달래를 조심스럽게 캐고 깨끗이 씻어 잘게 잘라 쌈장도 만들어 먹고, 달걀찜에도 넣고 비빔밥에도 넣었다. 된장과 고추장, 마늘, 깨에 참기름 듬뿍 넣어 잘게 썬 달래를 넣어 상추쌈을 해 먹으면 정말 맛있다. 시인은 달래를 산 날에는 꼭 육회용 고기를 사서 달래를 넣고 육회를 만든다고 한다. 이것 참 맛있겠다. 군침이 확 돈다.


 


 


 

우리는 사라질 계절과 노닌다. 간절과 간절 사이에서, 예감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는 슬픈 안심 속에서. 시간을 자른 단면들에서 투명한 진액들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느닷없이 향의 기억을 얻은 줄도 모르고. (20페이지)

 


외계문명이 보낸 교신탑 같은 당근, 씨앗을 빼기 위해 칼로 그 중심을 나눌 때 눈동자를 찌르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아보카드, 여름의 부름 토마토. 각종 채소의 쓰임을 한 편의 시처럼 표현해도 되는가. 수란을 건져내며 느끼는 위태롭고 안타깝고, 수란이 터지기라도 하며 슬프고 안쓰러운 감정들. 불현듯 수란이 먹고 싶다. 조심히 건져내어 온전히 남은 노른자를 볼 때마다 이혜미 시인의 이 글이 생각날 것 같다.

 


그때여서 가능한 고백들이 있었다. 잎사귀였던 여름의 기억을 간직한 꿈처럼. 페스토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속기록 같다. 슬픔과 기억과 약간의 빛으로 반죽 된 잠시를. (144페이지)


 



 

 

몇 년 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밤 조림에 도전했다. 밤 껍질 까기가 힘들어 툴툴거렸었다. 시럽에 여러 번 졸여 정성을 들였는데도 내가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았다. 냉장고에 얼마간 있다가 버렸는데 이혜미 시인의 마롱글라세를 보고 다시금 도전하고 싶었다. 최소한 일주일, 열흘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 마롱글라세를 만들어 와인 안주로 먹으면 아주 좋을 것 같았다.


 

깨진 커피콩을 골라내 로스팅을 하는 시간, 원두를 분쇄해 커피를 내리는 시간, 향과 함께 커피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그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그림이 그려질 법하다. 창 너른 탁자에 앉아 창밖의 화분들에서 피어난 색색의 제라늄 꽃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음미하는 시간. 찰나일지라도 모두가 사랑하는 시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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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5-12 17: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저 이런 책이라면 껌뻑 죽거든요.^^;;
근데 님도 저 커피 수동분쇄기 사용하시는 군요!!! 잘 갈리나요??
제 건 팔이 너무 아파요.^^;;;

Breeze 2022-05-12 22:17   좋아요 2 | URL
집에서는 전동을 사용하고요, ㅋㅋㅋ
텃밭 세컨하우스에서 1잔 정도는 제가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갈고 있어요.
핸드드립으로 주로 마시는터라 굵게 조절하면 잘 갈리긴 합니다. ^^

파이버 2022-05-13 17: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 색감이 너무 예쁩니다 글과 사진을 함께 보니 배가 고파지네요. 텃밭을 가꾸신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Breeze 2022-05-13 17:17   좋아요 3 | URL
텃밭 제가 가꾸는 건 아니고요, 신랑이 하는 걸 조금 거들 뿐입니다. ㅋㅋㅋ

mini74 2022-06-10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글도 좋았던 글이네요. 축하드립니다 *^^*

서니데이 2022-06-10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파이버 2022-06-15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eeze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٩(๑˃◡˂๑)۶

thkang1001 2022-06-15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eeze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어제의 오렌지
후지오카 요코 지음, 박우주 옮김 / 달로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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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피를 나누었다고 해서 그 관계가 더 돈독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족이 아닌 관계에서 진짜 가족보다 더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 <가족의 탄생>이 먼저 떠오른다. 다르게 보면, 뒤죽박죽인데도 더 낫다. 만날 때마다 싸우는 가족보다 만날 때마다 즐거운 새롭게 만들어가는 가족이 더 낫지 않겠는가.

 


서른세 살의 청년 사사모토 료가. 도쿄에서 직장 다니고 있는 그는 위의 상태가 좋지 않아 내시경 검사를 했다. 조직검사 결과, 암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앞이 깜깜해진 그는 누구한테라도 전화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지쳐 잠들었다가 동생 교헤이에게 전화했다. 오래전 열다섯 살 겨울에 아빠랑 교헤이와 함께 나기 산을 올랐던 기억이 꿈에 나타났다. 그때 료가와 교헤이는 등산 도중 소변을 보러 갔다가 설비를 밟아 추락했다. 위를 올려다보아도 눈이 내리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가 챙겨 준 등산 가방에 비상시에 대비한 침낭과 텐트가 있어 그걸로 하룻밤을 보냈다.

 



 

 

그때 료가와 교헤이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모에게 유서 같은 편지를 남겼다. 그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겼을까. 소설의 결말에 가서야 그 내용이 나타나는데, 료가의 암 투병과 더불어 가족의 관계와 그 소중함을 일깨우는 글이다. 암 투병 시 가족의 존재가 확연히 드러난다. 가족뿐만 아니라 의외의 인물이 곁에서 힘을 내어준다. 이것은 한겨레출판에서 나온 최근에 읽었던 에세이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암 선고는 고통을 수반한다. 착하게 살고 있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자문을 해보지만 이미 암이 선고되었다. 때로는 절망으로 삶을 포기하고 싶다. 곁에서 나를 바라봐주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삶에 희망을 갖게 된다. 살고 싶다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 마음만으로도 질병을 이겨낼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간다는 건, 잡초를 뽑는 일하고 똑같아. 잡초가 모든 정원에 자라나는 것처럼 가정家庭이라는 정원에도 자라나거든. 그래서 엄마는 매일 이렇게 잡초를 뽑는 거야. 가족 모두의 마음에 언제나 깨끗한 정원이 있게끔. (234페이지)


 

료가네 가족은 비밀을 안고 있었다.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차별 없이 대하고 싶었고 또 좋다고 여겼다. 료가도, 교헤이도, 부모도 가족 모두를 사랑했고, 가족이 네 명이어서 얼마나 좋은지 알았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서로를 챙겨주고 보살피는 모습에서 이처럼 서로를 위한다면 이 가족에게 비극은 없으리라 여겼다.

 


실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작가답게 환자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들의 감정을 표현했다. 가족에게 못한 말들을 간호사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환자들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자만이 갖는 감정들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병원은 늘 죽음이 공존하는 장소다. 원하지 않아도 죽음을 접하게 되고, 그 감정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환자와 그 가족들을 지켜보는 의료진들의 노고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나답게 살아온 것이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며, 주위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다. 리모컨 5번 버튼에 난 조그마한 돌기.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 ‘다들 의지했었다는 말은 야다의 빈말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는 분명히 마음 둘 곳이 있었다.

엄마, 나 태어나길 잘한 것 같아.” (336페이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찰나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을 제대로 보아야 느껴지는 건. 그 감정은 전혀 알 수 없다가 어느 순간에 알게 되며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끝까지 버텨주기를 바라는 마음. 곁에 누군가의 온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 우리가 지키고 싶은 소중한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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