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해변의 무무 씨 - 그리고 소설가 조해진의 수요일 다소 시리즈 1
조해진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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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해변의무무씨 #조해진 #다산책방

 



여름밤의 해변을 상상했다.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여름밤, 한낮의 더위를 피해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걷는 연인들의 모습이다. 다정한 위로의 말들을 건네며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거로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해변이 아닌 워시토피아의 통창 안이다. 건조기와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파도 같고, 창가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이 해변처럼 보여 연인들은 이 장소를 해변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바라보는 풍경은 어디쯤일까.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낯익은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는 게 퍽 낭만적으로 보였다. 힘든 일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현재에 만족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여름밤 해변의 무무 씨는 단편 여름밤 해변에서, 우리를 경장편으로 확장하였고, 소설의 뒷면엔 어느 달의 수요일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작가의 소설과 작가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한 편의 소설과 한 사람의 하루를 내세워 다소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다산책방에서 출간된 '다소 작은 사이즈'의 책이다. 다른 책과 달리 PVC로 된 책표지로 가방 한 귀퉁이에서 굴러다녀도 찢어질 염려가 없는 장점이 있다.


 






여름밤 해변의 무무 씨는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먼저 김은희는 50대의 여자로 두 번째 암이 발병하여 요양하고 있다. 무무 씨가 키우던 고양이 양평이와 오모리 때문에 병원에 있는 동안 몇 달간 럭키타운 402호를 빌려주기로 했다. 럭키타운으로 오는 길은 세계의 지도에 있는 듯 가게의 이름이 다양하다. 삿포로와 바빌로체를 걷고 있을 수연 씨를 상상하는 은희는 집으로 초대를 한 그 사람을 기다렸다. 양평이와 오모리를 만날 사람, 자기의 추억이 온전한 곳에 타인을 들인다는 것 자체를 기대하는 듯해 보였다. 은희가 살고 있는 럭키타운 402호는 무무 씨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어 마음껏 그리워해도 문제가 없는 소박한 장소다.



 

동준의 소개로 럭키타운 402호를 알게 된 수연은 24리터의 캐리어 하나를 끌고 402호로 도착했다. 작은 방의 고양이들을 위해 신선한 물과 사료를 주었고,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 배를 드러낸 양평이의 사진을 찍어 은희 씨에게 보냈다. 럭키타운 402호에 머물며 은희 씨의 흔적을 살핀다. 메모장을 열어보고, 붙어 있는 엽서의 그림을 바라보며 은희 씨와 무무 씨의 존재를 알아간다.



 

은희와 수연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방식이다. 서로의 접점인 동준이 속한 연구소의 일원이기도 했던 은희와 수연의 학교 동기인 동준이 간간이 등장한다. 짧은 소설임에도 서로의 마음을 무람없이 드러내는 은희와 수연 때문에 럭키타운 402호를 가기 위한 거리를 세계 지도를 그려놓은 듯한 풍경 묘사에 동화되었던 것 같다. 워시토피아의 창가에 앉아 통창 밖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행자처럼 보였을 풍경이 어딘가 세계의 어느 한 곳에 있는 듯했다. 어깨를 마주 댄 채 창밖을 바라보는 쓸쓸하고도 다정한 연인들을 그렸다.

 



상무라는 이름이 직급으로 오인될까 봐 무무로 불러달라던 무무 씨는 이제 세상에 없다. 회사의 바쁜 업무에 치여 3~4일쯤 연락을 하지 않다가 찾아갔을 때 차갑게 식은 무무 씨를 발견한 은희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겠나. 마지막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은희의 마음은 무무 씨와 함께했던 여름밤의 해변으로 가지 않았을까.



 

전혀 알지 못했던 두 여성이 서로 통화를 하고, 고양이의 안부를 전하는 여성의 연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타인의 삶에 위로를 건네기는 얼마나 힘든가. 하지만 반려동물을 돌보는 이야기를 하며 공통의 화제가 생겨 공감과 위로를 받게 된다. 무무 씨와 은희가 해변이라 부르는 장소는 이들의 접점이 될 것이다. 눈빛을 나누며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마음이 전해졌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타인과 교류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게 된다.

 



아무래도 작가는 보통의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외국의 지역명을 입힌 가게 이름을 두고 어느 나라의 거리를 걷는 것처럼 묘사했고, 워시토피아의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해변에 비유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름의 더운 바람이 그리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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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첫 단편집이 출간된 이후 평단의 찬사를 받은 클레어 키건은 이후 출간된 작품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데뷔작 이후 27년이 지났지만 출간된 작품은 모두 다섯 권. 그 모두를 다산책방에서 출간했다. 다섯 번째 출간된 작품이 바로 데뷔작 남극이다.

 



표제작이기도 한 남극10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출간된 작품이자 남자와 여자의 관계 혹은 차별을 말한 너무 늦은 시간에 수록된 작품이기도 하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라는 다분히 역설적인 문장에서 이후에 일어날 일과 여자의 지위 혹은 차별을 예상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차려입고 바에서 술을 시키는 여자를 상상해본다. 한 남자가 다가올 것이고 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낼 것이다. 남편과 아이들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짜릿한 밤을 상상한다. 이후에 집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법.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 가늠할 수 없다. 여자는 자신이 상상했던 최악의 지옥을 경험한다. 눈과 얼음과 죽은 탐험가들의 시체가 있는 남극. 영원한 지옥을.

 



열다섯 편의 단편은 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현재의 불합리함과 차별에 대하여, 지금과는 다른 미래의 여성상을 말한다. 아이가 바라보는 부모는 남자와 여자의 일이 극명하게 갈리는 거에 관한 불편한 감정을 나타낸다. 또한 사랑을 위해 참고 살아왔지만, 여자를 차별하는 남편의 가혹함을 고발하고 관계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변하지 않을 관계라면 과감하게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진취적인 여성상을 나타낸다. 아마 이러한 여성들이 있었기에 여성의 지위는 과거와 달라졌을 것이다.



 

반대로 사랑을 쟁취하려는 여성도 보인다. 키 큰 풀숲의 사랑에서 코딜리아는 사랑에 온전히 마음을 여는 인물이다. 강풍으로 과수원의 사과가 떨어지자 대문 바깥에 사과라고 쓴 나무 표지판을 만들었다. 의사가 차로 들어와 삽으로 땅을 파 사과를 쓸어 담고 얼마간의 사과를 가지고 갔다. 이후로 의사가 다시 왔다. 코딜리아와 의사는 서로 편지로 사랑을 속삭였다. 이런 경우 남편에게 무심했던 아내도 진실을 알게 되는 법. 의사는 코딜리아에게 10년 후 돌아와 함께 살자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말을 믿은 코딜리아는 10년 동안 은거의 삶을 보낸 후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플랫슈즈의 끈을 묶은 다음 의사를 만나러 갔다. 의사와 의사의 아내, 코딜리아가 스트랜드힐에 마주 앉아 누군가가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다. 이처럼 연인들은 자주 현실에 부딪친다. 사랑이라는 말처럼 허무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입으로 바람을 불편 훌훌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작품 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에서 자메이카 여인숙을 좋아했던 여자는 딸이면 대프니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일주일을 보냈던 밤을 떠올린다. 과거로 걸어들어온 여자는 과거의 남자를 만나 대프니라는 이름이 어떠냐고 묻는다. 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이라는 말하자 그에게 작별을 고하며 다짐한다.



 

나는 너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자를 아이처럼 보살피는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내 세대에서 끝이다. (168페이지, 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중에서)



 

클레어 키건이 자랐던 아일랜드는 과거 우리의 남존여비 사상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남자애한테는 이상한 이름남자와 여자에서 불합리한 차별에 대하여 말한다. 남자와 여자에서 엄마와 딸은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한다. 오빠는 난롯가에 앉아 공부하는 척을 한다. 크리스마스 아침 일어난 건 엄마랑 딸 뿐이다. 칠면조 속을 채우는 동안 아빠와 오빠는 선물로 받은 다트판으로 놀이를 한다. 딸이 엄마에게 왜 아빠랑 오빠는 아무것도 안 해요?’ 라고 묻자 남자니까.’라는 말을 듣는다. 가족끼리 모여 파티에 갔다가 돌아오는 밤, 예쁘게 차려입은 엄마가 대문을 열기를 바라고 아빠는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는다. 그런 아빠를 향하여 차별을 외치는 소녀를 본다.



 

나는 진주 목걸이를 한 엄마가, 방금 돌면서 빨간 치마를 펄럭이는 엄마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또 아빠가 차에서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른 집 아빠들이 아내의 외투를 들어주고, 문을 잡아주고, 가게에서 갖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 필요없다고 해도 초콜릿과 잘 익은 배를 사 오는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209페이지, 남자와 여자중에서)

 



수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누군가의 희생과 강력한 주장으로 이루어낸 여성 평등의 결과를 보는 것 같았다. 차별과 여성 혐오의 불협화음을 위해 싸웠던 여성들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었다. 소녀의 엄마가 대문을 열기 위해 차에서 내린 것 같지만 어떤 여성도 하지 않던 운전을 하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꼈다. 경험과 상상, 미래의 변화를 이끌어갈 보석 같은 열다섯 편의 소설이었다. 작가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 이 모든 작품에 실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래를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문학 작품 속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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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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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모든곳의전수미 #안보윤 #현대문학



 

우리는 모두 전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불행과 관심을 독식했던 전수미와 달리 부모의 관심과 돌봄을 받지 못하고 홀로 견뎌야 했던 전수영을 대변하는, 세상 모든 곳의 전수영을 위한 이야기다.



 

전수미는 전수영의 한 살 터울 언니다. 전수미를 전수미라 부르거나 수미년이라고 부른다. 호칭에서 전수영이 전수미를 대하는 마음이 보인다. 전수영이 바라보는 전수미는 나쁘다. 전수미를 위해 떠난 캠핑에서 아무렇지 않게 텐트에 불을 지르거나 엄마와 수영이 단둘이 외출했을 때 낯선 남자를 집안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다른 사람을 죽였다고 엄마가 연락을 했다. 재판을 받으며 변호사는 각종 사건에 연루된 전수미를 위하여 목격자로 나서주길 원하지만, 우리가 보는 전수영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가족은 개뿔.






 

지금의 전수영은 노견돌봄센터에서 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어 쇠약해진 개들이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요양을 하는 돌봄센터다. 수의사인 양 원장이 금요일 오후 직원들에게 퇴근하라고 하는 날이면 수영과 소란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개에게 무척 다정한 손길을 내미는 양 원장이지만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한다. 반려동물을 맡긴 보호자들은 CCTV로 개의 일상을 살펴볼 수 있다. 때로 보호자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고 불평불만을 쏟아놓는다. 보호자들의 연락이 뜸해지거나 면회하러 오지 않을 때 양 원장은 금요일 오후 직원들을 퇴근시킨다.



 

개가 입원한 돌봄케어센터의 직원들과 죽어가는 개들을 보니 요양병원이나 요양원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입원비와 치료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보호자들과, 삶이 바쁘다고 부모를 보러 오지 않은 가족들의 모습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관심과 돌봄은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필요하다. 가족이 찾아오지 않은 환자들은 우울하고 의기소침해진다. 동물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다. 배를 쓸어주고 귓가를 만져주면 인간에게 최선을 다한다. 인간이 반려동물을 유기하려는 순간, 관심이 점점 사라지는 순간, 마치 피부에 스치듯 느끼지 않을까. 사람이든 동물이든 연명 치료는 숙제다. 편안하고 안전한 죽음이 존재하기는 할까. 지나친 연명 치료에 모두 병들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전수미에게서만 벗어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전수미가 있었다. 나는 세상 모든 곳의 뒷면이었다. 온 세상이 내게 전수미였다. (117페이지)

 



세상의 모든 불행과 관심을 독차지하던 전수미와 달리 수영은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온 자 특유의 감각이 발달해 있다. 흡사 짐승처럼 예리하고 돌연한 날것의 감각이라고 했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아무 가게나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런 식으로 생존해왔던 전수영은 이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게 되며 감각이 무디어졌다. 개들을 돌보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감각이 먼저 열려 수정을 고통스럽게 했다. 수영이 사는 방법은 수미와 다르게, 수미 보다 더 빠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 언제나 수미가 빨랐다.



 

수영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놀라운 발견을 한다. 아무 생각없이 행동했을 거로 보였던 전수미가 계획하에 어떤 행동을 했다는 거다. 엄마 아빠도 알지 못하게, 오직 전수영만 알게 했다. 진실은 항상 나중에야 드러난다. 수영이 수미와 경쟁하듯 감정 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마음 한편에 다른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수미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저 바라보아야 하고, 나를 감추는 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수영이 전수미와 다른 인간이라는 걸 증명하는 순간은 짜릿했다. 수영 만의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이제 수영은 뭐든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꽃이 피면 시들어버릴 걸 염려해 수영은 꽃이 피지 않는 세 개의 화분을 그린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작은 희망의 메시지로 보였다. 식물을 돌보고 동물을 돌본다는 거,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곳의 전수영, 바로 우리다.

 

 

#핀시리즈 #핀소설 #소설 #소설추천 #한국문학 #한국소설 #연말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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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에서 이리가 오늘의 젊은 작가 53
윤강은 지음 / 민음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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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편에서이리가 #윤강은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시리즈를 좋아했다. 수상작들을 거의 다 챙겨볼 정도였다. 오늘의 작가상이 없어져 아쉬웠었는데 10년 만에 공모제로 다시 돌아왔다. 그 첫해 수상작이면서 윤강은 작가의 데뷔작이다. 민음사에서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되어 더 반가웠다.



 

넷플릭스에서 <대홍수>라는 영화를 보면서 지구의 미래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윤강은의 저편에서 이리가또한 멸망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한반도라는 땅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생존과 기억의 오라토리오 같았다.



 

근미래의 지구는 대멸종으로 온통 흰 눈으로 가득한 환경이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들은 각자의 터전에서 생존하고 있다. 자원이 고갈된 한반도에서도 남해안 쪽에는 온실 마을이라고 하여 온실에서 다양한 식물과 동물을 길러 중부지역인 한강 구역이나 압록강 기지까지 물건을 보낸다. 열 마리 정도의 개가 끄는 개썰매를 이용하여 온실 마을에서 한강 구역으로, 압록강 기지로 보내는데 한번 다녀오면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장소에서 추위밖에 없는 빙하에 가까운 날씨라고 보면 되겠다. 얼음벽을 세워도 살을 에는 추위에 맞서야 한다. 곡식과 육류 등 식량을 비롯한 물자를 생산하는 온실 마을과 달리 한강 구역은 철의 품질이 월등하다. 압록강 기지는 한반도를 지키는 군인들이 대륙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거주하고 있다.







 

문득 폐허가 된 지구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거대한 차단벽을 만들어 생활하고 약한 자들에게 핍박을 가했던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생각났다. 지배자에 의해 활동의 제약을 받는 인간들.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그런 상태의 집단에 가까워 보였다. 화합과 약속에 의해 유지되던 이들의 평화도 대륙군의 침략으로 와해되고 말았다. 내가 혹은 우리가 살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이방인들을 배척한다. 보편적인 역사에서 나타난 것과 같다. 우리의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타인(혹은 이방인)들을 죽이는 건 역사에서 비일비재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멸망을 앞둔 한반도에서 서로에 대한 우정과 삶에 대한 의욕을 보여주는 인물 다섯 명이다. 기억의 파편을 안고 오늘을 힘차게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상처와 후회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목숨을 위협받는 순간이 오면 더 남쪽으로 이동하여야 한다.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도망쳐 나 혼자가 아닌 누군가를 찾아 움직인다. 숨 가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서로가 가까워져야 하는데,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이들이 못내 안타까워서다. 가까이 다가갈 듯 멀어지는 이들은 끝내 생존할 수 있을까. 미소 지으며 만날 수 있을까.

 



생명도감에서 지금은 사라진 동물과 식물의 씨앗을 보며 과거의 시간을 상상해본다.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고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가늠해볼 수 있는 시간이다. 사라졌던 동물의 하울링 소리를 들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가만히 생각해본다.

 



지구의 멸망은 지금과는 다른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운송 수단으로 개썰매를 이용하고 하루면 갈 거리를 한 달가량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 주문한 뒤에 하룻밤이면 배송 되는 편리함과는 거리가 먼 과거로 회귀하는 미래를 상상하니 아찔할 뿐이다. 결국 지구는 멸망하고 다시 원시 시대가 되고 마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남아 다음 시대의 인간을 위해 자원을 보존하고 살리려 애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르겠다. 공존하던 각 구역의 사람들이 나만 살겠다고 문을 걸어 잠근다는 것은 결국 파멸에 이를 뿐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 같다.

 



살아 있는 한 기억할 수 있다. 기억은 사라진 것들을 되살릴 수 있다. 지금 이곳에 없더라도. (156페이지)



 

살을 에는 추위에 밖을 나서본 적이 있는가. 햇볕이 들지 않은 음지는 굉장히 차갑다. 하지만 햇볕이 비치는 쪽으로 다가서면 피부에 닿는 바람결이 다르다. 그 따스함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풀어지고 만다. 눈 속의 씨앗이 조용히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다. 어떻게든 살아있기를 바라게 되는 그 마음을 알까.

 

 

#저편에서이리가 #윤강은 #민음사 #오늘의작가상 #책추천 #소설추천 #한국소설 #오늘의젊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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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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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하의것들 #조르주페렉 #녹색광선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일탈을 꿈꾼다. 그것이 여행이든 퇴직이든. 일상 이외의 것들을 그린다. 만약 기억하고 싶은 시기로 돌아가고 싶어도 아무런 기억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기억하고 싶은 장소를 기웃거리지만, 그저 장소들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머뭇거리는 마음을 차마 안다고 하지 못하겠다. 익숙한 것은 금세 잊히고, 새로운 기억을 찾아 어디론가 헤매는 우리를 상상해본다. 왜 그렇게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 하는 것인가. 결국엔 과거의 기억에 묻혀 살 것을.

 



조르주 페렉의 보통 이하의 것들은 순수하게 녹색광선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기에 구매했다. 한 남자가 거리에 서 있다. 태어나 자란 곳. 그러나 기억에는 없는 장소에 서서 그곳의 풍경을 담담하게 전한다. 빌랭 거리 1번지(태어난 곳)부터 24번지(어머니의 미용실이 있던 곳)를 거쳐 38번지까지, 매년 찾아가 그림 그리듯 설명하는 글에서 기억하지 못한 어떤 애틋함을 느낀다. 묘사가 길어질수록 낙후되고 사라진 곳이 많다. 도시의 흔적이 점점 사라져가는 장소를 매해 바라보며 어쩌면 작가는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거리가 사라지고 나면 아무런 흔적도 없을 거라는 존재의 절망 같은 거.

 





보통 이하의 것들은 조르주 페렉의 실험 문학에 가깝다. 실험적인 장소들의 나열, 특히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의 나열은 일반 문학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독특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해야겠다.



 

조르주 페렉의 실험 정신은 특별한 규칙을 세운 엽서 쓰기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받았을 법한 엽서의 내용을 어떤 규칙을 정해두고 쓴 글이다. 발신자가 각국의 다양한 장소에서 엽서를 보낸다. 어떤 호텔에서, 수영으로 햇볕에 타거나, 캠핑을 하거나, 아름다운 해변에서 누워 있다며 천 번의 키스를 보낸다. 어떤 문장에서는 며칠에 돌아갈 거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여행지에 있는 누군가에게 받은 듯한 엽서들. 이 글을 보고 여행지에 있는 우리를 생각해본다. 짧게 전하는 여행지의 일상,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보내는 키스.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언제 돌아가겠다는 만남의 기약. 멀리 여행을 떠나면 이와 같은 엽서를 보내도 괜찮겠다. 여행지의 풍경을 찍은 엽서 몇 장을 사서 간단하게 마음을 전해 글을 쓴다. 글쓴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질 풍경 그리고 안녕의 말들을.

 



우리는 베네토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어. 날씨가 정말 좋아. , 얼마나 좋은 시간을 보내는지! 나는 햇볕에 탔어. 키스를 보내. (80페이지)



 

그러므로 가장 좋은 것은 최고의 모범적 여행자였던 스탕달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다. : “어떤 나라를 여행하든 즐거움을 주는 것만을 택해야 한다. 런던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한가로이 거리를 산책하는 것이다.”(일기, 181789) (130페이지)

 



여행지에서 한가로이 산책을 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여행이다. 아무런 방해 받지 않고 주변을 돌아보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도시에서 돌아다닌다는 건 쉽지 않다. 비교적 짧은 기간이라 도시의 장소들을 세세하게 둘러보지 못한다. 그래서 여행은 항상 아쉬운 것 같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아마 여행지에서 일 년쯤 머문다면 그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12년 동안 빌랭 거리를 묘사하고 회상하는 글을 기획했던 것과 비슷한 포맷으로 책상 위의 물건을 묘사한다. 아주 놀랍다.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이런 게 글이 될 수도 있구나. 새로운 시도였다. 소설도 아닌, 에세이도 아닌. 일기도 아닌. 색다른 조합이었다. 글은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 <스틸 라이프 / 스타일 리프>의 역자 노트를 보면 이러한 글쓰기 방식을 계열적 글쓰기라고 표현했다. 작은 모눈종이와 금속 만년필 하나에서 끝이 났는데 이 묘사는 계속될 거 같기도 하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 늘 고민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새로운 경험을 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페렉이 시도했던 다양한 글쓰기 방식에 적응되어 탐색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보통이하의것들 #조르주페렉 #녹색광선 #해외문학 ##책추천 #소설 #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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