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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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실 #한강 #문학과지성사


 

작년 가을, 이사 준비를 하면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쓴 오래된 일기장, 그림, 상장 등이 있었다. 들춰봤더니 아이만이 가진 글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걸 보고 웃고, 멀리 있는 아이에게 사진 찍어 보내주기도 했다. 소중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때의 추억이 깃든 물건이었다. 반면 나의 어렸을 적 추억거리는 없다. 가난한 살림, 수많은 좁은 집을 거치면서 우리의 공책 같은 건 남겨둘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뜰하게 챙기는 부모여야 가능한 법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책, 문지 에크리 시리즈로 나온 한강 작가의 글을 보고 있으니 감동이 밀려온다. 유년시절에 쓴 일기장들 사이에 시집이라고 적힌 책자 한 권을 발견하며 글이 시작된다. 썼던 시를 엮은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벌써 작가의 싹이 보였나 보다. 사랑에 대하여 고민하고 떠오르는 마음을 글로 쓴 거다. 유명한 시인이 썼다고 해도 믿을 만한 시어다. 아래의 문장을 보라.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10페이지)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문을 비롯해 작품을 펴낸 시점의 마음을 담은 강연, 산문, 그리고 소설의 글감이 되는 메모장, 작가만의 북향 정원을 가꾸는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이로써 다음 작품을 기다렸던 마음을 잠시 달랠 수 있다. 장편을 쓰면 짧게는 1~2, 길게는 7~8년 동안 쓰는데, 그에 따른 시간과 노력 그리고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독자들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출간된 책 한 권을 휘리릭 읽은 후 다음 작품을 그저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었다고만 여겼다는 게 독자로서 조금은 미안하다.

 


집과 텃밭에서 작은 정원을 가꾸고 있다. 이사한 후 전보다 좁아진 발코니에 제라늄을 키운다. 제라늄들도 새집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는지 잎을 틔우지 못하고 있었다. 봄이 되자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조금 주었더니 어느 정도 적응 후 잎과 꽃을 틔우기 시작했다. 혹시나 햇볕이 부족할까 봐 집에 있을 때마다 혹은 출근 전에 화분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주었다. 북쪽 정원을 가꾸는 작가의 산문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햇볕이 들지 않은 쪽에 정원을 가꾼다는 것 자체가 독특했다. 작가가 부른 조경사는 거울을 이용해 식물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거울 몇 개를 들여와 햇볕을 식물에 쏘아두고 햇빛이 움직일 때마다 옮겨주느라 하루를 보낸다는 작가였다. 그 애틋함이 공감되었다. 미스김라일락이 꽃필 때, 단풍나무의 키가 자랄 때, 불두화에 진딧물이 올라 잡아주느라 쪼그리고 앉았을 작가를 그려보았다. 식물이 자라는 과정을 일기로 담아 일상의 소중함과 삶의 통찰을 바라보게 했다. 보살피고 지켜보아야 잘 자라는 인간의 삶처럼 말이다.


 

지난 주말에 텃밭에 갔더니 한 달 전에 잘라준 장미는 금방 꽃 피울 듯 풍성하게 자랐다. 7월에 피는 목수국 아래 잔가지를 잘라주고 꽃망울이 맺힌 불두화 가지도 정리해주었다. 꽃양귀비는 일주일쯤 뒤에는 꽃이 필 것 같다. 늦은 오후엔 오이, 고추, 참외, 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자연에서 나는 식물과 꽃, 채소가 점점 더 귀하게 느껴진다. 키우는 즐거움이 있다.

 


언어가 우리를 잇는 실이라는 것을, 생명의 빛과 전류가 흐르는 그 실에 나의 질문들이 접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에. 그 실에 연결되어주었고, 연결되어줄 모든 분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9페이지)

 


작가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다. 글쓰기로 인생을 껴안아 보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충분히 살아냈다고 표현한 작가의 글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하루하루 정원을 지켜보며 자라는 나무를 보는 즐거움, 사회에 일어난 폭력을 글로 풀어내야 하는 고통과 부담감, 그럼에도 작품을 완성하고 출간하는 순간을 기다려온 것들의 감정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폭력의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작가로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 폭력에 대처하는 명확하고 명징한 시선이 담긴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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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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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마치 #정한아 #문학동네


 

죽을 때까지 온전한 기억으로 살아간다면 좋겠다. 적당히 잊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다고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어떻게 기억을 잃을 수 있느냐며 한탄할까. 때로는 고통스러운 기억은 잊는 게 좋다. 가슴에 부여안고 있으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아프고 또 아프면 통째로 잊어버리는 방법도 있다. 그러고 보면 알츠하이머 치매가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걸 잊는, 어쩌면 자기 자신조차 잊어버리는. 슬픈 일이지만 말이다.



 

주변에 치매를 앓고 있는 분들이 많다. 그토록 총명하던 분이 기억을 잃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은 슬프기 짝이 없다. 과거를 잊어도 나는 나다. 알츠하이머 치매인데도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영화 <스틸 앨리스>가 생각났다. 우리 또한 미래에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게 맞겠다.






 

드라마 <안나>의 원작 소설인 친밀한 이방인의 작가 정한아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3월에 태어났다고 마치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주인공이다. 국민엄마 배우로 연기와 인기, 재력을 거머쥔 이마치에게 일어난 이야기다. 55킬로그램 몸무게가 변하지 않던 마치는 육십 살 생일에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59킬로그램의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자주 깜빡거리고 지갑 없이 택시를 타는 등 경증 치매 증세가 있는 알츠하이머 전 단계 상태다. 거금의 병원비를 지불하고 기억을 되살리는 VR 치료를 시작했다.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치료로 기억 속 건물에서 과거의 이마치와 만나며 잊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린다.



 

이마치가 살던 아파트가 재건축했다가 다시 입주하기 시작했을 때 이마치는 누구보다 먼저 예전의 집 형태 그대로 입주했다. 사라진 아들이 찾아올까 봐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아들의 방을 그대로 두고 그 방만은 깨끗하게 정돈을 했다. 과거 마치에게는 남편과 딸, 아들, 매니저 K가 있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누구도 없다. 그러나 가상현실 속의 마치에게는 노아라는 젊은 청년이 기억을 돕는다. 43층의 이마치와 딸 준영, 40층의 마치, 더 어린 딸 준영을 만나며 과거의 기억 속을 들여다본다. 마치와 노아가 방문하는 집은 모두 마치의 기억 속 공간이다. 언니 준이 살아있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간 마치는 그리움에 눈물을 흘리고, 엄마에게 맞는 십 대의 마치에게는 조금만 참으라고 말한다. 마음속으로는 엄마의 집을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되뇐다. 다른 소설과 달리 과거의 자신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과거는 바꿀 수 없으며 바꿔서도 안 된다는 걸 강조하는 듯했다. 마치의 치료법은 과거를 바꾸는 게 아니라 과거를 기억해내는 게 필요해서다.



 

과거의 나에게 돌아간다면 해줄 말이 뭐가 있을까. 살아온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할 수 있는 건가. 과거의 장소에서 과거의 나와 조우한다는 건 내가 놓쳤던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거다. 그녀가 놓쳤던 것 하나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남편과의 불화, 아이들을 뿌리쳤던 지난날들의 후회가 마치를 괴롭힌다. 과거의 기억을 마주했을 때 후회뿐이었다는 것마저 내 기억을 돕는 장치라는 게 슬펐다.

 



아들을 잃은 엄마를 옆에서 바라봐야 했던 딸 준영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다. 성년이 된 딸은 엄마를 거부하고 떠났다. 남편은 전국으로 아들 정민을 찾아다녔지만, 마치는 아들을 잃은 고통을 잊고자 더욱 연기에 집착했다. 그 결과가 알츠하이머 치매 증세로 나타났다. 아마 과거를 잊고 싶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 마치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딘가에 아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 비오는 날 택시비를 받지 않았던 운전기사와의 조우, 마치의 기억을 찾는 과정을 함께 한 노아의 정체를 아는 순간 고통스러운 슬픔이 몰려왔다. 잊고 살았던 과거, 잊지 못했던 것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들려왔던 소음, 바닷가에서 서핑을 하던 청년과의 만남 등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인 것 같다. 도무지 실재했다고 보기 어려운 일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난다. 남은 사람에게 죽은 자가 건네는 다정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다만 죽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매끈하던 선이 뭉개지고 지워지는 과정, 조밀하던 이목구비가 흐물거리고 늘어지는 과정, 환했던 빛이 점차 희미해지는 과정. 이윽고 우유를 다 마신 아이는 빈 잔을 노아에게 건네주었다. 여자들이 모여 서 있는 곳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213페이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괜찮다고 말하기 위해 주변에서 맴도는 사람이 있는지 둘러보라. 간절한 바람을 안고 주변을 맴돌 그 사람을 위해 마음을 열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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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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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정대건 #민음사

 

급류라는 소설이 자꾸 눈에 띄었다. 어떤 소설이기에 이렇게 눈에 띄는 것일까. 궁금함에 못 이겨 책을 구매해 읽었다. 처음엔 몰랐지만, 정대건 작가의 전작 GV 빌런 고태경을 읽은 적이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로서 ‘GV 빌런이라는 새로운 용어와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어 공감했던 작품이었다. 이번 작품 급류도 다분히 영화같은 스토리였다. 장면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림이 그려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던 것 같다.



 

이번 작품은 정대건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계곡으로 유명한 진평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고등학생인 도담과 해솔의 사랑 혹은 성장 이야기임과 동시에 소방관이라는 직업의 위험성과 숭고함을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도담과 해솔의 사랑은 긴 시간을 상처와 함께 이어져 왔고, 치유의 과정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한 도담과 해솔은 아빠와 엄마를 잃고 고통스러워한다. 마음속 깊이 자리한 죄책감에 짓눌려 도담은 술을 마시며 어딘가로 훌훌 떠나고 싶은 자유를 갈망한다. 그에 반해 해솔은 묵묵히 미래를 위해 철저한 계획하에 움직인다.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것도 기저에 깔린 죄책감과 삶의 방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가 아프고 과거의 기억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그 사랑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불행해질 뿐이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100페이지)



 

같은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법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 과거의 트라우마를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편안한 법이다. 해솔이 선택한 직업이 약사가 아니었다. 속죄하듯 선택한 직업이 그를 더 나아가게 했다. 익숙한 모습을 발견한 도담에게 해솔은 누군가를 떠올렸고, 사랑에 빠진다는 것 보다 스스로 선택한 사람에 관한 감정을 말했다.



 

소방관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직업이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그걸 바라보는 가족은 힘들지만, 누군가를 구하는 일은 나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소방관인 도담의 아빠와 해솔 엄마의 사고, 둘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서른의 재회는 다분히 영화적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중에 뉴스에 나오는 주인공을 바라보았을 때의 표정까지 영화의 에피소드처럼 흘러갔다. 적당한 장소, 적당한 시간, 적당한 사람과의 관계까지 모든 게 둘의 만남을 예견했다. 영화로 만들어지기 딱 좋은 스토리였다고 할 수 있겠다.

 



십 대와 이십 대를 거쳐 삼십 대에 이른 청춘들의 사랑은 물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격렬하고 간절하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사랑은 다른 형태를 지닐 것이다. 고통과 속죄의 시간을 거쳐 비소로 안식의 시간을 갖는 이들은 어른처럼 평온한 사랑을 하지 않을까. 손을 마주 잡고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상상해본다. 더 이상의 감정 소모는 하지 않으리라. 이미 그들은 급류에 휘말려 거친 파도를 헤쳐오지 않았나.

 



2022년 말에 출간되었다가 2024년 역주행하고 있는 베스트셀러다. 영화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예감을 해본다. 소설의 제목처럼, 표지처럼 급류에 휘말린 청춘들의 이야기였다. 벌써, 여름이 기다려진다.

 


 

#급류 #정대건 #민음사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한국소설 #한국문학 #오늘의젊은작가 #오늘의젊은작가시리즈 #책의날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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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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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한번의삶 #김영하 #복복서가



 

김영하 작가의 메일링 유료 서비스를 받았다. 일주일에 한 편씩 배달되는 인생사용법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내용을 생각하게 했다. 작가의 가족에 관한 진솔한 이야기는 그의 산문 중에서 거의 처음인 거 같아 각별했다. 다른 메일과는 다르게 즐겁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출간된 책을 받아보니 종이책이야말로 진짜 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놓치거나 겉돌았던 내용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역시 종이책이다.

 



연재 글에서는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과 개인적인 사진을 실어 글과 조화가 좋았다. 단 한 번뿐인 삶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뒤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미래의 우리 삶을 계획할 수 있었다. 다만 종이책에서는 메일링 서비스와 다르게 작가의 개인적인 사진이나 그림이 수록되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인생은 일회용으로 주어진다.’라는 첫 문장부터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우리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궁극적인 이유는 영원하지 않은 우리 삶 때문이라는 설명이 와닿았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는 죽은 것 같았던 주인공이 다시 살아나 뭔가 사건을 해결하지 않나 말이다. 우리가 살아보지 않는 삶, 상상 속의 삶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된 장소가 엄마의 빈소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그동안 엄마는 자기의 삶을 말하지 않은 게 많았던가 보다. 엄마가 과거에 여군이었다는 것. 아마 군대에서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을 텐데 그걸 죽을 때까지 숨겼다. 시대가 원하는 여성상이나 남성상이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아버지가 군인이었다는 건 작가의 소개 글에서 보았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 건 드물다. 군인으로서 글씨를 못 쓰는 아들을 가르치고자 우물 정 자 천 개를 쓰라고 했던 일화도 말한다. 오래전에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성공했다. 하지만 컴퓨터 혹은 워드프로세서가 나올 줄은 모르셨겠지. 지금은 손글씨로 작품을 쓰는 작가가 귀해진 시대다. 노트북 하나 들고 카페에서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나. 더 이상의 기능을 사용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 군대 선임들의 행동 또한 너무 익숙하다.



 

내가 좋아하는 언어는 문학의 언어였다.

그 언어는 모호하다. 이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것을 말하고, 저것을 말하면서 이것을 말한다. 때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언어이며,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된다. 회계가 그랬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그래도 된다. 그래서 좋았다. (48페이지)



 

이 글을 쓰다가 커피 생두를 볶았다. 로스팅된 원두를 주문해서 마시다가 원두값이 인상되어 생두를 직접 로스팅을 하려고 구매했다. 처음 했을 때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탈까 봐 조심스럽게 볶다 보니 로스팅이 덜 됐다. 쓴맛이 나는 강배전보다는 산미가 느껴지는 약배전을 더 좋아하는 터라 더 살살 볶게 된다. 작가가 캐나다 밴쿠버의 대학교 기숙사에 머물렀을 때 울렸던 화재경보 사건을 말한다. 화재경보가 커피 로스팅 때문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던 에피소드였다. 문제는 1차 파핑이 일어난 시점에 화재경보가 울린다는 거다. 한방향으로 나무 주걱으로 계속 저어주어야 하는데 모든 걸 그만두고 밖으로 나가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커피를 볶다가 그 생각이 나 혼자 웃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썼던 작가 조지 R. R. 마틴의 작가와 독자의 경계에 대하여 말한다. 작품 속 인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작가일 것 같은데, 장편을 쓰다 보면 많은 인물 때문에 헷갈린다는 거다. <왕좌의 게임> 작가도 등장인물이 헷갈려 가르시아라는 팬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드라마 제작진도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하는데, 독자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말하는 부분이었다.



 

어떤 기억은 오래도록 우리 뇌를 차지해 잊지 않고, 어떤 기억들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적당히 잊고 적당히 기억하는 습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작가가 기억하는 것들, 혹은 살아오며 느꼈던 감정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해답을 본 느낌이다. 단 한 번뿐인 삶.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버릴지, 무엇을 간직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한다. 명쾌한 해답을 위한 질문을 건네는 책이다.


 

 

#단한번의삶 #김영하 #복복서가 ##책추천 #문학 #에세이 #에세이추천 #한국에세이 #한국문학 #인생사용법 #영하의날씨 #책의날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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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는 맨홀 2025-04-17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커피를 사다 먹다가 커피 가격이 많이 올라서 집에서 로스팅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다가 그 부분에 꽂혀서 댓글 남깁니다. 커피의 향긋함과 맛이 주는 즐거움을 알아버려서 힘들어도 놓을수가 없더라구요.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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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사랑법 #박상영 #창비

 

영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명의 원작 영화. 김고은과 노상현 주연으로 정신없이 한 시절을 보내는 청춘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매일 술 마시고, 남자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친구들. 우정이란 게 무엇인지, 사랑이란 걸 탐구해가는 청춘들의 아픔을 보는 것 같았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동명 원작 중의 재희편의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재희와 영의 첫 만남이 시작이다. 불문과 동기들이 보았다면 입방아에 올랐을 상황을 목격하고도 그를 단번에 이해한 인물로 비쳤다. 영이 마음을 트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술 마시는 게 일상인 재희는 남들과는 다른 성적 취향을 가진 영과 소울 메이트에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재희가 머물던 방의 창 밑에 숨어있었던 남자 혹은 스토커 때문에 함께 살게 된 과정과 진정한 친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라 하겠다.





 



영화는 좀 더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조명, 그 안에서 춤을 추는 영과 재희의 모습, 배우들의 말투와 몸짓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열린 마음을 가진 남자라고 해도 남자와 함께 사는 연인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드문 상황이다. 재희의 남자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재희는 남자 친구에게 룸메이트의 이름을 지은이라고 했고, 영에게 재희는 재호라는 이름으로 통칭했다. 영화에서 재희가 산부인과에서 훔친 자궁 모형을 들고 뛰던 장면은 지금까지 생생하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춤을 추거나 술을 마시던 재희와 영의 모습이 젊은 날의 성장통처럼 느껴졌던 건 비단 나뿐일까.

 



다양한 문학 작품이 출간되고 있다. 처음 퀴어 문학을 읽었을 때 얼마나 충격이었던가. 그러나 이제는 성적 취향이 다른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법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일인 것 같다. 이해와 포용을 기르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은 암 투병하고 있는 엄마를 간병하며 만났던 형을 떠올리는 내용이다. 엄마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사랑이라는 그 미묘한 감정을 말한다. 고등학교 시절 골목에서 남자와 키스하던 장면을 보았던 엄마는 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모습이 보통의 엄마와 닮아있었다. 영화에서는 엄마가 영화 한 편을 보고 와서 아들을 이해하려 애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부모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엄마를 이해하는 과정 또한 엄마가 영을 이해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둘의 간극을 좁히기는 무척이나 어렵다. 그렇지만 매우 닮아있다는 게 놀랍다.



 

동명의 작품 대도시의 사랑법은 규호와 함께 일본 여행을 가기로 했다가 만료된 여권을 들고 공항에 온 것부터 시작이다. 제주에서 형 때문에 올라온 규호는 간호학원을 다니며 클럽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다. 클럽에서 만난 규호와의 연애는 규호의 배려와 노력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야겠다. 규호가 외국으로 떠나고 다시 대도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씁쓸하지만 한 시절의 사랑은 여타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영은 방콕에 왔다. 방콕에 와서도 규호를 생각한다. 규호가 떠난 후 영은 규호의 침대부터 버렸다. 방을 가로막던 침대는 규호의 분신과도 같았다. 하비비와 함께 지내면서도 그는 규호를 생각한다. 규호와 방콕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는데, 마치 규호는 영의 첫사랑인 것만 같다. 잊지 못할 첫사랑의 기억들 같은 거. 풍등을 날리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소원을 적어 높이 떠오르는 풍등의 아름다움. 추억을 향해 날아가는 것 같다.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 (55페이지)

 



K가 영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의 내용이다. 재희에서 이 문장이 몇 번 나오는데, 씁쓸한 사랑의 한 모습을 나타낸다. 잊을 수 없는 사람, 잊지 못하는 한 시절을 나타내는 것 같다. 사랑이 그렇잖은가. 잊지 못하는 첫사랑의 기억들.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을 사랑하지 않나. 문학 작품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왜 이 영화가 사랑을 받았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를 볼수록 영화에서 내뿜는 관계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타인에게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관계겠지만,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특히 노상현 배우가 재희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데 재희가 친구임을 강조하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었다. 책 속에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과 에피소드가 있어 그제야 영화 속 감정이 더 와닿았다. 너무 자세하게 설명하는 게 좋은 영화는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잖은가.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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