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찌니주의보 #정지아 #창비



 

시골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다. 주말이면 하룻밤씩 자고 오며 작물을 돌본다. 일하고 있으면 동네 어르신들이 지나가며 한마디씩 하신다. 농사는 그렇게 짓는 게 아니라고, 본인의 지식을 주입식 교육하듯 강요한다. 마을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는데, 세컨드의 아들이 몇십억을 들여 카페를 만들었다느니 하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물어 답변을 해주면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될 것 같아 매우 조심스럽다. 누군가의 수저가 몇 개인지 다 알고 있어야 속이 시원하다는 시골의 특성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만약 평균 나이 칠십팔 세인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 보라. 아찔하다. 그런 동네에 삼십 대 초반의 두 찌니가 입주했다. 마을의 평균나이를 78세에서 72세로 낮춘 이들과 동네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마음 한편이 울컥해진다.



 

수평마을 마을회관이 북적인다. 마을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윤 선생이 노인들을 소집하여 중대 발표를 한다. 서울에서 귀촌한 성진과 혜진이 서로 여자끼리 좋아하는 레지라고 한다. 수평마을에서 쪼까내자고 마을 주민들과 이장을 닦달한다. 찌니들을 아꼈던 절골댁 마저 발길을 끊었다. 보다 못한 이장의 아내 쑤언은 찌니들을 집으로 데려와 쌀국수를 해 먹이며 그들의 마음을 달랜다.



 

이런 이야기만 있으면 소설이 재미없다. 이들을 쫓아내자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문고리에 호박전을 몰래 가져다 놓은 노인들도 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은 상황이다. 겉으로는 레즈비언이라고 날이 선 눈빛을 보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반찬과 음식을 챙기는 것이다. 또한 찌니들의 친구 기희가 삐순이와 삐돌이라는 이름을 가진 반려 닭을 데리고 오며 마을은 더 들썩인다.

 







구례 사투리를 맛깔나게 표현한 글에서 본연의 글맛이 느껴진다. 입말 그대로 표현된 사투리는 할머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들이다. 마치 외래어처럼 신기한 말들의 향연에 저절로 웃음이 배어난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들이 살아온 날들,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구박을 당했던 일들,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던 이들의 사연이 낯설다. 노인들은 찌니들을 쫓겨나게 놔두지 않는다. 들여다보면 흠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말하기 좋아하는 노인들은 찌니들의 일을 놀림 삼아 이야기하다가 윤 선생네 집에 일이 생기자 혜진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함께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전라도의 진한 사투리를 글로 본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즐겁다. 정지아 소설의 입말은 더 다채롭다. 사투리가 나오는 부분에서 입말을 소리 내어 읽었다. 마치 할머니들이 눈앞에 있는 듯 그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눈치 보지 않고 할 말 다하는 할머니들의 노골적인 성 표현, 차별과 편견에 갇힌 사람들로 보였지만, 정작 예기치 않는 일이 생기자 서로 나서서 도우려는 마음을 보여주었다. 비싼 식재료를 구입해 장아찌를 담가 한아름 건네주며 미안함을 슬그머니 표현하는 윤 선생을 보라. 정작 중요한 것은, 전복 등 비싼 재료를 사용했지만 음식 솜씨가 없어 냉장고에 고이 모셔둔 것은 어쩌란 말인가.



 

차별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고령화된 마을에서 청년으로 살아가기란 무엇보다 버거운 일이며, 호기심 어린 날 선 시선이 부담스럽다. 다른 한편으로 찌니들에게 의지하는 이들의 행태가 블랙코미디 같다. 힘든 시절을 겪어 왔다. 무서울 것도 없으며, 말에 거침이 없다. 이러한 노인들을 미워할 수 없다.

 



이리 멀쩡하게 이삐고 잘난 것들이 워쩌자고 이상헌디로 빠져가꼬 지 무덤을 지가 판다는디 내 속은 워쨌겄냐? 시방도 속이 쌔롬쌔롬허다. 넘이 안 간 질로 가본들 고생만 씨게 해야. 살아봉게 넘들 다 가는 질로 조심조심 감시로 넘들맹키 사는 거이 젤이드라. (163페이지)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차별과 편견에 사로잡힌 것 같지만, 반찬을 나눠 먹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가며 오늘을 사는 것이다. 수평마을 사람들과 찌니들의 생활이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전라도 입말을 따라 해 보는 즐거움이 컸다. 정지아 작가의 글이 자꾸 좋아진다.


 

 

#찌니주의보 #정지아 #창비 #책추천 #소설추천 #한국문학 #한국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랬다고 적었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랬다고적었다 #김애란 #문학동네



 

소설가의 내적인 고백은 어쩐지 독자를 향한 다정한 목소리 같다. 냉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상상의 산물인양 인물을 탄생하여 작가의 목소리를 내다가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의 곤란함이 이해가 된다. 때로는 자기를 보여주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정체를 감추고 있는 사람도 꽤 많기 때문이다. 뭐가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의 취향일 뿐이다.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로서 에세이는 조금 더 개인적인 감정을 나누는 것 같아 좋다. 이번 에세이에서는 아버지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나타냈다. 아프신 아버지를 바라보는 마음이 느껴져 먹먹해졌다. 부모님이 아프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부모님의 과거와 나의 과거가 겹치고,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절로 애틋해진다. 아프고 싶겠냐만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의 마음은 안타까움과 함께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다 드러내고 다 털어놓는 대신 감추는 마음. 그리고 그걸 알아채고 헤아리는 마음. AI 앞에서 요즘 그런 마음을 자주 생각한다. 어쩌면 문학은 AI와 반대로 자신의 무지를 아주 길게, 다양한 방식으로 고백해온 장르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36페이지, 세 개의 빛중에서)

 







언어를 다양하게 사용할 줄 아는 작가는 부모님의 이야기도 이처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작가의 글이 곧 우리의 역사를 알려주는 매개체인 듯하다. 그저 나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라는 틀을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단순한 덧셈 뺄셈이 아니라 여러 개의 얼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학은 바로 그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점도. (15페이지, 내가 되지 않는 꿈중에서)

 



긴 시간, 나는 나였다가, 또 나였다가, 충분히 나였다가, 혹은 나인 줄 알았다가 내가 되지 않는 꿈을 꾼다. 자연인으로서도 창작자로서도 그렇다. ‘진정한내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얼마나 안심이 되나. 얼마나 해방적인가. (20페이지, 내가 되지 않는 꿈중에서)



 

삶과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삶의 다양한 것들이 문학으로 표현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삶 속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문학 속에서 발견하고 공감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문학에 기댔던 어느 순간들이 모여 창작자의 삶을 사는 작가의 마음이 고요히 와 닿는다. 문학에서 위로를 받고 그러한 마음을 담아 문학을 창조한다는 것, 다른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는 일이다. 문학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는 명사의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힘든 시간 문학은 우리의 친구이자 위로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이 낯설지 않다. 생활인으로서의 개인과 글을 쓰는 작가로서 경계를 표현하고, 과거의 시간을 끌어내어 그때의 마음들을 펼쳐놓는다. 과거에는 가능했고, 현재에는 불가능한 것들. 그 틈새를 메우는 글이 있어 좋은 게 아닐까.

 



과거의 시간을 되돌려놓기는 불가능하다. 과거를 들여다보며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듯, 우리를 이루는 건 과거의 시간에서 왔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를 이루는 궁극적인 삶의 목적도 과거에서 왔을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 시야를 넓히는 게 중요하다. 나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말이다.

 

 

#그랬다고적었다 #김애란 #문학동네 #책추천 #한국에세이 #산문 #한국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라앉는프랜시스 #마쓰이에마사시 #비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가 그리는 연애소설이다. 건축에 대한 애정과 건축을 배우는 사람의 자세, 자연과 조화를 생각하는 건축가의 마인드가 깊게 자리한 여름 별장의 풍경이 매우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가을, 겨울, , 여름을 지나는 동안 도쿄를 떠나 홋가이도로 이주해 온 여성의 계절이 몹시 아름다웠다.

 




무요 게이코는 삼십 대 중반의 나이, 함께 살던 연인과 이별하고, 아버지와 함께 몇 년을 지냈던 홋카이도가 그리웠다.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으로 우체국에서 편지를 배달하는 일을 하는데도 즐거워 보인다. 차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는 길의 풍경이 퍽 다채롭다. 시골 마을답게 게이코가 움직이는 노선을 사람들은 다 꿰고 있다. 가게 앞에서 하품하더라는 소문이 무성한 동네다.




 

게이코는 목조가옥에 사는 데라토미노 가즈히코에게 소포를 배달하며 그를 마주한다. 눈이 마주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꿰고 있다. 그의 사인을 받고 물건을 건네주던 날, 쉬는 일요일에 집에 방문해달라고 말한다. 의문의 프랜시스가 누구인지 그를 방문해서야 알게 된다. 모든 음을 채집하는 그는 다양한 소리를 들려준다. 그에게 빠져드는 게이코. 무성한 소문을 뒤로 하고 그와 연인이 된다. 서른 중반의 게이코는 소문 따위 두렵지 않다.

 






홋카이도의 아름다운 사계절이 소설 속에 드러난다. 봄의 향연, 여름의 더위, 가을의 바람, 겨울의 눈, 계절과 더불어 우편배달을 하며 급여가 적어도 몇 년은 충분할 것 같다. 그저 세상에 둘이 있는 듯 머물 것 같지만, 둘에게도 갈등은 존재한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는 게이코의 행동은 가즈히코와 닮아있다. 세상 모든 소리를 채집하는 가즈히코는 세상에 초연한 듯 살아간다. 수력발전소의 프랜시스의 상태를 지켜보며, 홋카이도가 정전이 되었을 때, 홋카이도 전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안치나이의 전기 정도는 충분한 감당할 프랜시스일 것이다.

 




번잡한 도쿄가 싫었던 게이코는 이처럼 평화로운 홋카이도의 삶이 좋다. 한겨울, 게이코가 소꼬리를 삶는다. 오랜 시간 졸여야 하는 과정을 즐겁게 하고 있다. 눅진한 국물, 부드러운 고깃살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눈이 내리는 날, 뜨거운 국물 한 모금을 마신다면 홋카이도의 추위 따위 잊어버릴 것 같다. 그렇듯 평화로운 홋카이도에서 머무는 게 좋다.




 

마쓰이에 마사시 소설의 매력은 고요함과 잔잔함에 있다. 숲이 우거진 곳에서 여름 한철을 보냈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와 닮아있다. 도쿄 생활을 정리하고 어릴 적 잠시 살았던 도시를 잊지 못하고 찾아온 여자의 삶은 평온하다. 가진 돈이 많지 않아도 혼자서 충분히 해나갈 수 있다. 강가에 사는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고서도 그가 결혼은 했는지, 연인이 있는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다. 잔잔한 호수처럼 일렁이지 않는다.

 




봄은 먼저 하늘에서부터 온다.

그렇게 묵직이 꼼짝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겨울이 4월 중순이 지나자 급속하게 힘을 잃고 안치나이 마을 상공에서 흐르듯이 사라져갔다. 투명한 파란 하늘도 아니고, 눈을 낳는 두꺼운 구름도 아닌, 봄 안개로 어슴푸레하게 하얗고 밝은 하늘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154페이지)




 

홋카이도의 날씨는 여름에는 선선하지만, 겨울에는 봐주지 않는다. 눈이 허리 높이로 쌓이고, 바람마저 매섭다. 마치 이들의 사랑을 시샘이라도 하듯 홋카이도의 태풍은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별에는 음이 있다. 게이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들리지 않는 음이 하나하나의 별에서 이쪽을 향해 내려온다. 그 음은 빛이었다. 광원조차 되지 않는 덧없는 빛의 음. (189~190페이지)




 

감정은 물처럼 유유히 흐르다가도 세찬 비바람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굳건해지고,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없다. 그저 원하는 대로 나아가면 된다. 조바심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노인들에게 편지를 읽어주었던 것처럼, 게이코는 홋카이도의 계절을 즐거워할 것이다.

 

 

#가라앉는프랜시스 #마쓰이에마사시 #비채 #책추천 #소설추천 #일본소설 #일본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영하 30주년 기념 도서 세트 - 전3권 김영하 30주년 30/3 에디션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빛의제국 #김영하 #복복서가



 

명실공히 문학애호가로서 많은 소설을 읽었다고 자부한다. 물론 지금도 읽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읽을 것이다. 신간 소식이 들려오면 소설 분야부터 살펴보는데 좋아하는 작가의 SNS 계정을 자주 들여다본다. 김영하 작가의 30주년 기념 특별판은 내가 읽지 않은 책이어서 더 좋았다. 단편선과 산문선에 이어 대표 장편으로 빛의 제국을 실었다. 아마 작품이 처음 출간되었던 즈음에는 생소하지 않은 주제였을지 모르나, 지금에 읽어보니 생소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남파 간첩이 주인공인 다소 영화적인 스토리라는 점이다. 물론 최근 TV에서 남파간첩이 주인공인 드라마가 나오긴 했었다. 마치 상상력의 세계인 판타지를 다루는 듯한 소재라고 여겨질 정도다.

 



빛의 제국은 남파 간첩으로 살아온 김기영이라는 인물의 하루 동안의 번민을 담은 작품이다. 이십 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김기영은 어느 날 북으로 돌아오라는 귀환 명령을 받고 돌아갈 것인가, 돌아가지 않을 것인가, 서울 거리를 헤매며 고민에 휩싸인다. 저들과의 인연이 끊어졌다고 여겼으나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었던가. 복귀 명령은 잘못 배달된 편지 같았다. 열다섯 살 난 딸이 있고, 아내가 있는 그가 여기에서의 삶을 정리해야만 한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내에게 향하는 그의 마음은 어린애다운 면이 있었다. 남편을 아무리 사랑한대도 자유를 버리고 굶어 죽을 수도 있는 북으로 갈 거라고 믿었던 것인가.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하니 딸아이를 데리고 가겠다는 표현을 보고는 그는 이상(理想)에 사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갈 테면 혼자 가라고 말하는 장마리의 의견에 동감했다.






 

장마리가 여자가 아닌 엄마였음을 깨닫는 장면이었다. 딸아이를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모두 장마리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했던 거다. 가족이란, 더군다나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나 싶다. 물론 장마리는 자기보다 훨씬 어린 남자애와 불륜에 빠져있었지만, 아이를 위해서는 엄마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가장 자신다운장편이라고 표현했다. 작가와 비슷한 나이의 주인공이고, 간첩이나 빨갱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시기였다. 지금은 어떤가. 간첩이 있기는 한가. 전 세계로 여행 다닐 수 있는 시대에 간첩은 낯선 단어다. 생각해 보면, 지금도 김기영 같은 인물이 없다고 보지도 못하겠다. 남파간첩으로 내려왔으나 별다른 지령은 없고, 그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으로 거주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기영이라는 인물의 하루는 고통스러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를 감시하는 자, 그를 잡으려는 자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수 있다. 이토록 평화로운데, 북으로 돌아가고 싶겠나. 그의 번민이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귀환 명령을 받은 김기영, 연하의 연인에게 푹 빠져있는 장마리, 친구가 좋아한다는 남자애의 생일날 그의 집에 찾아가는 현미. 이처럼 세 명의 한 가족은 일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마주하고 허망하게 무너지는 하루에 마침표를 고하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할 수 있는 것의 경계에서 한 가족을 통해 한국이 걸어온 역사를 마주할 수 있다. 인물들은 각자의 사건을 겪으며 비로소 삶의 통찰력을 키운다. 삶은 별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필사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썼던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소중해지는 순간이 온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비로소 머물고 싶은 현재에 안착하게 된다.

 

 

#빛의제국 #김영하 #복복서가 #김영하30주년기념특별판 #한국문학 #한국소설 #산문선 #단편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투명한 나선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투명한나선 #히가시노게이고 #북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부랴부랴 이 책을 꺼내 읽었다.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계속 나올 줄만 알았는데, 그가 오랫동안 암 투병을 해왔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삶은 이처럼 허망하다. 죽음은 한순간이라는 것.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책을 읽었다.

 



투명한 나선은 갈릴레오 시리즈의 열 번째 책으로 유카와 마나부의 개인사가 나와 새로운 전환점을 도는 것 같다. 때로는 경찰 구사나기보다 더 정확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이기도 하거니와 냉정한 판단력으로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인물이다. 바다에서 총상을 입은 익사체가 발견되며 소설의 시작을 알린다. 구사나기는 사건을 조사하던 중 유카와 마나부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를 찾아간다. 유카와는 구사나기의 바람과 달리 협조를 단칼에 거절한다. 하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돕겠다고 약속한다.



 

시마우치 소노카는 왜 도피를 한 걸까. 마쓰나가 나에는 왜 소노카와 함께 움직이는 것일까. 네기시 히데미는 시마우치 소노카와 무슨 인연이 있을까. 서로의 관계를 보며 의문이 들고, 유카와의 행동조차 여러모로 궁금증이 생긴다. 아버지와 무덤덤한 관계, 마치 참회를 하듯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위해 집에 와 있는 장면 또한 나이가 들어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오십 대의 관조적인 남자가 보인다. 나이가 들어 제대로 돌볼 수 없을 때,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구사나기와 유카와의 관계는 마치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처럼 콤비를 이루어 소설이 진행된다. 하나의 사건이 생기고, 구사나기가 유카와의 도움을 요청하면 유카와는 못 이기는 척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사건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 그가 아무 말도 안 하면 그건 단서를 발견했다는 뜻이다. 물론 왓슨 박사와 유카와의 차이점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유카와만의 매력이 있다. 시크하면서도 절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그 무심함이 매력이다.

 



워낙 다작을 냈던 작가이기도 하여, 갈릴레오 시리즈 중 읽었던 책을 살펴보니 썩 많지는 않다. 그중 영화로도 개봉되었던 용의자 X의 헌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유카와 마나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그가 경찰이나 탐정이 아닌 대학교수 겸 물리학자라는 점이다. 냉철한 판단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때로는 구사나기보다 앞서 추리하고 사건을 해결한다. 그래서 현재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유카와 마나부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난 이번 작품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유카와 마나부의 새로운 매력을 느꼈었는데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라니 안타까움이 크다. 이전보다 더 인간적인 면이 엿보였던 것만큼 더한 매력을 발산했을 텐데 말이다. 삶은 이처럼 의도치 않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숨겨두었던 진실이 드러날 때도 있는 법이다. 때로는 진실이 드러날까 조바심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네기시 히데미의 마음에 공감하는 이유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은 죽게 되어있다. 소설 속 죽음은 짜릿한 재미를 위한 책이지만 삶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상황이 다를 뿐이다. 독자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주인공을 보며 삶이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선택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걸 느꼈다.



 

이번 작품에서는 단편 겹치다가 수록되어 있다. 유카와 마나부의 가족사가 나와 당황했던 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카와 마나부의 연구실에 구사나기가 다시 등장했다. 물론 새로운 사건이 발생해서다. 물론 새로 맡은 사건이 난항을 겪자 찾아온 것이다. 이제야 갈릴레오 시리즈의 유카와 마나부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안타깝다. 전작들을 찾아 읽어 보는 수밖에 없겠다.

 

 

#투명한나선 #히가시노게이고 #북다 #미스테리소설 #갈릴레오시리즈 #일본소설 #일본문학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onan 2026-08-27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달이 지났는데 오늘 알게됐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인데 암투병중인 것도 몰랐습니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읽을 수 없다니 슬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