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주정뱅이 #권여선 #창비




언젠가부터 이 소설이 자꾸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어디를 가든 따라오는 무엇처럼 내 시선에 띄었다. 제목이 주는 마력이 있는 것 같다.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그런 책 말이다.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가 구매했다. 책탑의 아래쪽에 있다가 연휴에 슬쩍 올라온 책이기도 하다. 드디어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엔 장편소설인 줄 알았다. 책을 펼치고 주정뱅이들의 삶을 말하는 단편임을 알았다. 7편의 단편에서 각자의 삶을 이루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인간의 내면과 그 이면에 있는 감정들은 결코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흔셋의 나이에 결혼식장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수환과 영경이 주인공인 봄밤을 보자. 사업 실패와 이혼, 신용불량자인 수환, 교사였던 영경은 이혼 후 양육권을 가졌으나 남편과 시어머니가 짜고 아이를 데리고 이민 가버린 상황에 맞닥뜨린 후 중증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류머티즘 환자인 수환이 입원한 요양원에 아파트를 정리해 입주금을 내고 영경이 들어왔다.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알기란 어렵다. 고통을 참아가며 영경의 음주 외출을 배웅하는 수환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이 와도 상대방을 향한 감정은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수환이 죽은 후 알코올성 치매로 다시 요양원에 입원한 영경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차라리 잘된 일일 지도 몰랐다. 수환과 영경을 지켜보며 먹먹해졌다. 삶의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헌신하는 모습에서 무심한 마음을 지녔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이모라는 작품 또한 봄밤과 비슷한 양상을 띠는 소설이다. 남편에게 큰이모와 외삼촌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가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 오후 큰이모를 만나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평생 직장생활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이모는 시외삼촌이 도박 사고를 칠 때마다 도와주었다. 자유롭게 삶을 살고자 했던 이모는 편지 한 장을 써놓고 사라졌다. 췌장암 선고를 받고 투병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군가에게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위로받고 싶은지도 몰랐다.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106페이지, 이모중에서)

 



제목처럼, 작품의 주인공은 주로 술을 마신다.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 즐거움 혹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술을 멀리하는 사람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는 사람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다. 소설 역광의 주인공도 그런 인물에 가깝다. 신인 작가로 예술인 숙소에 입주했다. 좌담회 때문에 외출했다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공용 발코니에 누군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숙소로 들어가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는 모습에서 알코올 중독자일 거로 짐작되었다. 예술인 숙소에 위현이란 작가가 입주하고 그와 술을 마시며 그가 공용 발코니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다. ‘매초 매초 알코올의 메시아가 들어오는 게 느껴집니다라고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글이 안 써지면 술에 의지해 글을 써보려는 작가의 고통과 절망이 느껴졌다. 제목 역광처럼 비친 그림자에서 상상 속 인물의 흔적을 찾으려는 작가를 비춘 것 같았다.

 



곧 헤어질 부부와 이별 여행을 떠나는 삼인행에서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헤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고, 박사 과정을 수료한 여성과 헬스트레이너가 만나 헤어지는 이야기인 은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사랑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게 한다. 물론 이면의 진실은 나중에 드러나지만 말이다. 반듯한 청년으로 보였던 사람이 내뱉는 말투에서 실망하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서로 다른 층위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제목처럼 느껴졌다. 실내화 한켤레는 고등학교 시절 이후 오랜만에 만난 세 명의 친구들이 다시 만나 하룻밤을 보내며 과거 헤어진 이유를 찾는다. 관계라는 것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누구 하나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모두의 노력으로 관계가 이어지는 것이다. 다시 만나도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 같은 것이다.



 

권여선 작가의 이름은 익숙하나 작품은 처음이었다. 삶을 관통하는 주제와 내면의 깊이가 묻어난 인물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계속 읽고 싶은 작가였다. 권여선 작가를 제대로 알게 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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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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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구병모 #문학동네

 



타인과 눈을 마주치거나 몸이 닿았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다는 작품은 꽤 있었다. 하지만 베인 상처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주인공은 처음이었다. 피가 나는 상처에 손을 넣으면 세균이 묻는 건 당연하고 서로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보통 사람의 경우 베인 상처에 손을 댈 일이 없으므로 자기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정확하게 인지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쁜 일에 이용하려는 사람이 나타날 테고, 그 사람은 위험에 처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상처 읽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인물 중 하나이며, 다른 한 사람은 상처 읽는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 사십 대의 여성으로 아가씨의 독서 선생님이다. 저택에 갇혀 있는 아가씨와 함께 책을 읽고 책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이라는 설정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두 여성 화자 외에 그들의 대상이 되는 나쁜 남자 문오언이라는 이름뿐이다. 이 이름조차 외국 이름처럼 보인다. 오언은 아가씨에게 상처를 읽게 하는 남자다. 이십 대의 상처 읽는 아가씨와 아가씨의 독서 선생님이 소설을 이끌어가고, 그들이 쓰는 말투에서 화자를 분별할 수 있다. 아가씨가 어떻게 상처를 읽게 되었는지 선생님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갇혀 지내다시피 해서 다정함에 기대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물론 선생님은 아가씨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취하긴 했다. 아가씨는 독서 선생님에게, 독서 선생님은 다른 존재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사건의 본질을 파악해야 했다.





 

마음을 읽는 일은 고통이 따른다. 아가씨 앞에서 몸에 상처를 내 피를 흘리며 마음을 읽어보라고 한다면 알고 싶지 않은 일까지 몰려오지 않겠나. 마음을 읽는 사람과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 그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주축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과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이다.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건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겠다. 소설을 읽으며 상처를 헤집어 그 마음을 읽게 하는 나쁜 남자가 도리어 자기의 마음을 읽어달라는 장면에서 의문이 들었다. 이 남자는 어떤 마음인가. 자기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보스에게 처음 면접 보러 간 날에 어떤 장면을 보았다. 거구의 남자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 상처를 헤집어 아가씨에게 남자의 마음을 읽게 했다. 싫은 내색을 하지만 별수 없이 그 남자를 읽어 보스에게 전해주는 아가씨를 보았음에도 입주 독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남편의 죽음, 시부모님의 죽음 뒤 빚을 갚고 집이 필요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눌러앉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에 도망가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면, 신고를 했겠지. 목적이 있었을 거라고 유추하게 되었다.



 

고전 문학 특히 셰익스피어 작품의 인용 구절이 많다. 상처를 헤집어 마음을 읽는 부분에서 베니스의 상인은 피할 수 없는 주제다. 친구를 위해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리고, 빚을 갚지 않으면 심장 부근 1파운드의 살을 베는 조건을 내걸었던 이야기다. 포샤의 현명한 재판으로 기억하는 소설 말이다.

 



네가 읽은 것에 대해 생각하면 돼. 좋고 싫고 같은 것 말고 생각을 하라고.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과 판단과 응용. 작가는 왜 인물의 감정을 안 보여주고 인물이 바라보는 풍경만 실컷 펼쳐놓고 지나가버릴까 하는 것. 우리가 지금 여기 있는 건 이 장면이 슬프다든지 이 서술이 불쾌하다는 호불호 차원의 감상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슬픔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그것을 둘러싼 배경을 분석하고 그 염오가 발휘하는 효과는 과연 무엇인지를 다각도로 생각하기 위해서야…… (61~62페이지)



 

책을 읽는다는 것.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 우리는 책을 읽으며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려 애쓰고, 문학 작품 속에서 우리의 삶을 대신 경험하며 그 의미를 파악하려 질문을 건넨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하려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 못해 생기는 고단함. 때로 그 감정은 이별을 동반하는 수도 있다. 내 마음 같지 않다고 하는 것도 타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독자의 예상과 전혀 다른 인물을 창조했다. 구병모 작가의 매력을 다시 한번 느꼈던 작품이었다. 많은 독자가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절창 #구병모 #문학동네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한국소설 #한국문학 #장편소설 #장편소설추천 #상처읽는사람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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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 고양이
이준희 지음 / 폴앤니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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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고양이 #이준희 #폴앤니나

 



작가들이 그린 미래는 디스토피아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의 발로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인간이 제대로 살 수 없는 세계라고 할지라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소설만 보다가 현실에 머무른 듯한 SF소설을 읽으니, 작가야말로 다양한 방법으로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창작자라는 걸 실감했다. 작가가 추구하는 혹은 만들어놓은 상상의 세계가 불안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 여기게 된다. 여기, 이준희 작가의 SF 세계에서는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달까. 현실적인 미래상이라고 해도 좋겠다.

 



먼저 기억에 관한 소설이 있다. 과거의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 자신의 기억뿐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 고통을 느낀 사람의 기억까지 지우려는 인간의 고통과 죄책감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었던 작품 마인드 리셋이 있다. 그 연장선에 있는 작품 루디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한 소방관의 기억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치유하려는 내용이다. 작품 속 루디는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로 혼수상태에 누워있는 소방관의 기억 속에 들어가 구하지 못했던 요구조자를 구하는 등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기억을 조작한다. 치유되는 듯하지만, 근원적인 고통의 기억에는 다가갈 수 없다. 감정의 전이까지 느끼는 미래의 인간에게도 휴머니즘은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경험의 일부가 아닌가.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그 기억을 삭제하고 싶은 것인가. 더군다나 죄책감을 느끼는 대상의 기억까지 삭제한다면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특별한 기억이 없는 그저 현재를 살아가는 감정이 없는 기계라고 할 수 있겠다.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기억을 삭제하려는 사람들은 정식적인 루트를 벗어나 기억 삭제 과정을 거치려 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아버지가 하던 일을 하는 주인공이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낯설지 않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독자가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표제작이기도 한 평행우주 고양이는 고양이의 눈을 바라보면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는 레나를 기억하는 소설이다. 사람들에게 과한 친절을 베푸는 레나는 자기의 약점 혹은 단점을 숨기고 타인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서 다른 시간으로 이동하여 자기가 원하는 경험을 하는 식이다.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우리는 과거나 미래의 어느 순간을 그리워한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기억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말하는 것 같다.



 

언니는 모를 거예요. 이날의 만남이란 단순히 우연이 아니라는 걸요. 무수히 많은 선택과 우리가 알아볼 수조차 없는 힘들이 만들어 낸 소우주들의 마주침이라는 사실을요. (73페이지, 평행우주 고양이중에서)

 



너와 나의 만남이 소우주들의 마주침, 혹은 평행우주의 한가운데 있다면 어떨까. 스치듯 알게 된 사람들도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이라면, 누군가에 의해 만나는 거라면 우리는 모든 순간 선택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심해의 파수꾼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키메라의 땅이 떠올랐다. 지구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게 된 인간은 바닷속 깊은 곳에 해저 도시를 만든다. 삶의 터전을 옮기기 위해서는 그곳에 존재할 수 있는지 시험해봐야 한다. 바다에서 태어난 새로운 생명체 로비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아이'라고 불린다. 지구에서 해저 도시로 온 인간들과는 고작 몇 개월을 함께 할 뿐이다. 그들과 헤어질 때 언젠가 자기도 육지로 갈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해저 도시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었다. 로비는 향유고래와 대화를 통해 그가 받았던 교육과는 다른 진실을 알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로비 또한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어떤 삶을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 건가.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갈 미래의 한 장면을 만날 수 있다.

 



기억은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궤적이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다면, 혹은 삭제되었다면 누군가를 그리워할 일도, 고통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불안하지 않을까. 과거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모른다면 두렵지 않을까. 언어의 세계를 잇는 기억, 시간의 흐름과 언어가 가지는 흔적이 인간의 삶을 이루는 요소가 아닐까 한다. 기억과 언어 그 경계에서 인간의 삶을 엿보는 작품이었다.

 

 

#평행우주고양이 #이준희 #폴앤니나 ##책추천 #문학 #소설 #소설추천 #한국소설 #한국문학 #SF소설 #SF소설추천 #평행우주 #단편소설 #단편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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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들의 도시 - 독서 여행자 곽아람의 문학 기행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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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그녀들의도시 #곽아람 #아트북스



 

문학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문학 속 장소를 가보고 싶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문학 작품 속 장소에서 책 내용을 기억하고 다시 책을 읽으며 책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문학여행을 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가령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를 방문한 문학 여행자에 관한 기사를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곽아람 기자가 안식년으로 미국에서 1년간 거주할 때 방문한 책 속 도시를 방문한 여행기다. ‘독서 여행자 곽아름의 문학 기행이라는 부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어렸을 때 읽었던 책 속 세계를 탐사하는 독서 여행자라 할 수 있다. 그녀가 방문한 장소에서 어렸을 때 읽었던 주인공을 기억하고 책 속 장소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책의 첫 장부터 마음을 훔친다. 소녀들의 이야기인 빨강 머리 앤의 도시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다. 소설 혹은 애니메이션을 볼 때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찾아보았던 섬이기도 하다. 그저 상상에 불과했던 장소를 다녀왔다는 거에 부러움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사진으로 그 마음을 달랠 뿐이다. 사진이나마 볼 수 있다는 거에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이 책은 2018년에 출간되었던 바람과 함께, 스칼렛의 개정증보판이다. 책을 거의 다 읽을 정도로 저자의 팬인데, 이 책을 건너뛰어서 언젠가 읽어볼 책으로 담아두었다가 개정판으로 보게 되니 반가울 뿐이었다.

 






저자를 처음 알게 된 게 블로그에 연재하는 그림 관련 글 때문이었다.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할 정도로 미술사에도 탁월한 지식을 자랑하는 저자는 어렸을 때 읽었던 문학 작품에 대한 글도 많이 썼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갖고 있어 독자들의 마음을 훔친다.



 

문학이 탄생한 장소가 실재한다는 것만으로 책은 독서 여행자들에게 많은 울림을 준다. 책이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준달까. 문학 작품이 주는 위로 혹은 환대일 것이다. 실재하는 장소에 찾아가 책 속 주인공과 조우하는 듯한 느낌이다. 작가가 작품을 쓴 장소에서 작가의 삶과 글을 쓰게 된 배경 그리고 작품 속 인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방문해 그린게이블즈와 몽고메리 생가를 둘러보는 저자를 보며, 매슈 아저씨에게 재잘거리는 앤의 모습이 떠올랐다. 더불어 매슈 아저씨의 죽음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교사가 되기로 했던 앤이 굽어진 모퉁이에 왔다고 했던 장면은 감동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새로운 삶을 선택을 하는 앤에게 어찌 감동하지 않을까. 책을 부르는 문학여행이다.



 

이십 대 시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한동안 이 작품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다. 누군가 내 인생의 책을 물어보면 항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말했었다. 이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으로 옮겨가긴 했지만 말이다. 책에서 다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미국 남부 도시 애틀랜타나 찰스턴을 보니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스칼렛이 좋았다. 레트 버틀러의 마음을 몰라주는 게 한편으로 안타깝긴 했지만, 모든 선택의 순간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았던 스칼렛이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방향을 선택했다. 적극적인 여성상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책 말미에 저자가 어머니와 일본의 북쪽 도시를 여행했던 내용이 나왔다.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의 배경 도시인 아사히카와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책 빙점이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도 푹 빠져 읽었던 소설이었다. 책 좋아하는 저자인 건 알았지만 빙점까지 읽었다는 건 의외였다. 엄마와 함께 책 이야기를 하며 여행하는 모습이 퍽 다정했다.



 

책이 책을 부른다. 읽었던 책은 반가움에 다시 읽고 싶어지고, 읽지 않은 책은 꼭 읽어보겠다며 목록을 적는다. 책 속의 장소를 여행하며 감동적이었던 내용을 기억해보고 그 장소에서 작품의 배경과 작가의 삶을 떠올린다. 예기치 않는 여행길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함께 간 친구와 새로운 추억을 쌓는다. 문학 여행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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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 산사 - 10년 차 디자이너가 펜으로 지은 숲속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방
윤설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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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산사 #윤설희 #휴머니스트



 

호젓한 산길을 걷는다. 주변엔 부도와 작은 부처상들이 놓여있고, 일주문의 화려함과 그 안에서 지키고 있는 사대천왕의 무서움에 놀란다. 일부러 차가 다니는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선택한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승선교에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물을 흐르는 계곡으로 내려가 승선교와 승선교 안으로 보이는 누각의 풍경에 감동하고 만다. 순천 선암사다. 주말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혹은 이른 봄 매화나 겹벚꽃이 필 때면 일찌감치 길을 나선다. 선암사 입구에서 산채정식을 먹고 선암사로 향하는 길은 계절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 같다. 변하는 계절의 느낌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는다.

 



사진과 글로 만났던 산사의 풍경 대신 그림과 글로 안내한 책이 바로 주말엔 산사. 마치 기다려왔던 것처럼 책을 구매하고 읽기 시작했다. 다시금 산사 여행을 꿈꾸었다. 어딘가에 갈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소가 산사다. 그 지역의 절을 일부러 여행 장소로 정하고 길을 나선다. 전국에 꽤 많은 산사를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 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주말마다 100여 개의 산사를 탐색했던 저자에게 가장 각별한 산사 7곳을 책에 담았다. 7개의 산사에서 두 군데 빼고는 다녀온 곳이라서 반가움이 더 컸다. 산사 여행을 시작한 게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시리즈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의 역할이 컸다. 전국의 산사 혹은 문화유산을 탐사해볼 작정을 했으니 말이다.

 





디자이너인 저자의 그림과 글은 좀 더 책 속으로 이끄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펜 끝에서 묻어나는 산사의 풍경 때문이었다. 산사에 가면 무심코 지나쳤던 사리를 담아놓은 부도의 그림도 오래도록 들여다보게 되었다. 세밀한 그림에 시선이 향하여 한국 고유의 건축미와 산사 문화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고고한 건축물, 너른 마당, 높이 솟은 정원수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한국의 산사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여백의 미가 아닐까 한다. 한국화에서도 여백이 아름다움을 극대화하지 않나.

 



가보았던 장소를 타인의 시선으로 만나면 느낌이 남다르다. 내가 놓쳤던 부분을 다시 볼 수 있고 의미와 용도를 새겨볼 수 있게 했다. 산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비롯해 산사와 관련된 것을 별도로 실었다. 절이 산에 위치하게 된 이유를 보자. 수행자들을 복잡한 속세를 떠나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기 위함이며, 산의 센 기운을 절로 다스리기 위한 풍수지리 때문이었으며, 조선시대에 산으로 쫓겨나 산속에 살게 된 것이다.



 

부석사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부석사 들어가는 길이 꽤 길어 도대체 언제 입구가 나오느냐며 하릴없이 걸었다. 저자의 글과 그림을 보며 생각이 났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낮은 입구를 지나 배흘림기둥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진을 찍었었다. 안양루에서 바라보았던 푸르른 하늘과 숲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산사를 방문하다 보면 의외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한다. 꽃창살의 다양한 무늬, 초록색의 문이나 처마, 거대한 4대 천왕의 화려함. 한옥 건물의 고즈넉함이 살아있는 산사의 풍경은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어루만져주는 듯하다.

 



섬세하게 그린 산사의 풍경에 압도당했다. 네모난 집, 네모난 방에 갇힌 현대인이 꿈꾸는 게 너른 마당과 정원이 있는 집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시골집을 사서 주말마다 다니기도 하고, 땅을 사서 나무를 기르거나 작물을 기르기도 한다. 누구나 갖고 싶은 자기만의 방이 있다. 저자는 자기만의 방을 산사 풍경을 보는 것으로 달랬다. 주말마다 산사를 방문해 그곳의 풍경을 담아 그림으로 그렸다. 그 결과가 이렇게 멋진 책으로 탄생했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주 좋아할 만한 책이다. 산사 여행에 최적화된 안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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