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양귀자 지음 / 쓰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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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양귀자 #쓰다

 

양귀자 작가의 소설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랑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시대적 배경이 달라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며 인물 묘사가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지난 역사의 숨결이 그대로 배어있고,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이웃이었을, 지나간 부모님 세대의 얼굴이었을 그들을 발견하는 시간이 된다.

 

나성여관에는 9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있다. 대학을 포기한 삼수생 우연이 그중 하나고, 오로지 돈만 밝히는 나성여관의 주인 어머니 그리고 미국의 누나가 불러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아버지, 운동권에 있는 형, 세상 화려한 것을 꿈꾸는 누나가 그들이다. 이들 가족뿐 아니라 나성여관의 방 한 칸에 기대어 사는 노인과 노동자로 사는 찌르레기 아저씨가 주요 손님이며 우연과 소통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우연의 시점에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부모의 기대치와 달리 대학에 낙방하는 그 마음과 용돈 때문에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하는 시간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공부 잘하는 형과 다른 상황에서도 그가 느끼는 자격지심이 안타까웠다. 친구들과 만나 서툰 삶을 논하는 장면들을 보고는 이십 대만이 가지는 낭만을 상상했다. 모두 미래를 향해 고군분투하는 십 대 후반, 혹은 이십 대를 거치는 방황이었다.






 

지금과 달리 그 시절에는 휴대폰이 없었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라도 하려면, 누구를 바꿔 달라고 해야 했고, 받을 전화가 있으면 전화기 옆에서 떠나지 못했다. 언젠가 남자 친구와 통화하느라 거실 식탁 밑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여동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기 방으로 가지도 못하고, 거실 한편의 집 전화기 선을 길게 늘어뜨려 숨어서 통화하곤 했었다. 연인이 있다는 걸 절대 숨길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고 할까.

 

예전에는 낭만이란 게 있었다, 고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떠올려 보니 맞는 말 같다. 연인의 전화가 올까 봐 안방 문밖을 서성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집 앞에서 기다리거나 집에 하나 있는 전화를 통해야만 가능했다.

 

운동권에 있었던 형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를 잘해 유명한 대학에 갔지만, 집에서는 만날 수 없는 형이었다.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 없고, 한동안 집을 떠나있기도 했다. 그런 형이 몰래 데려온 사람이 있다. 송장이라고 부르는 이정하라는 사람이었다. 형과 같이 운동권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남영동에 잡혀가 절대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 일로 고문을 받아 산송장이 되었다. 누군가 다가오는 걸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다. 우리는 고문 기술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 시대의 아픈 역사가 떠올랐다. 누군가는 기득권을 버리지 않으려, 누군가는 권력자들에게 빌붙어 그런 행동을 했다. 야만의 시대였다.

 

형이 그 시절 대학생을 대표하는 인물을 가리켰다면, 찌르레기 아저씨는 그 시대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가족을 위해 중동에 가서 돈을 벌어왔다. 고생하는 남편을 위해 잘살아 보겠다고 분투하는 보통 사람들이다. 사기를 당해 가진 돈을 잃고, 돈이 가까워 아픈 아이를 방치했던 아내, 그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갈래갈래 찢어졌다. 찌르레기 아저씨의 일기, 형에게 보낸 부치지 않은 편지 등 90년대의 역사가 인물들 속에 제각각 살아났다.

 

방은, 그것이 제아무리 단순한 치장을 하고 있다 해도 어김없이 그 주인의 정신과 닿아 있다. 주인 없는 방에서는 더욱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느꼈다. (239페이지)

 

살아있는 우리는, 너와 나 그리고 모두 다, 서로 부끄럽고 그러면서도 한없이 소중한 존재들이야.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직시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이 삶을 지탱할 수 없어. (544페이지)

 

읽었다고 생각했던 책. 그러나 읽지 않은 책. 이제라도 읽어서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나성여관에서 움츠렸던 사람들의 새로운 여정을 지켜보고 싶은 것. 우연이 어디선가 잘살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것. 모두가 바라는 희망이 아닐까. 어디선가 안녕하기를.

 

 

#희망 #양귀자 #쓰다 #책추천 #소설추천 #한국소설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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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놀이공원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타나카 타츠야 사진, 권남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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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놀이공원 #아오야마미치코 #타나카타츠야 #문예춘추사

 

꿈과 희망을 주는 놀이공원. 커다란 원형의 관람차, 휘몰아치듯 달리는 롤러코스터 등 심장을 떨리게 하는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지 않는 세계, 마치 미지의 세계에 와있는 것 같지 않았나. 손목에 띠를 두르고 하루의 시간을 보낸 그곳에서 잊었던 추억을 찾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 시간을 보낸다. 삶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일요일의 놀이공원은 이렇듯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찾아온다.



 

요일 시리즈로 친근한 아오야마 미치코와 미니어처 아티스트 타나카 타츠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소설은 더욱 빛난다. 그저 상상의 세계로 끝날 듯했던 일요일의 놀이공원이 다양한 컬러를 가진 무대로 변한 것이다. 앙증맞은 소품은 화려하고 따뜻한 색깔을 띠고, 우리의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 아오야마 미치코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었나!

 



야마나카 아오타 유원지를 아는 사람은 모두 구루구루메라고 부른다. ‘놀이공원이라면 구루구루메지.’ 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용기를 내 처음으로 신청한 데이트에서 유논과 함께 회전목마를 타는 겐토가 그 첫 번째 등장인물이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회전목마에 앉았던 그는 과연 용기를 내 고백을 할 것인가.

 






기다림이란 때로 멋진 일이다.

곧 다가올 소중한 이를 생각하고, 앞으로 시작될 즐거움을 마음속에서 그려 보는 시간, 행복이 조용히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두근거림으로 가득 찬 긴장감, 일찍 도착했기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아껴 둔 여백같은 것. (11페이지)

 



쉰 살가량의 외국인인 듯한 피에로는 커다란 북을 메고 둥둥 치며 시간을 알린다. 무심한 듯 지나가며 풍선을 건네고, 조리 기구를 꺼내어 옥수수 팝콘을 튄다. 소설에서 피에로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깨달음을 준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작은 행동에 감동했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고교 농구 동아리 선수였던 친구 에미리, 메미, 키호, 카에데도 마지막 경기 후 구루구루메를 찾았다. 농구부원으로서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는 걸 서로 대화를 통해 깨달았다. 청춘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므로, 무엇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구루구루메는 우정을 확인하는 계기였으며, 미래에 관한 새로운 희망의 시간이었다.



 

흐름을 바꾸고 싶어지면 타임아웃을 하면 된다. 숨을 고르고, 기운을 추스른 뒤 다시 게임을 시작하면 된다. 거기서 이기든 지든 그 소중한 경험을 안고 다음 시합에 나가면 된다.

계절은 그렇게 빙글빙글 돌아간다. (163~164페이지)

 



구루구루메는 청춘들만 오는 게 아니다. 가족 단위로 찾아와 있는 듯 없는 듯했던 가족의 구성원이지만,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결혼해서 50년을 함께 살았던 칠십 대 부부도 주변을 둘러보며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아이를 함께 키웠고, 조카의 아이에게 줄 선물을 어떤 거로 할지 고민하는 남편에게 한마디 말을 무심하게 건넬 수 있는 것. 오랜 부부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일요일의 놀이공원은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미미한 틈새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 그걸 알아차리고 피에로가 던지는 한마디에 모두 자기가 가진 고민의 끝을 보게 된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고, 자기가 역할을 다했을 때 비로소 한 팀 혹은 한 가족, 연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삶은 이처럼 단순하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에서 손짓하고 있다. 그걸 발견하는 사람이 곧 우리라는 걸 깨닫게 한다.

 



타나카 타츠야의 미니어처 사진을 꼭 한번 찾아보시라. 작가가 사용한 재료와 특징은 기발하며 센스가 넘친다. 무엇보다 빨대와 테이크 아웃용 플라스틱 컵을 이용한 수영장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지친 하루에 마법 같은 풍경을 선물할 것이다.

 

 

#일요일의놀이공원 #아오야마미치코 #타나카타츠야 #문예춘추사 #일본문학 #일본소설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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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준 것 마음산책 짧은 소설
문지혁 지음, 박선엽 그림 / 마음산책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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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준것 #문지혁 #마음산책

 



개인적으로 문지혁 작가의 잔잔하면서도 개인적인 서사가 가득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초급 한국어를 비롯해 중급 한국어에 이어 고급 한국어를 기다리며, 작가가 펼치는 상상력의 세계를 사랑한다. 자전적인 소설이라 마치 작가를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좋아서일 수도 있다. 최근 마음산책에서 펴낸 책들이 자주 눈에 띄고, 읽게 된다. 문지혁 작가의 중편 소설을 읽고 더 읽을 만한 소설이 있을까, 둘러보던 차에 발견한 소설이다. 마음산책의 짧은 소설 시리즈로. 허를 찌르는 이야기가 있는 소설이라 짧은 시간에 한두 편씩 읽기에 좋다.



 

12편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작가가 습작 시절에 썼던 소설, 작가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펴낸 소설 등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가리켜 과거와 현재, 미래의 나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전체적인 느낌은 장르소설 색채가 강하다는 거다. 특히 SF소설은 현재의 추이와 미래에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에 관한 상상력의 세계를 펼치는 일이다.



 

작가가 말하는 미래의 어떤 세계는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책을 읽는 사람이 사라지는 시대, 마지막 종이책을 출간한 작가의 북 토크가 열리는 이야기를 담은 멸종과 생존을 살펴보자. 출판사 관계자를 제외하면 몇 명 되지 않은 참석자들과 북 토크를 시작한다. 거기에서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앞으로 책은 어떻게 될까요?’ 점점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 많다. 종이책은 더더욱 덜 읽는다. 도서 인플루언서로 북적였던 블로그도 방문자 수가 확 줄었다. 포털 사이트마저 도서 부분을 버린 듯하다. 책이 많이 팔려야 북적일 텐데, 책을 읽는 사람이 줄어드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은가. 짧은 영상을 보고 있으면 1시간이 훌쩍 지나버린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장면일 거로 보여 문학 독자로서 마음이 아프다.





 

지구의 배꼽, 혹은 지구에 구멍이 있을까? 과학에 문외한인 내게는 생소한 소식이지만, 사람들 사이에 그런 말들이 있었다고 한다. 홀 시커 Hole-Seeker는 그러한 상상력을 담아 쓴 소설이다. 우주로 출장을 가게 된 주인공이 한 권의 책을 발견하면서 소설이 시작된다. 지구의 구멍을 찾는 사람들의 여정이 나온 내용으로 탐사대장으로 아버지의 아버지, 즉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할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단독 비행을 자주 다녔던 아버지,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 또한 단독 비행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 부자는 할아버지 때부터 끈으로 이어져 있었던 듯하다. 메모에서 보았던 좌표와 비슷한 구간에 들어섰으니 말이다. 상상력의 세계는 이처럼 무궁무진하다. 마치 SF영화를 보는 듯 작가가 상상하는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딘가 거대한 지구의 구멍이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

 



단편 제목이 KISS면 뭔가 달콤한 로맨스가 떠오르지 않나. 연인들이 처음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경계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이 단편은 추리소설에 가깝다. 연쇄살인범을 쫓는 경찰들, 지하실의 열쇠를 열어 들어간 곳에서 발견한 관 그리고 관 속에 든 시체와 영문으로 된 단어가 적힌 종이. 단서를 발견했다고 여긴 형사들은 단어에 적힌 의미를 깨닫고 황급히 지하실을 나서려는데 철컥, 하고 잠기는 문. , 짜릿해. 뒷이야기가 이어질 것만 같은 결말에 미소가 밴다.



 

현재의 우리는 궁금한 것이 있을 때 검색 사이트에서 단어와 문장을 입력한다. 인간들이 쓴 각종 정보를 훑어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을 기웃거린다. 지금은 AI가 답변을 대신한다. 물론 인간이 쓴 자료를 이용하지만 말이다. 최근 어떤 작가가 AI와 대화하는 책을 썼다. 마치 인간처럼 서로 대화하고 대화의 내용을 기억하도록 했다. 우리 또한 해답을 찾고자 할 때 AI를 이용하지 않나. 사진을 이용해 움직이는 영상을 만들고 더 어리고 예쁜 사진을 원한다. 꿈 해몽과 사주를 봐달라고 하기도 하고 업무적으로 필요한 문서를 요청하기도 한다. 다가올 미래의 AI는 소설과 영화처럼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고 봐야 하나. 고유의 칩을 이용해 안드로이드를 사냥하는 인간, 그걸 잡으라는 의뢰인은 거액의 수임료를 제안한다. 자기가 알지 못했던 정체를 파악하는 순간, 인간과는 다른 행동을 할지 모른다. 체이서처럼 말이다.



 

짧은 소설은 누군가를 쫓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연쇄살인범을, 안드로이드를 죽인 살인사건을 파헤치고, 지구의 구멍을 쫓는 자들이 있고, 이들이 살아 숨 쉬고, 정체를 파악하려 애쓰며 누군가를 쫓는다. 당신이 준 것은 순문학을 하는 작가가 초기부터 써왔던 소설집이다. 물론 초급 한국어중급 한국어도 좋았지만, 그는 장르소설을 더 멋지게 쓰는 작가인 것 같다. 그가 쓴 장편 장르소설도 재미있을 것 같다.

다만, 나는 고급 한국어를 먼저 읽겠다. 빨리 나오기를.

 

 

#당신이준것 #문지혁 #마음산책 #짧은소설 #소설추천 #한국소설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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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그레이 윌북 클래식 브론테 세 자매 컬렉션
앤 브론테 지음, 허진 옮김 / 윌북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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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그레이 #앤브론테 #윌북



 

브론테 자매 중에서 유일하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앤 브론테다. 고전문학전집 중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최근에 출간된 와일드펠 저택의 여인을 읽은 후 아그네스 그레이도 읽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책이 두 권이나 되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고전문학이면서 현대의 사회상을 그대로 담은 듯한 작품을 읽으며, 앞서가는 생각을 가진 작가는 다른 법이라고 생각했다.




 

아그네스는 가난한 목사인 아버지, 그와 결혼하기 위해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나온 대지주의 딸인 어머니, 언니와 함께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투자 실패로 돈에 쪼들렸다. 언니는 그림을 그려 돈을 벌고, 어머니는 씀씀이를 줄였다. 부모님과 언니에게 보호받던 아그네스는 자기도 가족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다. 가정교사를 반대하는 부모님을 시간을 두고 설득했다. 뜻을 굽히지 않은 아그네스의 강인함은 어머니의 청혼과도 닮아 있었다.




 

가정교사를 대하는 블룸필드 부인이나 새들을 함부로 죽이는 도련님을 보고 아그네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와는 다른 교육을 받았던 이들과의 차이가 드러났다. 가정교사의 말을 듣지 않는, 가족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는 도련님의 행동과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칭찬을 받은 아가씨가 어떻게 바뀌겠는가 말이다. 가정교사를 무시하는 부인이나 예의를 모르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조금 놀랐다. 아그네스는 흔들림 없이 성실하게 계속 노력하면 아이들도 결국 나아지리라생각했다. 크리스마스 휴가로 집에 돌아왔다가 해고되어 다시 가정교사로 떠난다. 가족이 그리워 휴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장면이 나온다. 가족은 아그네스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존재였다. 아그네스는 어떤 변화든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을 안고 다시 떠날 생각을 했다.

 






고전문학에서 로맨스가 빠질 수 없다. 아그네스에게도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다른 소설 같으면 연금이 많은, 큰 저택을 가진 남자가 등장하겠지만, 앤 브론테는 평범한 남자를 아그네스 앞에 등장시켰다. 가난한 교구 부목사 웨스턴 씨였다. 그는 아그네스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사람을 방문하여 돕는 친절한 남자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마을의 부인에게 성경책을 읽어주거나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다. 저택과 작위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려는 로절리가 웨스턴 씨에게 추파를 보내는 모습을 보자 혼자 질투에 눈이 먼 아그네스를 등장시켜 독자를 즐겁게 했다.




 

앤 브론테는 아그네스에게 주체성과 자립심을 키워주었다. 마음에 든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그를 기다리는 모습 등에서 현대 여성과 비슷함을 발견했다. 와일드펠 저택의 여인에서 주인공이 스스로 그림을 그려 살아갈 방법을 모색했던 것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함께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했다. 아그네스도 가정교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학교를 운영하기로 했다. 앤 브론테의 경험과 꿈을 모티프로 삼은 것 같았다.

 




아그네스는 자부심이 강했다.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 헌신적인 성실함, 지칠 줄 모르는 끈기, 살뜰한 보살핌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가정교사의 지위에 대하여도 자세히 말하였다. 부인이나 아이들이 무시하면 하인들도 가정교사를 무시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여 아이들의 교육을 살피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도록 노력했다.




 

매일 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은 서로 마음과 행동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상대방의 행동이 항상 눈앞에 보이고 말이 항상 들리기 때문에 우리는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끌려가서 결국 서서히 불지불식간에 그들처럼 행동하고 말하게 된다. (158페이지)

 




어떤 사람과 만나 이야기하고 지내는가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 서서히 물들어 비슷한 행동, 비슷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이다. 학부모들은 가정교사만 탓하기도 한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고, 아름다운 숙녀로 변하게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이 형성되지 않느냐 말이다. 가정교사를 했던 경험을 살려 세세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액턴 벨이라는 가명으로 쓴 첫 번째 소설이다. 29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앤 브론테의 작품이 많이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면 좋겠다.

 

 

#아그네스그레이 #앤브론테 #윌북 #브론테세자매컬렉션 #영미문학 #영미소설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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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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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모든것을말했다 #스즈키유이 #리프



 

시인이자 작가 혹은 연극 감독, 자연과학자인 괴테의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괴테라고 하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가 유명하다. 보통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작가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은 모든 말에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고 하거나 괴테가 말하길 ~~~’ 라고 한다는 것이다. 거의 하나님 가라사대와 맞먹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책과 언어의 유희로 가득한 소설이다. 괴테의 문장으로 가득한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철학적 사유를 감상하는 일이었다. 이 소설을 2001년생이 30일 만에 쓴 소설이라고 하는데 믿어지는가.



 

결혼기념일을 맞이하여 세 가족이 식사하러 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홍차 티백 봉투의 꼬리표 부근에 인쇄된 글에서 괴테의 문장을 발견하며 일어나는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괴테라고 써진 글자를 보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 도이치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순간,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도이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자주 썼던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말은 유희의 상징 혹은 마법의 주문 같은 의미였다. 일본 괴테 연구의 일인자로 불리는 그에게 생소한 문장은 그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어디서 읽었는지 찾기 시작하는데, 학자 집안답게 가족 모두 언어의 유희를 즐겼다. 도이치 또한 아내의 아버지 즉 독문학자 운테이 마나부가 그의 스승이었다. 도이치는 괴테 전집을 살피고, 알 만한 학자들 모두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럼에도 쉽게 해답을 얻을 수 없었던 도이치의 고민이 깊어졌다.

 



소설은 철학적인 언어로 가득하다. 옛날에 식당이나 이발소 등의 벽에는 유명한 사람의 말이 들어있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말을 되뇌었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많은 사람이 명언집도 읽었다. 이 소설도 차를 마시며 명언을 음미하라는 의도로 만든 티백 꼬리표를 모티프로 괴테의 말과 그걸 찾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의 순간을 기억하는 어느 한 시절을 말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괴테의 말로 가득한 로맨스 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도이치와 도이치의 아내, 도이치의 딸과 이 소설을 쓴 도이치의 사위가 혼연일체가 되어 괴테의 말을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괴테의 말을 찾아 머나먼 독일까지 방문해 그 진위를 찾고 싶은 학자의 마음이 이 소설의 핵심과 닿아있다.

 






작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이십 대인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이 이처럼 넓고 깊다는 게 놀랍다. 괴테의 말과 그걸 찾는 자의 고민과 통찰이 빛난다. 괴테 연구의 1인자인 학자와 스승의 딸인 아내, 그리고 딸 노리카와 딸의 남자친구 쓰즈키가 마치 하나의 원처럼 엮여 괴테의 말이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확인하는 장면은 가족의 완벽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괴테의 말을 소설적 장치로 썼다는 점도 놀랍다. 고전문학을 고루한 문학이라고 여기지 않는 작가의 사유가 마음에 들었다. 과거 철학자의 말이 작품 속에서 회자되는 일은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여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철학가의 명언을 배우고, 남녀노소가 함께 명언을 찾는 과정을 지켜보는 듯, 화합이란 이런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평소에는 각자의 위치에서 따로 지내는 것 같지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자기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게 인상적이다.

 



자신의 명언 찾기는 결코 의미 없는 짓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반드시 이어져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무언가로부터 생겨났고, 우리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212페이지)

 

 

#괴테는모든것을말했다 #스즈키유이 #리프 #일본소설 #아쿠타가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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