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고백들 에세이&
이혜미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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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입맛 돋우는 책을 만났다. 말로 하는 요리가 있듯, 글로 하는 요리다. 시인이 쓴 글이기에 요리에 관한 시로 읽힌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식탁 위의 재료들로 자신의 특기인 요리를 한다. 여러 편의 시가 되어 우리를 요리의 세계로, 글의 세계로 이끈다. 시인이기에 가능한 시 같은 요리 때문에 눈이 즐겁고 마음이 즐겁다.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아낸 요리 같습니다.

 


라고 시인은 말했다. 요리하기 좋아하는 시인의 에세이를 읽으며 설명만으로도 너무 예쁜 요리가 사진에 담겨 있지 않으면 어떨까, 라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요리보다 멋진 사진으로 오감을 즐겁게 한다. 요리를 해보니, 색감이 곱고 모양이 예쁜 요리가 식욕을 더 자극한다는 것을 안다. 정성으로 만든 음식에서 준비한 사람의 마음이 엿보여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한다.


 



 

 

텃밭에서 나는 재료들을 썩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냉장고에 넣어두고는 잊어버린다. 이러저러한 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말이다. 요리하는 사람은 부지런하다. 재바른 손놀림을 가져야 요리도 더 잘하는 것 같다. 여름에 가지가 많이 나와 다 먹지 못하기에 뜨거운 물에 쪄 간장으로 무치거나 버터를 발라 굽고 장아찌를 만들고는 했다. 여러 가지 채소를 동그랗게 잘라 미리 만들어놓은 라구소스를 넣고 구운 라따뚜이는 꼭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그리스 전통음식 무사카와 이탈리아식 요리 멜란자네를 만들어봐도 좋겠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때 내놓으면 더 좋겠지. 그림처럼 예쁜 요리를 먹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을 그려보았다. 텃밭 정원엔 꽃양귀비도 필 것이고, 수국도 조금쯤 꽃망울을 머금고 있지 않을까.


 

작년 겨울 텃밭에 달래를 심었다. 올봄, 가느다랗게 초록색으로 올라온 달래를 조심스럽게 캐고 깨끗이 씻어 잘게 잘라 쌈장도 만들어 먹고, 달걀찜에도 넣고 비빔밥에도 넣었다. 된장과 고추장, 마늘, 깨에 참기름 듬뿍 넣어 잘게 썬 달래를 넣어 상추쌈을 해 먹으면 정말 맛있다. 시인은 달래를 산 날에는 꼭 육회용 고기를 사서 달래를 넣고 육회를 만든다고 한다. 이것 참 맛있겠다. 군침이 확 돈다.


 


 


 

우리는 사라질 계절과 노닌다. 간절과 간절 사이에서, 예감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는 슬픈 안심 속에서. 시간을 자른 단면들에서 투명한 진액들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느닷없이 향의 기억을 얻은 줄도 모르고. (20페이지)

 


외계문명이 보낸 교신탑 같은 당근, 씨앗을 빼기 위해 칼로 그 중심을 나눌 때 눈동자를 찌르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아보카드, 여름의 부름 토마토. 각종 채소의 쓰임을 한 편의 시처럼 표현해도 되는가. 수란을 건져내며 느끼는 위태롭고 안타깝고, 수란이 터지기라도 하며 슬프고 안쓰러운 감정들. 불현듯 수란이 먹고 싶다. 조심히 건져내어 온전히 남은 노른자를 볼 때마다 이혜미 시인의 이 글이 생각날 것 같다.

 


그때여서 가능한 고백들이 있었다. 잎사귀였던 여름의 기억을 간직한 꿈처럼. 페스토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속기록 같다. 슬픔과 기억과 약간의 빛으로 반죽 된 잠시를. (144페이지)


 



 

 

몇 년 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밤 조림에 도전했다. 밤 껍질 까기가 힘들어 툴툴거렸었다. 시럽에 여러 번 졸여 정성을 들였는데도 내가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았다. 냉장고에 얼마간 있다가 버렸는데 이혜미 시인의 마롱글라세를 보고 다시금 도전하고 싶었다. 최소한 일주일, 열흘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 마롱글라세를 만들어 와인 안주로 먹으면 아주 좋을 것 같았다.


 

깨진 커피콩을 골라내 로스팅을 하는 시간, 원두를 분쇄해 커피를 내리는 시간, 향과 함께 커피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그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그림이 그려질 법하다. 창 너른 탁자에 앉아 창밖의 화분들에서 피어난 색색의 제라늄 꽃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음미하는 시간. 찰나일지라도 모두가 사랑하는 시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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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5-12 17: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저 이런 책이라면 껌뻑 죽거든요.^^;;
근데 님도 저 커피 수동분쇄기 사용하시는 군요!!! 잘 갈리나요??
제 건 팔이 너무 아파요.^^;;;

Breeze 2022-05-12 22:17   좋아요 2 | URL
집에서는 전동을 사용하고요, ㅋㅋㅋ
텃밭 세컨하우스에서 1잔 정도는 제가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갈고 있어요.
핸드드립으로 주로 마시는터라 굵게 조절하면 잘 갈리긴 합니다. ^^

파이버 2022-05-13 17: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 색감이 너무 예쁩니다 글과 사진을 함께 보니 배가 고파지네요. 텃밭을 가꾸신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Breeze 2022-05-13 17:17   좋아요 3 | URL
텃밭 제가 가꾸는 건 아니고요, 신랑이 하는 걸 조금 거들 뿐입니다. ㅋㅋㅋ

mini74 2022-06-10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글도 좋았던 글이네요. 축하드립니다 *^^*

서니데이 2022-06-10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파이버 2022-06-15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eeze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٩(๑˃◡˂๑)۶

thkang1001 2022-06-15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eeze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