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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도대체 뭐하는 분이세요?” 책이 담긴 택배상자가 일주일에 평균 3~4번 집에 오는데 택배 기사분이 간혹 질문을 한다. 그때마다 내 대답은 뻔하다. “뭐하긴요. 그냥 아줌마죠” 집안의 가구 배치를 바꾸기 위해 피아노를 옮겼다. 크고 무거운 피아노를 남편 혼자 옮길 수 없어서 불렀던 이삿짐센터 아저씨는 이담에 이사 갈 때 자기네들 절대 부르지 말라 한다. 이유는 저 많은 책 옮기다 골병든다는 것. 문제는 그렇게 말한 이삿짐센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거다......ㅡㅅㅡa;; .
도서관 자원봉사 때 작은 아이를 봐주시기 위해 집에 오시는 친정엄마는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하시는 말씀. “집이 이게 머꼬?” 방방마다 쌓여있는 책을 둘러보고 혀를 끌끌 차며 “이건 사람 사는 집이 아니다.”, “이러다 집 내려앉겠다”고 하고 곁에 머쓱하게 서있는 사위에게 “책만 자꾸 사들이는 각시 어째 데리고 사노. 야단 좀 치라.”고 하신다. 친정엄마는 알뜰살뜰 살림사는 것보다 책 읽고 모으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딸이 답답하고 못 마땅하신 거다. 허나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걸.
<한국의 책쟁이들>에는 우리나라에서 책에 관한한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한마디로 책 고수 중의 고수들이 털어놓는 일편단심 책사랑 이야기다. 집안일 하다 잠깐 짬이 나서 이 책을 들었는데 초반부터 빠져들고 말았다. 조선시대 이름난 간서치 이덕무의 일화를 시작으로 책 때문에 방고래가 꺼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파트가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사람, 오랫동안 애지중지 모아온 책으로 책 박물관을 개관하거나 아예 부부가 북카페를 차리는 사람, 독서모임에서 평생의 반쪽을 만나 결혼한 사람들... 그들에게 있어 헌책방 나들이는 성지순례였고 가장 큰 슬픔은 책을 공간이 없다는 거였으며 책을 버릴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무너지는 아픔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눈만 뜨면 출근도장이라도 찍듯이 서점으로 달려가서 바리바리 책을 안고 들어오는 그들의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틈만 나면 책 살 궁리만 하지만 그나마 술이나 도박, 사치를 안 하니까 같이 사는 거라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펼치는 좌충우돌 책 애정론에 쿡쿡 웃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때론 고개를 끄덕였고 회사에서 책 구입비를 준다는 대목은 부러워서 샘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병영도서관에 관한 대목이었다. “군인이 총만 잘 쏘면 됐지 뭐가 필요한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창 젊은 시기에, 어떤 분야든 열정적으로 몰두할 시기의 젊은이들에게 그저 너희들은 병역의무만 다하라고 하는 건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병역을 다하는 동안 꾸준히 교양을 쌓아 올바른 가치관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부대에는 병영도서관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아니, 12개의 기지 도서관에 15만 9천여 권이 넘는 장서를 갖추고 있는 미군에 비하면 우리 군 도서관은 아예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고 싶어서 안달하던 어린 시절에 비해 지금의 나는 읽을 책을 쌓아두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난 어린 시절에 비해 더 안달을 한다. 책을 많이 못 읽는다고 책을 더 못 갖는다고 불평을 했다. 많이 읽고 많이 갖고 있는 게 제일이라고 여겼던 거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고 자만에 빠진 자의 모습이란 걸 알 수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간다면 내겐 미래가 없다.
<한국의 책쟁이들>을 만나 다행이었다. 이 책을 통해 책에 목말라하던 과거의 나와 책에 빠져사는 현재의 나를 만났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내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계기를 갖게 됐다. 나만의 작은 도서관을 가꾸기 전에 모두를 위한 도서관을 일궈나가자고. 마침 군복무 중인 조카가 군대에서 도서관을 꾸민다며 내게 도움을 청해왔다. 절묘한 순간의 포착.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걸까. 희미하던 내 미래가 조금씩 뚜렷한 형체를 찾아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