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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하트
온다 리쿠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역시 온다 리쿠!! 그녀의 책은 한번 손에 들면 24시간을 넘기기 힘들다.
내가 그녀의 책을 처음 읽었던 건 <밤의 피크닉>이었다. 작년 여름 휴가때 들고 갔다가 집에 돌아오기도 전에 다 읽어버렸다. 그녀의 짧고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 속을 드러내지 않는듯 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대사,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힘!...이 모든 것에 매료되어 버렸다.
이 책 <라이온 하트>는 아이를 재우고 집안일도 끝난 자정 넘어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장을 덮을 땐 이른 새벽, 창밖은 밝아지고 있었다. 한창 로맨스 소설에 몰두하는 사춘기 소녀도 아닌 두 아이의 아줌마가 사랑이야기가 담긴 소설로 밤을 새다니. 내게 아직도 소녀적 취향이 남아있는건가? 그럼 정말 좋겠지만...그건 아니다.
“11월 27일. 런던대학 법학부 명예교수인 에드워드 네이선과 연락이 두절된 지 2주일이 지났다.” 이렇게 시작되는 부분을 읽는 순간, 누구나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에 포로가 되고 그들의 행적을 쫓는 추격자가 되고 만다. 에드워드가 남긴 단서, ‘from E. to E. with love'라고 수놓인 하얀 레이스 손수건과 분위기가 서로 다른 다섯장의 그림, 방 안 가득 남아있던 로즈 티의 향기...이 세가지를 가지고 출발해보자.
이 소설은 5개의 장으로 이뤄져있다. 또 그 각각의 장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등장인물이 다르다. 하지만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인공이 있으니 바로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다.
나타날 때마다 나이는 제각각 다르지만 속은 모두 같은 인물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겉모습은 미묘하게 달라서, 많이 닮은 다른 사람같다. - 52쪽.
이 책을 읽으면서 불교의 윤회를 떠올렸다. 지금의 생이 끝나도 다음의 생이 있다. 그렇게 수레바퀴처럼 돌도 도는 것...하지만 현생의 삶이 내생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현재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들었다.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도 그런걸까? 영혼의 울림이 느껴지는 유일한 사람, 유일한 사랑을 만나기 위해 평생동안 기다리고 또 다음생을 기약한다.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 항상 나를 사랑해준, 언젠가 만날 그 날만을 기다려왔던 사랑. - 85쪽.
데자뷰라고 했던가? 처음 보지만 예전에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느낌. 나도 그런걸 경험해본 적은 있다.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는 반복되는 꿈과 환상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들의 만남에는 항상 이유와 목적이 존재한다. 때로 그들은 상대방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건다.
우린 아주 짧은 시간 밖에 함께 있지 못해요. 반드시 어디선가, 각자의 인생 어디쯤에선가 만난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찾아오는지는 수수께끼예요. -44쪽.
생을 거듭하며 다시 만난 그들에게 서로의 모습은 중요치 않았다. 12살의 어린 아이든, 여신같은 아름다운 모습이든 죽음을 앞둔 노인이든... 그 사람 속에 깃든 영혼의 아름다움을 알기에.
이윽고 나는 엘리자베스를 만났다. 늙기는 했지만 역시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영혼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시간은 항상 우리 안에 있다. - 125쪽.
하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 그들이 만남을 반복하면서 서로에게 자신을 일깨우는 걸 보고 있으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들은 전생의 기억을 현생에 갖고 태어나는 걸까, 예지몽이나 환상으로 미래의 일을 알게 된 걸까, 아니면 SF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공간을 넘어서는건가?
우리는 몇 번이나 만났지만 맺어진 적은 없어요. 하지만 헤어진 순간부터, 다시 만날 순간을 한없이 기다려요. 태어나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이유같은 건 몰라요. 하지만 만나고 싶었어요. 안 그런가요? -146쪽.
그렇다면 소설의 첫부분에서 실종된 에드워드 네이선은 어디로 갔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찾아헤맸다. 어디 숨은거야?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만난 사람이 20세기의 그 에드워드인건가?
그렇다면 누구의 꿈일까. 나는 그걸 찾기로 결심을 했지. 오랫동안 수천 수만 명의 꿈을 떠돌다 우연히 당신의 꿈에 이르게 되었지...설마 당신일 줄은 몰랐어. 이름은 알았지만, 여기가 시작일 줄은 - 299쪽.
로맨스에 SF적 요소를 더하니 이런 묘미가! 치밀하고 탄탄한 온다리쿠의 스토리 전개에 감탄했다. 하지만 저자가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했던 탓인지 후반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느슨해진 느낌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알 수 없는 대목들이 나왔다. 문장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난데없이 갑작스레 나타난 로켓발사장면!
누군가의 메아리, 누군가의 꿈, 누군가의 의지가 남긴 잔영, 그런 것이 몇 번이고 반복되면서 세계와 역사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 - 298쪽.
하지만 제일 마지막에 등장한 노인부부! 그들이 날 위로해주었다. 에드워드란 존재가 그럼 전생의 엘리자베스 동생이었나...하는 충격 속에 빠진 내게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불꽃이 꺼지기 직전 밝고 아름답게 빛나듯 지나온 날이 남은 날보다 많은 그들의 모습에서 운명을 느꼈다.
마음을 가득 채운 뜨거운 것이 몸 어디선가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었다..나는 언젠가 꿈에서 보았다. 나의 연인을, 나의 운명을, 이렇게 온실에서 마주앉아, 역광을 받아 빛나는 그녀의 은발을. - 374~375쪽.
온다리쿠. 그녀는 러브스토리도 역시 독특했다. 그녀 특유의 강렬한 미스테리가 부족한 게 아쉬웠지만 가슴저린 사랑은 그것을 보상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들었던 음악과 미술관에서 본 한 장의 그림, 그것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그녀의 저력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