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이 책은 첫인상부터 나를 압도했다. 55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두께, 전체적으로 검은색의 표지엔 빛을 받아 섬뜩한 해골이 있고 그 해골 위에 깍지 낀 양손을 올리고서 얼굴을 괴고 있는 어두운 표정의 여인이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데 한술 더 떠서 방금 뚝뚝 흘린 것 같은 선명한 핏방울이 양각으로 도드라져 있다.




표지만으로도 미스테리 스릴러물임을 드러내고 있는 이 책은 주검에서 죽음의 원인을 찾아내는 여인, 베수비아 아델리아 라헬 오르테즈 아길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텔레비전 인기시리즈인 CSI 마이애미의 여자부검의 알렉스가 주인공인 셈이다. 하지만 CSI의 알렉스에겐 최첨단 과학장비가 있다면 아델리아에겐 오로지 수많은 해부경험이 있을뿐이다. 게다가 시대적 상황이 자칫 잘못하면 아델리아가 마녀로 몰릴 위험도 있다. 그 두 여인의 공통점이 있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죠?”하고 주검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




중세 영국 케임브리지셔 지방에 아이들이 연이어 실종되고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런데 그 사건의 범인을 유대인이라고 여긴 농부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유대인들이 성으로 대피하게 되자 사건의 해결을 위해 시칠리아왕은 해결사를 영국으로 보낸다. 법집행관이자  사건수사관이며 중재자인데다 정찰자인 나폴리의 시몬과 병을 고치는 도시 살레르노 의과 대학에서 병리학에 가장 조예가 있으며 죽은 자를 담당하는 여자의사 아델리아, 그녀의 하인 아라비아인 만수르. 그들은 떠돌이 약장수로 위장하여 사건이 벌어진 케임브리지로 향한다.




우연히 아픈 제프리 수도원장을 치료해준 것을 계기로 아델리아는 아이들의 시신을 조사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른 곳에서 살해되어 옮겨진 걸 알게 된 그녀는 석회지대인 원들베리링을 조사한다. 하지만 거기서 범인이 십자군원정을 다녀왔다는 것 외에 뚜렷한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시몬은 농민들에게 희생된 부유한 유대인 카임의 금전관계를 조사하던 중 확실한 증거를 찾지만 그로 인해 살해당하고 마는데...




이 소설의 배경이 12세기 중세 영국이어서 다소 걱정을 했었다. 나의 세계사 지식이 얕아 책내용을 혹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책표지를 보니 저자인 아리아나 프랭클린는 중세의 필사본을 읽기 위해 라틴어를 배우고 성을 비롯한 수도원을 탐사하는 등 12세기 잉글랜드의 역사를 깊이 파고들었다고 한다. 그것들이 이 소설의 탄탄한 밑바탕이 되어 비교적 어려움 없이 카톨릭과 유대교, 유대인과의 반목과 대립을 비롯한 중세시대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는데 특히 각 등장인물의 성격 묘사가 탁월했다.




# 영향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델리아는 다만 고통받는 한 인간만을 보았다.

# 그녀의 의술에는 환자 머리맡에서의 예절은 포함되지 않는 것 같더군요.

#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잣대란 의학적인 것 밖에 없다. 그녀는 지금 수도원장에게 그가 죽으면 시신을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하려는 게 틀림없다.

# 학교의 시체안치소에서는 아델리아가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때란 오로지 죽었을 때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몇 개의 짧은 문장만 보더라도 아델리아가 오로지 의학밖에 모르는 무뚝뚝한 여인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의 시체에서 죽음의 원인을 추측하는 과정의 묘사는...그야말로 압권이었다.




특히 이탈리아 남부의 살레르노 의과대학!! 난 이 책을 통해 살레르노 의과대학을 처음 알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세계 최초의 대학에 살레르노 대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롭게 알게된 놀라운 사실!!




의료실력은 확실히 뛰어났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법을 깨면서 죽은 몸을 낱낱이 해부하거나 문제가 있는 태아를 여자의 몸에서 제거했고, 여자들도 외과수술을 할 수 있었으며, 수술하느라 살을 찢었다.




이렇게 탄탄한 이야기 흐름이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다소 늘어지는 감이 있었다. 추리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막판 뒤집기! 전혀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건데...이 부분에 관해 이 책은 절반의 성공만 거둔 셈이랄까.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적도착증을 보이는 범인의 살벌한 심리묘사가 없었다. 그게 바로 추리소설의 백미인데...




또 한가지 아쉬웠던 것은 범행을 저지른 공범을 밝히는 과정에서 주인공인 아델리아의 활약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헨리2세가 북치고 장구치고 있었다. 물론 중세란 시대가 여자가 여행이나 외출을 할땐 당연히 여자동반자가 있어야 된다고 할만큼 여자에게 제약이 많았다고는 하더라도 아델리아를 꿔다놓은 보릿자루, 꿀먹은 벙어리처럼 묘사하다니...이 부분은 솔직히 실망이었다.




저자의 철저한 조사가 탄탄한 구성과 매력적인 주인공들을 탄생시켰고 재미와 스릴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 그게 전부일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이 책은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인간은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간단다. 어떤 때는 천국을 향해 날아오르고 어떤 때는 지옥으로 떨어지지. 자신이 가진 악의 잠재력을 모른 체 하는 것은 자신이 솟아오를 수 있는 고귀한 장점에 대해 눈을 가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둔한 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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