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일은 촛불집회가 시작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청계광장에 앉아 함성을 외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봄비 내리는 광장은 쓸쓸하기만 하다. 이상화가 살아있다면 아마도 ‘빼앗긴 광장’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노래했을 것이다. 1년이 되어서인지 촛불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가 나온다. 촛불에 덴 자들이 해대는 뻔한 얘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1년 전 즐겁게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 속에서도 촛불의 후유증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목소리로 외쳐댔건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고,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한 모양이다. 다시 이런 판이 벌어져도 나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촛불은 성공한 운동이었나? 나에게도 몇몇 기자가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3·1운동은 성공한 운동입니까?” 기자들은 물론 성공한 운동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1920년 3월1일에도 사람들이 3·1운동을 성공한 운동이라고 평가했을까? 조선이 독립되었나, 민족이 해방되길 했나, 수천명의 희생자만 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3·1운동을 한 30년쯤 흐른 뒤에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볼 때 어떤 운동의 성패를 가늠하기에 1년이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촛불과 비교할 때 3·1운동은 단기적으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 민중들에게 사과하지는 않았지만, 통치방식을 바꾸었다.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한 것이다. 촛불에 대하여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무서운 속도로 역주행을 하여 ‘무단통치’의 시기로 회귀하고 있다. 일본 통치배들조차 열어주었던 언론의 자유는 급격하게 유린당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촛불 관련자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기소하고 있다. 촛불 관련으로 기소된 사람이 1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들이 조사받질 않나, ‘피디수첩’ 관련자들이 줄줄이 체포되질 않나, 미네르바가 구속되질 않나, 촛불 직후의 경찰과 검찰은 바쁘기 한량없다. 3·1운동 후 상해 등지로 망명하였던 독립운동가나 열혈청년들이 1년쯤 지난 뒤 국내로 돌아와 아무 탈 없이 지냈다는 것은 어느 태평성대의 이야기였던가? 지금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는 짓은 한마디로 일본 총독부보다도 치졸한 것이다. 그래서 창피하다.
운동도 상대가 있는 법인지라 모진 놈 만나면 응당한 변화를 단기간에 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급해할 이유는 없다. 3·1운동 덕분에 상해임시정부도 수립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만들어졌지만, 나는 3·1운동의 진정한 성과는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 바로 3·1운동을 겪은 사람들이 변한 것이다. 물론 그때도 당장 독립을 이루지 못한 데 실망하고 좌절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일제 시기의 독립운동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3·1운동의 체험이 얼마나 뼛속 깊이 한 사람을 변화시켰는지를 절감했을 것이다. 3·1운동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태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3·1운동의 한계를 딛고 넘어서서 새로운 운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의 맛은 준비된 선수들만 참가했던 의병운동이나 애국계몽운동과는 달리 그야말로 시장 보러 나왔던 장삼이사들이 진하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촛불에 나왔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마음의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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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에 대한 평가와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촛불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했다는 사실 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내 주변에 몇몇은 촛불로 부터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인식이 틀려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소수지만 난 그 소수가 참으로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