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최종] 서양미술사 44 - 모더니즘, 모더니티 : 근대 생활의 기록

19세기 후반 서구 문화의 중심지였던 멋쟁이 파리지엔들이 모여 사는 파리(지도)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다니던 길,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의 풍경, 유원지에서의 물놀이와 야외콘서트, 심지어 극장에서 벌어지는 멋진 쇼와 뒷골목에서 매춘부들이 신사들과 거래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는 것은 마네와 인상주의화가들의 왕성한 작품활동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1 카이유보트 <파리, 비오는 날>
1877년, 캔바스에 유채, 212.2×276.2 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도2 모네 <카푸신 거리>
1873년, 캔바스에 유채
캔자스 시티, 넬슨 어킨스 미술관
 
 

마네의 화실

이러한 근대성의 기록은 마네를 중심으로 한 1860년 작가들에게서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됩니다. 나다르의 사진(도4)에서 보듯 마네는 우아하고 세련된 전형적인 도회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되는 처지였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새로운 근대 사회를 호흡하는 미술가들이 모여들었는데, 팡탱 라투르(Henri Fantour, 1836-1904)가 마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그룹초상화 <바티뇰구의 스튜디오>(도3)에서 마네를 중심으로 뒷줄의 고개를 숙인 르노와르와 그 곁의 졸라, 키가 큰 바지유, 그리고 오른쪽 맨 끝의 모네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미술에서 마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지유(Jean-Frederic Bazille, 1841-1870)가 그린<콩다민 가의 화실>(도5)에서도 역시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이 한가롭게 모여 담소하고 소일하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근대화한 파리의 분위기를 포착하고자 하였습니다.

도3 팡탱 라투르 <바티뇰 구의 스튜디오>
1870년, 캔바스에 유채, 204×273.5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4 33세의 마네, 나다르 사진
 
 
 
 
도5 프레데릭 바지유 <콩다민 가의 화실>
1870년, 캔바스에 유채, 98×128.5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탈신화화

마네의 <올랭피아>(도6)의 도발적인 태도와 시선은 현재에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당시 『일뤼스트라시옹』지에 게재된 삽화(도9)는 당시의 야유와 놀라움의 반응을 잘 보여줍니다. 이 그림이 1865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관객들의 비난과 항의 때문에 경관을 배치하여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16세기 르네상스기의 명작인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도7)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보다 더 외설적인 누드화가 당시에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같은 해 살롱전에 걸렸던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도8) 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현재에 보아도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이런 그림들이 쉽게 받아들여 진 것은 이러한 작품들이 신화나 역사화의 허울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6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캔바스에 유채, 130.5×190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7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 캔바스에 유채, 119×16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도8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년, 캔바스에 유채, 130×225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9 베르탈 < 고양이의 꼬리, 바티뇰의 숯검뎅이>
『일러스트라시옹』 1865년 6월 3일자, 목판
 
 
마네의 올랭피아가 파리의 창부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해서 어떤 신화적인 것으로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네는 이미 1863년의 살롱에서도 <풀밭 위의 점심>을 낙선전에 발표하여 충격을 던진 바가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이 주는 충격은 느슨한 붓질과 생경한 색채, 그리고 평평한 화면의 구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전달됩니다. 캔바스의 표면이 창문처럼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문의 형식자체를 보여주는 것, 즉 미술의 형식이 중요해지는 것도 매우 현대적인 양상이라 하겠습니다.
 
 

확대되는 도시: 가로와 철도

근대주의의 옹호자였던 보들레르는 1863년 『현대 생활의 화가』라는 글을 써서 인상주의를 '플라뇌르(Flaneur, 소요자)'의 유유자적하고 재빠른 시선과 결부시켰습니다. 쭉 뻗은 멋진 파리시가지가 만들어 진 것은 나폴레옹 3세의 2제정 때였으며, 피사로의 그림에서 보듯 <오페라 거리>(도10)는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피사로의 그림에서 멀리 보이는 오페라하우스(도11)는 제 2제정기 때 오스망(Baron Haussmann)의 도시 정비사업의 절정을 이루는 사업으로 파리의 사통팔달의 도로가 이 곳을 구심점으로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도10 카미유 피사로 <오페라 거리, 맑음, 겨울아침>
1898년, 렝스
생드니 박물관
 
도11 파리 오페라 하우스 샤를르 가르니에
 
 
 
 
 

철도망이 확장되면서 도시는 교외선을 따라 더욱 뻗어나가게 됩니다. 힘차게 달려 들어오는 기차는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며 인간의 진보에 대한 19세기 과학기술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인상적인 장면인 <생 라자르>역(도12)은 증기 기관차가 '돈키호테의 심장'같은 굉음과 증기를 내뿜으며 역으로 진입하는 바로 이 순간을 그린 것입니다. 파리의 부유한 시민들은 기차를 타고 근교의 야외로 나가 숲에서 소풍하고, 야외의 음악회를 즐기는 등의 세련된 도시 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린 많은 야외의 풍경은 이들의 생활을 잘 보여줍니다. 인상주의 그림들의 배경이 된 라 그르누이유, 상타드레스, 아르장퇴이유 같은 장소는 바로 파리인들이 새롭게 찾게 되던 야외의 유원지였습니다.

도12 모네 <생 라자르 역>, 1877년
캔바스에 유채, 하바드 포그 미술관
 
 
도13 귀스타브 도레 <베시네 야외놀이의 즐거움>
파리 역사 박물관, 1861년
 
 
도14 마네 <기차선로>, 1872-73년
93.3×111.5 cm,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도15 모네 <라 그르누이유>, 1869년
캔바스에 유채, 73×92 cm
 
 
 
 

근대인의 시선

보들레르가 언급한 파리에서의 근대인들의 시선을 따라가 봅시다. 도16의 <카푸신 거리>의 오른쪽 모서리를 보면 이층의 발코니에서 도시화된 가로를 내려다보는 신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그림은 제 1회 인상파 전시회가 열렸던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내려다 본 거리의 풍경입니다. 그러니까 화면의 오른쪽 발코니에 검은 터치로 간단하게 묘사된 신사는 모네의 동료일 것입니다. 아무런 시선의 제약 없이 열린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카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의 <창가의 젊은 남자>를 보면(도17) 이 시선의 주인공이 한가롭게 거리를 관찰하는 파리 부르조아 남성의 시선이라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이러한 시선에 대해서 19세기가 남성중심적인 회화라는 여성주의미술가들의 분석과 비판이 있습니다.

도16 모네 <카푸신 거리>(도2) 부분
 
 
 
도17 카이유보트 <창가의 젊은 남자>, 1875년
캔바스에 유채, 116.2×81 cm, 개인소장
 
 
 
 

시각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오페라의 관람석을 그린 그림이라도 여성작가와 남성작가의 그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 카셋의 그림에서 묘사된, 이제 막 사교계에 입문한 젊은 숙녀들은 분명 여러 시선을 느끼고 긴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도18). 다시 말하면 이 그림은 여성의 입장에서 느끼는 경험의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도19의 르노와르의 여인은 너무나 사랑스럽게 그려져 남성화가의 시선 대상으로서, 이 여인을 애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도18 마리 카셋 <특별성의 두 젊은 숙녀>
1882년, 캔바스에 유채, 79×63.8 cm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도19 오귀스트 르노와르 <특별석>
1874년, 캔바스에 유채, 80×63.5 cm
런던, 코톨드 미술관
 
 
 

쇼쇼쇼: 도시의 볼거리

인상주의는 일반적으로 풍경화가 대부분이지만 에드가 드가는 도20, 21에서 보듯 파리의 오페라나 밤무대의 인공조명아래 놓인 무희들의 모습을 더 즐겨 그렸습니다. 쇼와 음악회와 조명이 어우러진 스펙타클한 공간이 그의 관심이었던 것이지요. 드가는 매우 놀라운 구성능력을 가진 화가였는데 그의 그림은 마치 우연히 잘못 찍힌 사진의 프레임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그림들은 마치 일상에서 마주하는 단편적인 시각의 조각들처럼 보입니다. 그의 이러한 구성은 물론 사진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사진의 일상화 즉 순간적인 이미지를 포획하여 소유한다는 것은 근대인들의 시각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근대인들은 이러한 사진의 시선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상주의 이후 미술가들의 대담한 화면구성은 19세기 유럽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일본 미술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도22의 안도 히로시게(Ichiryusai Hiroshige, 1797-1858)의 일본 목판화에서 보이는 예상치 못한 화면의 공간 구성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배경에 일본판화가 붙어 있는 마네의 그림 <에밀 졸라>(도23)는 이러한 당시의 유행을 잘 보여줍니다.

 

도20 드가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1870년경, 캔바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21 드가 <압상트>
1975-76년, 캔바스에 유채, 92×69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22 안도 히로시게 <비>
1832-34년, 22.3×34.7cm
개인소장
 
도23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1867-6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인상주의의 정치성

인상주의는 사실을 근대인의 시선으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상주의 회화가 프랑스 근대사에서 가장 끔직한 사건의 하나인 파리 코뮌 진압과 때를 같이 하여 형성되었음에도 이런 사실을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의 패배, 굴욕적인 조약, 그리고 폐허로 변한 파리 시가지 등... 프랑스의 인상주의는 제2제정기의 이 끔찍한 내전을 겪은 파리의 모습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몇 년만에 아주 망각한 것처럼 화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도24에서 보듯 튈르리 궁전은 당시 파괴되어 그 후 15년 간이나 복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네의 튈르리 궁전 그림(도25)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기 힘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아름다운 인상파의 풍경에서 어떻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인상주의 미술은 분명 우리에게 순수한 미술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주장만큼이나 비정치적인 무관심도 사실은 나름대로의 이념과 정치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상주의는 19세기 혁명으로 승리한 부르주아들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망각과 은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1870년 이후에 급등하게 된 프랑스의 국가적인 자존심 회복에 동참한 결과이기도 할 것입니다.

도24 파리 코뮌에 불에 탄 튈르리 궁전
 
 
 
도25 모네 <튈르리의 정원>, 1876년
캔바스에 유채, 54×73 cm,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1863년 '낙선전'은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그리고 1874년 인상주의화가들의 첫 인상파 전시회는 흔히 주류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인상주의는 한동안 그 사회적인 문맥보다는 순수미술 그 자체로 우리에게 기억되어 왔습니다. 20세기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말입니다.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인상주의 미술이 오랫동안 대중들의 무시를 받았거나 소외되었던 미술은 아닙니다. 듀랑 루엘(Durard-Ruel, 프랑스와 저명한 화상가문으로 Paul Durard-Ruel이 인상파 화가와 관련이 깊음)과 같은 전문 화랑에서 이들의 작품은 이미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으며, 이미 오래전에 아카데미 미술은 시대에 뒤떨어진 그림이 되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산업사회', '자본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우리시대의 자화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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