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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화실
이러한 근대성의 기록은 마네를 중심으로 한 1860년 작가들에게서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됩니다. 나다르의 사진(도4)에서 보듯 마네는 우아하고 세련된 전형적인 도회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되는 처지였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새로운 근대 사회를 호흡하는 미술가들이 모여들었는데, 팡탱 라투르(Henri Fantour, 1836-1904)가 마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그룹초상화 <바티뇰구의 스튜디오>(도3)에서 마네를 중심으로 뒷줄의 고개를 숙인 르노와르와 그 곁의 졸라, 키가 큰 바지유, 그리고 오른쪽 맨 끝의 모네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미술에서 마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지유(Jean-Frederic Bazille, 1841-1870)가 그린<콩다민 가의 화실>(도5)에서도 역시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이 한가롭게 모여 담소하고 소일하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근대화한 파리의 분위기를 포착하고자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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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3 팡탱 라투르 <바티뇰 구의 스튜디오> |
1870년, 캔바스에 유채, 204×273.5cm |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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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4 33세의 마네, 나다르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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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5 프레데릭 바지유 <콩다민 가의 화실> |
1870년, 캔바스에 유채, 98×128.5cm |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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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신화화
마네의 <올랭피아>(도6)의 도발적인 태도와 시선은 현재에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당시 『일뤼스트라시옹』지에 게재된 삽화(도9)는 당시의 야유와 놀라움의 반응을 잘 보여줍니다. 이 그림이 1865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관객들의 비난과 항의 때문에 경관을 배치하여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16세기 르네상스기의 명작인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도7)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보다 더 외설적인 누드화가 당시에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같은 해 살롱전에 걸렸던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도8) 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현재에 보아도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이런 그림들이 쉽게 받아들여 진 것은 이러한 작품들이 신화나 역사화의 허울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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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6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
1863년, 캔바스에 유채, 130.5×190cm |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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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7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
1538년, 캔바스에 유채, 119×165cm |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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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8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
1863년, 캔바스에 유채, 130×225 cm |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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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9 베르탈 < 고양이의 꼬리, 바티뇰의 숯검뎅이> |
『일러스트라시옹』 1865년 6월 3일자, 목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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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올랭피아가 파리의 창부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해서 어떤 신화적인 것으로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네는 이미 1863년의 살롱에서도 <풀밭 위의 점심>을 낙선전에 발표하여 충격을 던진 바가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이 주는 충격은 느슨한 붓질과 생경한 색채, 그리고 평평한 화면의 구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전달됩니다. 캔바스의 표면이 창문처럼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문의 형식자체를 보여주는 것, 즉 미술의 형식이 중요해지는 것도 매우 현대적인 양상이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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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망이 확장되면서 도시는 교외선을 따라 더욱 뻗어나가게 됩니다. 힘차게 달려 들어오는 기차는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며 인간의 진보에 대한 19세기 과학기술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인상적인 장면인 <생 라자르>역(도12)은 증기 기관차가 '돈키호테의 심장'같은 굉음과 증기를 내뿜으며 역으로 진입하는 바로 이 순간을 그린 것입니다. 파리의 부유한 시민들은 기차를 타고 근교의 야외로 나가 숲에서 소풍하고, 야외의 음악회를 즐기는 등의 세련된 도시 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린 많은 야외의 풍경은 이들의 생활을 잘 보여줍니다. 인상주의 그림들의 배경이 된 라 그르누이유, 상타드레스, 아르장퇴이유 같은 장소는 바로 파리인들이 새롭게 찾게 되던 야외의 유원지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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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2 모네 <생 라자르 역>, 1877년 |
캔바스에 유채, 하바드 포그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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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3 귀스타브 도레 <베시네 야외놀이의 즐거움> |
파리 역사 박물관, 186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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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4 마네 <기차선로>, 1872-73년 |
93.3×111.5 cm,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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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5 모네 <라 그르누이유>, 1869년 |
캔바스에 유채, 73×92 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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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쇼쇼: 도시의 볼거리
인상주의는 일반적으로 풍경화가 대부분이지만 에드가 드가는 도20, 21에서 보듯 파리의 오페라나 밤무대의 인공조명아래 놓인 무희들의 모습을 더 즐겨 그렸습니다. 쇼와 음악회와 조명이 어우러진 스펙타클한 공간이 그의 관심이었던 것이지요. 드가는 매우 놀라운 구성능력을 가진 화가였는데 그의 그림은 마치 우연히 잘못 찍힌 사진의 프레임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그림들은 마치 일상에서 마주하는 단편적인 시각의 조각들처럼 보입니다. 그의 이러한 구성은 물론 사진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사진의 일상화 즉 순간적인 이미지를 포획하여 소유한다는 것은 근대인들의 시각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근대인들은 이러한 사진의 시선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상주의 이후 미술가들의 대담한 화면구성은 19세기 유럽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일본 미술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도22의 안도 히로시게(Ichiryusai Hiroshige, 1797-1858)의 일본 목판화에서 보이는 예상치 못한 화면의 공간 구성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배경에 일본판화가 붙어 있는 마네의 그림 <에밀 졸라>(도23)는 이러한 당시의 유행을 잘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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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0 드가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
1870년경, 캔바스에 유채 |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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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1 드가 <압상트> |
1975-76년, 캔바스에 유채, 92×69 cm |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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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2 안도 히로시게 <비> |
1832-34년, 22.3×34.7cm |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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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23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
1867-68년, 캔바스에 유채 |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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