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43 - 리얼리즘과 아방가르드의 탄생

여기 두 노동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고 있습니다(도1,지도). 해머를 두드리는 나이든 오른쪽 인물과 돌덩이들을 힘써 들어 올리는 젊은 남자는 시선을 돌린 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화면을 꽉 채운 인물들의 단순한 윤곽선과 거친 듯한 무채색의 표면으로 인해 화면에 바짝 다가선 두 인물의 현장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 이 그림에는 '건강한 노동의 모습'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당시에는 노동자의 모습을 화면에 당당하게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도1 쿠르베 <돌깨는 사람>, 1849년, 1850-51년 살롱 출품
캔바스에 유채, 2차 대전으로 파괴
 
 
도2 매독스 브라운 <노동>, 1852-63년, 캔바스에 유채
137×197.3cm, 맨체스터 미술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일으킨 스캔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중반 서유럽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84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산업혁명의 결과가 눈에 띄게 분명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지요. 노동자들은 프랑스 혁명때부터 봉건질서를 넘어뜨리기 위한 시민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들르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도3)에서 보듯이 1830년 공화정을 다시 세울 때에도 학생, 지식인과 함께 희생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러나 1830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루이 필립은 금융가나 사업가들의 이익을 중시하는 금권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노동자나 농민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시대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영국 역시 노농자의 문제가 중요했는데, 매독스 브라운(Ford Maox Broun, 1812-1893)의 <노동>(도2)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것이 1848년 런던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이러한 갈등은 결국 1848년 혁명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메이소니에(Jean-Louis-Ernest Meissonier, 1815-1891)의 <바리케이트>(도4)는 1848년의 노동자 봉기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동자, 농민들의 불만이 점차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던 시기에 그려진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은 그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던 것입니다. 20세기 공산주의의 실험과 실패를 경험한 지금의 상황에서 되돌아볼 때 사회주의 사상이 형성되는 19세기 중반은 매우 중대한 역사적인 지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도3 들라크르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캔바스에 유채, 260×32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4 메이소니에 <바리케이드, 모르텔르거리 >
1849년, 1850-51년 살롱,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쿠르베가 자신의 고향 오르낭을 배경으로 그린 대작 <오르낭의 매장>(도5)은 발표 당시부터 너무나 혁신적인 작품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후로는 19세기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미술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르낭의 시골뜨기들을 이렇게 큰 화면에 그려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돌깨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던져볼 수 있겠지요.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에 등장하는 다양한 부류의 인간군상들을 보면 1842년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나오는 19세기 전반 부르조아혁명 시기 인간들의 파노라마를 접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좌우로 죽 늘어놓는 형식은 영웅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미술의 구성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부상하던 '인민의 미술 (art of the people)', '평등주의(egalitarism)'를 반영하는 것일까요? 이 그림을 의심하는 파리 부르조아 관객들은 시골사람 쿠르베가 부르조아들의 '매장'을 암시하였다고 여겼습니다.

도5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50년, 캔바스에 유채
315×663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19세기 중반 농촌풍경을 즐겨 그렸던 프랑스와 밀레의 노동자상에 대해서도 쿠르베처럼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앞 주제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밀레의 풍경화는 여러나라에서 매우 평화로운 전원풍의 복고양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한편에서 <씨뿌리는 사람>(도6)과 같은 인물화는 노동자, 농민의 힘을 부각시키는 그림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밀레의 농민상이 찬미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농촌출신의 밀레나 쿠르베의 미술은 본질적으로 세련된 파리인들의 미술운동이었던 인상주의와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합니다.

도6 밀레 <씨뿌리는 사람>, 1850년
캔바스에 유채, 101.6×82.6 cm
보스톤 미술관
 
도7 밀레 <일하러 가는 길>, 1851년
캔바스에 유채, 55.5×46 cm
 
 
 
 
미술에 있어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쿠르베가 1855년 파리 박람회에서 자신의 그림이 거부되자 전시관을 짓고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反官展을 열었던 데서 기인합니다. 쿠르베는 1861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추상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릴 수 없다.”

 

'자신의 시대에 존재하는 것'이 리얼리스트들의 구호였습니다. 쿠르베는 오랫동안 비현실적인 종교화나 신화화만을 중시하던 미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리얼리티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점에서 그의 태도는 당시 콩트나 프루동처럼 실증적이며 유물론적입니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동시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사회비판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미술가는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였습니다.고야를 연상시키는 풍자적인 힘을 지닌 도미에의 판화와 삽화는 당시의 신문이나 여러 잡지에 개재되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도8,9).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비판적인 시선은 점토로 만든 유명인들의 커리커춰에서 유쾌한 힘을 발휘합니다(도10,11).

도8 도미에 <메넬로사와 빅타>
『고대사』연작 중, 1841년
파리, 국립도서관
 
 
도9 도미에 <런던 회담>
1832년, 채색 석판화,
미시간대학 미술관
 
도10 도미에 <기조의 초상>
1833년, 채색 점토
파리, 오르세이미술관
 
도11 도미에 <기욤의 초상>
1832-33년, 채색 점토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시의 발달, 황폐한 농촌, 심화되어 가는 도시민간의 경제적인 격차는 근대사회가 안고 있는 깊은 모순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도12의 <삼등열차>에서처럼, 1860년대의 비좁고 열악한 열차 한켠을 묘사한 그림에서는 이러한 사회적인 갈등이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생 프랑스 근대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비판의 시각을 놓지 않았던 도미에는 사회적 사실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도12 도미에 <삼등열차>, 1860-63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편으로 쿠르베는 미술사에 있어서 새로운 유형의 미술가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1855년 사실주의 전시회에 자신의 미술을 회고하는 대작 <화가의 스튜디오, 알레고리>(도13)을 전시합니다. 고향 풍경을 그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진실을 상징하는 누드의 여인, 그리고 화가가 교류하였던 여러 동료들의 초상이 등장하는 커다란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림은 매우 우화적이어서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쿠르베가 리얼리즘을 주장했음에도 아직 그의 회화는 과거의 역사화와 '근대성의 기록' 사이의 경계에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쿠르베의 태도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미학적인 선택과 판단에 의해 작업하는 '전위화가(아방가르드)'의 출현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14의 자화상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반항정신으로 가득했으며, 파리 브르주아 예술관객의 엘리트 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기존의 예술에 저항하였습니다. 이러한 저항의지는 현대에 와서 매우 중요한 예술의 속성이 되었습니다. 쿠르베 이후로 예술의 역사는 사회의 '전위'로서 나름대로의 특권적인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도13 쿠르베 <화가의 스튜디오, 알레고리>
1855, 캔바스에 유채, 361×598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14 쿠르베 <검은개와 자화상>
1844년, 1842년 사인, 캔바스에 유채
파리 뮤제 드 프티 팔레
 
오늘날 예술가가 사회적인 관례에 앞서 금기의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예술가들의 의무이자 특권인 것이지요.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가들이 인문학적인 식견을 가지고 자신들의 작업을 당당하게 생각했다지만, 교황이나 군주들의 후원을 벗어나 독자적인 기반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현대처럼 예술가의 자율성이 이처럼 강조된 시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쿠르베 이후의 인상주의, 추상회화로 이어지는 '전위미술'이 예술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도16과 같은 19세기 아카데미 미술은 한동안 키치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접은 17세기 푸생이래 다비드까지 이어지는 아카데미 화가에 대한 당시의 융숭한 존경과 접대에 비한다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 합니다. 왕실이나 귀족을 상대로 하는 미술은 시민사회의 부상으로 더 이상 환영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1830-40년대에 이르러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관변미술은 이제 변화를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과거의 지나치게 장엄하고 교훈적인 양식보다는 풍속화적인 요소와 선정적인 장면을 섞어 절충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토마스 쿠튀르의 <타락한 로마>(도15)입니다. 이 작품은 아마도 19세기 살롱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내용은 로마인들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몰락하게 되었다는 다소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작품의 중심에는 당시의 고급창부(마네의 올랭피아에서는 더욱 확연하게 나타나지만)가 그려져 있어 역사와 현실묘사의 절충을 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쿠튀르는 당시의 평가와는 상반되게 20세기에 와서 한때 잊혀졌지만, 그의 아틀리에서는 많은 미술가들이 배출되었으며 마네 역시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작품은 다시 오르세이 미술관의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걸려있어, 작품에 대한 평가와 관심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도15 토마스 쿠튀르 <타락한 로마>, 1847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16 부게로 <님프와 사티로스>
1873년, 캔바스에 유채, 260×180 cm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도1)이나 <오르낭의 매장>(도5)과 같은 작품들은 사회의 현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비판의식이기보다는 주변을 대하는 미술가의 태도의 변화라 하겠습니다. 도15의 <송어>에서처럼 줄에 걸린 물고기를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고 그것을 화면에 꽉 차게 그려내는 미술가의 의도는 과거 역사화를 그리며 교훈을 찾던 미술가의 그것과는 판이합니다. 또한 도18의 <해변>을 보면 쿠르베가 붓보다는 나이프를 많이 사용하여 두툼하게 물감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돌깨는 사람들>이나 <오르낭의 매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두텁고 밀도 있는 캔바스위의 물감자국은 회화라는 장르 본연의 물질성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은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이 같은 노동을 다루면서도 매독스 브라운의 설명적인 작품과 달랐던 이유이기도 합니다(도1.2)

도17 쿠르베 <송어>, 1872년, 캔바스에 유채
52.5×87 cm,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도18 쿠르베 <해변>, 1865년, 캔바스에 유채
53.5×64 cm, 쾰른, 발라프 리카르츠 미술관
 
 
 
 

쿠르베에서 싹이 튼 현실과 사건을 들여다보는 냉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은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미술에 있어서 죽음은 이상화되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15주 주제1과 2참조). 그러나 마네의 죽은 투우사(도19)는 보는 사람을 충격 속에 몰아넣는데, 이러한 이유는 숭고한 명분도 없이 죽음 그 자체만을 대면할 때 느끼는 전율과 같은 것입니다. 쿠르베의 미끼에 걸린 송어(도17)를 대할 때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쿠르베가 주장하였던 리얼리즘, 즉 '동시대성'과 캔바스의 '표면성'을 보다 현대적인 형태로 진전시킨 장본인은 바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였습니다. .

도19 마네 <죽은 투우사>, 1864년, 캔바스에 유채
76×153.3 cm, 워싱턴, 국립박물관
 
 
도20 마네 <황제 막시밀리앙의 처형>
1867년, 캔바스에 유채, 252×305 cm
만하임, 쿤스트할레
 
마네의 회화는 그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나 화면에 물감을 칠하는 형식에서 분명 '우리들의 시대'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보다 분명하게 합니다(마네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마네를 인상파로 여기지만 그는 모네, 르노와르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여는 것을 꺼렸으며 외광 풍경화를 주로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공화주의자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에 대해 줄곧 냉소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황제 막시밀리앙의 처형>(도20)에서 보듯 그의 정치성과 화면의 표면성은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쿠르베에서 마네를 거치면서 미술은 바야흐로 현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