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41 - 오리엔탈리즘 : 제국주의의 시선

미지의 장소와 지나가 버린 먼 과거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지도). 이국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은 이처럼 상상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는 지로데-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ncy, 1767-1824)의 <아탈라의 매장>(도1)은 아메리카의 황야를 배경으로 종족이 다른 인디안 청년과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는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들의 낭만적인 환상을 자극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연인은 한눈에 봐도 인디언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사제복장의 노인이 등장하고 동굴 밖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여자의 순결한 죽음과 기독교적인 신성함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실제 인디언들의 모습과 무관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도1 지로데 <아탈라의 매장>, 180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언젠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농부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외형적인 표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타자로 대하는 인식과 관념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는 유럽의 열강들이 일찍이 발전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부분과 인도를, 그리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베트남과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이러한 팽창의 시대에 서구에서 생산된 시각이미지들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타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근동이나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는 먼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을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자신들과의 문화적인 경계를 설정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만남은 이미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 서 있었다는 거대한 아테네상의 방패에는 아마존과의 전투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도2), 파르테논 신전을 포위한 아마존은 페르시아 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3에서 보듯이, 아폴로 신전의 프리즈에도 그리스 병사와 싸우는 아마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와 같은 동방의 적을 여전사인 아마존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동방의 문명이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2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방패모형복원
기원전 440년경, 토론토,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도3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바사이의 아폴론 신전 프리즈
기원전420-410년경, 대리석, 높이 64 cm, 런던, 대영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도4)는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는 마당에 후궁들을 모아놓고 살육의 축제를 벌이는 사르다나팔루스를 보면서 동양은 미개하고 잔인하다라는 통념을 무의식중에 다시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앗시리아의 왕이 이 같은 가학적인 최후를 마쳤을까요? 서양사에서 마라톤 전투와 같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동방의 무자비한 전제정치에 대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유럽인 중심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와 같은 희곡을 쓴 바이런이나 그림을 그린 들라크르와 역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구요. 우리는 역사상의 명화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4 들라크르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4)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동방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동방취향'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부터 등장하여서 1832년 알제리 합병을 계기로 커다란 유행이 되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도 동방을 기행하거나 그곳을 소재로 한 작업이 증가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화가집단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1832년 북아프리카 여행은 들라크르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때 스케치북에 남긴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형상들과 불타는 색채는 이후 그의 작품의 원천이 되어 <사자사냥>(도6)과 같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도5 들라크르와 모로코에서의 스케치
1832년, 수채물감, 19.3×12.7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61년
캔바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이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도7의 <알제리 여인들>은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입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그림에서 식민지 남성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매우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의 <뱀부리는 사람>(도8)에서는 전통의상을 입고 무기를 든 터어키의 군인들이 구경거리나 기웃거리는 좀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동양을 후진성, 게으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인 라마르틴느는 "회교도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정치는 변덕스러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7.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1834년, 캔바스에 유채, 180×2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제롬 <뱀부리기>, 1870 년경, 캔바스에 유채,
83.8×122.1 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안트 인스티튜트
 
 
 
 

들라크르와가 하렘을 그린 것에서 이미 보았지만, 서양인들의 동방에 대한 기억은 주로 관능적인 여인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남성들은 식민지의 이국적인 여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환상을 품어왔으며 미술가들은 이에 부응한 그림들을 계속 생산했습니다. 나중에는 주로 사진으로 이러한 수요를 채우게 되지만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매체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랫동안 틀지워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반복하게 됩니다. 도10의 1910년대 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 관광엽서에서처럼 말입니다.

도9. 앵그르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1839년
캔바스에 유채, 캠브리지, 포그 미술관
 
 
도10. 프랑스 식민지 엽서, 1910년 경
 
 
 
 
 

유럽을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문화적인 타자, 즉 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인종이나 민족을 표상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에서는 공교롭게도 피부색이 다른 세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오달리스크는 백인으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은 황인으로, 그리고 하녀는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 여인은 모두 아랍인이었는데 말입니다. 식민지 경영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탕에는 지리, 풍토, 민속, 인종학적 분류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략길에 수많은 학자들과 미술가들을 동행시키고 이집트 학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11에서 제롬은 이국적인 색채가 풍부한 의상과 흑인 소년의 인상학적인 묘사를 대단히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분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많은 기록사진들과 같은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도12). 그렇다면 흑인미술가가 자신들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13의 <감사기도>를 그린 헨리 타너(Henry Tanner, 1859-1937)는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어킨스에게서 그림을 배운 미국 흑인 1세대 미술가입니다. 그는 소박한 식사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화가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점에 있기보다는 따뜻한 분위기에 스스로 녹아들어 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도11 제롬 <터어키 군인복장을 한 흑인 소년>, 1869년
 
 
 
도12 알퐁스 베르티옹 인종분류사진, 1893년
 
 
 
도13 헨리 타너 <감사기도>, 1894년
캔바스에 유채, William H and Camille Cosby 소장
 
 
 
 

미술가가 세상을 재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 즉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하는 것들의 관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읽는 것은 미술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 못지 않게 흥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19세기 서구의 미술을 보면서 열강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할까요. 도14,15에서 보듯 우리가 현대미술의 대가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고갱, 마티스의 그림에 분명히 이러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미지들은 어떠할까요? 유감스럽지만 자연과 야만 그리고 여성을 동일화하는 오래된 방식은 출판물의 표지, 광고, 관광포스터 등등을 통해 지금도 이용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도14.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죽음의 영이 지켜봄>
1892년버팔로, 알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도15. 마티스 <목련꽃이 있는 오달리스크>
1923년, 캔바스에 유채, 65 81 cm, 개인소장
 
 
 
도16.『내셔널지오그래피』표지
 
 
 
 
도17. 모로코 관광 포스터,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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