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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농부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외형적인 표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타자로 대하는 인식과 관념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는 유럽의 열강들이 일찍이 발전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부분과 인도를, 그리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베트남과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이러한 팽창의 시대에 서구에서 생산된 시각이미지들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타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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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도7의 <알제리 여인들>은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입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그림에서 식민지 남성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매우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의 <뱀부리는 사람>(도8)에서는 전통의상을 입고 무기를 든 터어키의 군인들이 구경거리나 기웃거리는 좀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동양을 후진성, 게으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인 라마르틴느는 "회교도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정치는 변덕스러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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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7.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
1834년, 캔바스에 유채, 180×220 cm |
파리, 루브르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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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8. 제롬 <뱀부리기>, 1870 년경, 캔바스에 유채, |
83.8×122.1 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안트 인스티튜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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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문화적인 타자, 즉 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인종이나 민족을 표상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에서는 공교롭게도 피부색이 다른 세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오달리스크는 백인으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은 황인으로, 그리고 하녀는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 여인은 모두 아랍인이었는데 말입니다. 식민지 경영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탕에는 지리, 풍토, 민속, 인종학적 분류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략길에 수많은 학자들과 미술가들을 동행시키고 이집트 학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11에서 제롬은 이국적인 색채가 풍부한 의상과 흑인 소년의 인상학적인 묘사를 대단히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분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많은 기록사진들과 같은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도12). 그렇다면 흑인미술가가 자신들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13의 <감사기도>를 그린 헨리 타너(Henry Tanner, 1859-1937)는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어킨스에게서 그림을 배운 미국 흑인 1세대 미술가입니다. 그는 소박한 식사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화가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점에 있기보다는 따뜻한 분위기에 스스로 녹아들어 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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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1 제롬 <터어키 군인복장을 한 흑인 소년>, 18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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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2 알퐁스 베르티옹 인종분류사진, 189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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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3 헨리 타너 <감사기도>, 1894년 |
캔바스에 유채, William H and Camille Cosby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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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가 세상을 재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 즉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하는 것들의 관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읽는 것은 미술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 못지 않게 흥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19세기 서구의 미술을 보면서 열강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할까요. 도14,15에서 보듯 우리가 현대미술의 대가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고갱, 마티스의 그림에 분명히 이러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미지들은 어떠할까요? 유감스럽지만 자연과 야만 그리고 여성을 동일화하는 오래된 방식은 출판물의 표지, 광고, 관광포스터 등등을 통해 지금도 이용되는 있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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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4.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죽음의 영이 지켜봄> |
1892년버팔로, 알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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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5. 마티스 <목련꽃이 있는 오달리스크> |
1923년, 캔바스에 유채, 65 81 cm,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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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6.『내셔널지오그래피』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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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17. 모로코 관광 포스터,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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