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27 - 16세기 북유럽 미술과 종교개혁

우리는 지난 주의 주제3에서 15세기 플랑드르 회화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주제1에서는 16세기의 플랑드르 회화와 현재의 독일지역 그림들, 그리고 1520년대의 종교개혁으로 인한 미술의 변화들을 살펴보겠습니다(지도). 보쉬와 그뤼네발트는 각각 플랑드르미술의 영향권지역에서 활동하였지만 반 아이크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회화와는 매우 다른 독창적인 종교화들을 제작했습니다. 보쉬(Hieronimus Bosch: 1450년경-1516년경)는 현재의 네덜란드 남부지역인 헤르토겐쉬(Hertogenbosch)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반 아이크 전통의 리얼리즘과는 매우 다른 환상적인 그림을 남겼습니다. 그가 그린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하여서 그는 '악마의 화가' '지옥의 화가' 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창의력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냉철한 관찰에서 나온 교훈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의 그림 중 대표작인 <쾌락의 동산>(도2)은 플랑드르 전통의 세 폭 제단화입니다. 그림은 흑백의 그리자이유로 그린 우주의 창조로부터 시작합니다(도1). 그리고 양쪽 패널을 열면 <쾌락의 동산>(도2)이 펼쳐집니다. 닫았을 때의 태초의 모습은 안쪽의 왼쪽 날개인 낙원으로 이동하며, 낙원은 인간의 갖가지 탐욕이 그려진 가운데 패널을 지나 오른쪽의 지옥으로 이어집니다. 아담과 이브의 창조는 질서 있고 평화로운데 비해 탐욕과 지옥의 세계는 무질서하고 기괴합니다.


도1 히에로니무스 보쉬 <쾌락의 동산> 제단화를 닫았을 때 모습
1505-10년경, 220×194㎝, 패널에 유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도2 히에로니무스 보쉬 <쾌락의 동산> 펼쳤을 때 모습
1505-10년경, 패널에 유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가운데 패널, 220×195㎝, 양쪽 날개 패널 각각 220×97㎝
 
 
 
 

 

벌거벗은 인간들은 괴상하게 변형된 파충류나 거대한 식물들에게 갇히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며, 쾌락을 즐기는 남녀를 바라보면 거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운데 패널의 오른쪽 중간과 아래쪽을 보면 사과를 따먹으며 즐기는 남녀가 있으며 사과를 들고 춤추는 두 여자의 머리는 지혜의 상징인 올빼미로 덮혀있습니다(도3). 여기에 그려진 수많은 탐욕은 분명 아담과 이브의 유혹이며, 타락한 인간들은 오른쪽 패널에서 벌을 받게 됩니다. 음악에 지나치게 탐닉한 사람들은 하프에 매달려죽고(도4), 어떤 이는 머리가 새인 옥좌의 왕(?)에게 통째로 먹히고 맙니다(도5). 멀리 유황불이 터지는 지옥 아래엔 커다란 귀에 눌린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꿈틀대고 인간의 영혼들은 우왕좌왕할 뿐입니다. 정상적인 모습은 화면 가운데서 조금 위에 그려진 한 인간의 얼굴뿐입니다(도6). 화가 자신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 인물은 마치 방관자처럼 이 모든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보쉬의 그림은 아마 인류가 상상한 지옥의 모습 중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이미지들입니다. 그러나 보쉬의 지옥은 중세의 지옥을 연상시키는 강박증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모호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성에 대한 통찰로 얻어진 교훈적인 이야기들 같습니다.

 

도3 도2의 중앙패널의 부분
 
 
 
도4 도2의 오른쪽 패널의 부분
 
 
 
도5 도2의 오른쪽 패널의 부분
 
 
 
도6 도2의 오른쪽 패널의 부분
 
 
 
 
 

 

이 그림은 제단화라는 형식 때문에 교회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어서, 이렇게 성적이고 기괴한 그림이 어떻게 교회에 놓여 있었을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이 그림이 1517년에 나사우의 앙리 3세(Henry Ⅲ of Nassau)의 브루셀 궁전에서 발견되었음을 상기해 볼때 1568년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기까지 왕의 개인 소장품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욕망을 절제하라는 교훈을 담은, 개인의 결혼과 관계된 작품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뤼네발트(Mattias Grunewaltl: 1470/80-1528)는 독일 남부출생으로 그의 <이젠하임 제단화>는 이 시대 미술의 또 다른 특성을 보여줍니다. 이젠하임(Isenheim)의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 예배실에 놓여 있었던 제단화이며 양쪽 날개가 두 쌍인 다소 복잡한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일 표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도7.8)가 있습니다. 그림을 먼저 한번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이 너무도 처절하죠? 피부병이 돋아있는 몸과, 고통에 뒤틀린 손가락의 표정을 보면 보는 이까지도 아픔을 느낄 듯합니다. 그의 왼쪽에는 실신할 듯 슬퍼하는 마리아를 요한이 부축하고 있으며, 그 아래엔 막달라 마리아가 오열하고 있습니다. 막달라의 붉은 옷과 흩날리는 금발머리, 그리고 그의 연극적인 제스춰는 우리까지도 전율하게 합니다.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오른쪽 세례요한의 붉은 색들은 검은 바탕을 배경으로 매우 표현주의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도7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이젠하임제단화 부분
, 1515년경, 나무에 유채, 269×307㎝
콜마르, 운테르린덴박물관
 
 
도8 도7의 부분
 
 
 
 
 

 

반으로 나뉘어 그려진 위 그림을 양쪽으로 열면 도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일 왼쪽부터 수태고지, 예수 탄생, 예수 부활로 이어집니다.

 

도9 도7을 양쪽으로 펼쳤을 때 모습
 
 
 

 

이 중에서 <예수의 부활>(도10)을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 환영을 보는 듯하죠?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며 부활하는 예수는 마치 무게가 없는 듯 가볍게 떠올라 이 세상을 빛으로 밝힙니다. 같은 주제를 그린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도11)과 비교해보면 그림의 접근 방법과 보는 이에게 주는 효과가 얼마나 다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피에로가 그린 부활한 예수는 실제 살아 있는 듯 서있습니다. 거기엔 아무런 신비도 없고, 놀라움도 없습니다. 성경의 설명과 확실한 물체의 증거가 있을 뿐입니다. 반면 독일지역의 작가 그뤼네발트는 같은 주제를 기적으로, 신비함으로, 그리고 환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도10 그뤼네발트 <예수의 부활>
이젠하임제단화 부분, 269×141㎝
 
 
 
도11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예수의 부활>
 
 
 
 
 

 

도9의 가운데 패널을 다시 열면 오른쪽 패널에 <성 안토니오의 유혹>(도12)이 그려져 있습니다. 수도하고 있는 안토니오에게 온갖 마귀가 그를 괴롭힙니다. 용머리의 괴물은 머리칼을 잡아 당기고, 올빼미 형상의 괴물은 몽둥이를 내리칩니다. 음산하고 파괴적인 배경에 무너진 건물 위를 날아다니는 기괴한 동물들, 보쉬를 '지옥의 화가'라고 한다면, 그뤼네발트는 '마귀의 화가'라고 불러야 적합할 것 같습니다.

 

도12 그뤼네발트 <안토니오의 유혹>
이젠하임제단화 부분
265×141㎝
 
 
 

 

이 끔찍한 장면의 그림들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였을까요. 이 제단화가 병원 예배실에 있었다는 사실은 해답의 열쇠가 될 듯합니다. 이 그림을 보는 환자들에게 특정한 효과를 기대한 것 같습니다. <안토니오의 유혹>(도12)의 아래 왼쪽 구석엔 피부병으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가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도7,8) 또한 온 몸이 상해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도10)의 살갗은 우유같이 희고 곱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은 전염병이 만연했던 이 지역에서 병의 고통을 이겨내는데 심리적인 도움을 주려한 것 같습니다.

 

 

 

현재의 독일 뉴렘베르그(Nuremberg)에서 태어난 뒤러(Albrech Durer: 1471-1528)는 15세기까지도 후기 고딕식이 지속되었던 독일 지역 미술에 르네상스를 일으킨 화가입니다. 금은세공사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그 자신도 금은세공과 목판, 필사본 화가로 일하였으나 1494년과 1505년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미술을 통하여 인문주의적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린 <아담>(도13)과 <이브>(도14)는 더 이상 원죄를 지은 성경의 인물이 아닙니다. 등신에 가까운 크기로 그려진 아담과 이브는 조화로운 비례와 경쾌함을 지닌,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델입니다.

도13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
1507년, 나무패널에 유화, 209×81㎝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도14 알브레히트 뒤러 <이브>
1507년, 나무패널에 유화, 209×81㎝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그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드로잉과 판화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매체들을 통해 그는 자연과 미술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탐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수채화로 그린 들풀을 보십시오(도15). 그는 북유럽의 전통이 깊은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그가 그린 자연은 아무런 상징도 없이, 마치 하찮은 풀에서 자연의 섭리를 보는 듯 섬세합니다. 무성히 자란 풀들은 서로 엉켜있는 듯 하지만 오히려 아름다운 질서를 보여줍니다. 질경이, 민들레, 잡풀들에 대한 그의 관찰은 경이롭습니다. 그는 경험적인 태도로 자연을 관찰하고 있으며, 그에게 그리는 행위는 바로 이러한 탐구의 과정이었습니다.

 

도15 알브레히트 뒤러 <들풀>, 1503년
종이 위에 수채와 과슈, 41×32cm
빈, 알베르티나 그래픽 미술관
 
 
 

 

그가 남긴 수많은 드로잉과 판화 중에는 인체 비례와 원근법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16의 판화는 비스듬히 놓여있는 류트를 손잡이 쪽에서 보면 화면에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입니다. 화가와 사물 사이엔 한쪽을 움직일 수 있는 화폭이 놓여있고, 화면에서의 사물의 형상을 정하기 위하여 화가의 눈과 사물을 잇는 선이 화면 위치에서 만나는 점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배운 미술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도16 알브레히트 뒤러 <원근법 연구>, 1525년, 목판화
 
 
 
 
 

 

그는 베네치아 체류 중 독일의 인문학자 친구인 피르크이머(Pirckh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에서 나는 신사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뉴렘베르그에서의 화가는 아직도 목수나 양복쟁이와 다름없는 장인이지만 베네치아에서의 화가는 대우받는 신사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의식이 강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나이 26살 때 그린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을 잘 차려입은 신사로 나타내더니 2년 후 28살 때의 자화상에서는 자신을 예수의 형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도17). 왕이나 예수의 상에 주로 사용하는 정면 자세에 손가락으로 바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1512년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회화예술은 수 백년 전의 전능한 왕들에 의해 존중되었다. 그들은 뛰어난 예술가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고, 특별히 대우하였다. 위대한 거장은 하느님과도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도17 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1500년, 나무 패널에 유채, 67×49cm
뮌헨, 알타피나코테카
 
 
 

 

그의 생애 말년에 그린 <네 사도들>(도18)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결산 같습니다. 좁고 긴 두 폭의 화면은 두 사도의 긴 옷이 가득 차지하고, 나머지 두 사도는 거의 얼굴만 그려졌습니다. 단색의 옷은 거대하고 단순하며, 명암처리에 의해 입체감이 풍부합니다. 옷은 이렇게 이탈리아 르네상스전통의 화법으로 그려졌으나 얼굴의 사실적인 묘사는 미화시키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북구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붉은 옷의 요한과 열쇠를 들고있는 베드로, 복음사가 마르코, 그리고 칼을 들고 있는 바오로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은 요한과 바오로를 중심으로 그려졌습니다.

 

도18 알브레히트 뒤러, <네 사도>
1526년, 나무패널에 유채, 각각 215×76㎝
뮌헨, 알타 피나코테카
 

 

그런데 이러한 네 명의 구성은 종래의 종교화에서는 거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그림은 교회를 위해 그린 것이 아니고, 그가 주문 없이 스스로 제작하여 뉴렘베르그의 시청 위원회에 선물한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독일지역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휩싸였고, 뉴렘베르그시는 막 루터주의를 인정하였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분위기와 관계된 것은 아닐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뒤러는 루터를 '참으로 큰 고뇌에서 자신을 구해 준 크리스챤'이라고 존경해 왔으며 프로테스탄트가 거론한 성상 숭배의 금지에 대해서도 마음속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루터가 가장 좋아하는 사도이며, 용감한 바오로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적인 아버지임을 고려하면 루터주의적인 주제의 선택이며, 이를 시청에 선물하였음은 시와 루터교의 평화로운 해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일수도 있겠습니다.

 
 

 

한편 북유럽에서는 성상제작을 금지한 종교개혁의 확산으로 그림의 주문이 줄어들고, 화가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화가들은 종교화가 아닌 다른 장르를 찾아야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북유럽의 미술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버지부터 종교화 화가였던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이 초상화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스위스의 바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홀바인은 그 곳에서 책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그 중엔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맹렬히 비판한 에라스무스(Erasmus)의 『우산 예찬』(1509)도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에라스무스의 초상>도 여러 점 제작하였습니다. 그 중 1523년에 제작한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도19)는 사실적인 얼굴묘사와 모피코트의 질감묘사 등 북유럽 회화의 방식을 전수 받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초상화의 중요 요인은 배경의 기둥이나 책꽂이 선반에 적용한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와 함께 어울려 품위 있고 침착하며 정확한 초상화로 완성되었습니다.

 

도19 한스 홀바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1523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76×51.4cm
개인소장
 
 
 

 

1520년대의 종교개혁으로 그림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홀바인은 그림 주문을 찾아 영국에 가게 됩니다. 1526년 에라스무스의 편지를 들고 영국에 건너 간 그는 그 곳에서 역시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등 인문학자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그림들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1532년부터 영국에 정착한 그는 1536년 영국 왕 헨리 8세(Henry Ⅷ)의 초상화가가 되었습니다. 1540년에 그린 <헨리 8세>(도20)는 왕실 초상화가로서의 홀바인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왕은 1539년 앤 클레브(Ann of Cleves)와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보석이 달린 수놓인 모직 옷과 비단 겉옷, 그리고 모피 등걸이 등의 묘사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섬세한 사물 묘사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홀바인의 역량은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택한 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언제나 초상화 주인공의 성격과 초상화의 제작목적에 적합했습니다. 헨리8세는 정면으로 당당히 서 있고, 과장되게 넓은 어깨는 그의 과감한 정치력을 나타내기 위한 홀바인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도20 한스 홀바인 <헨리8세>, 1540년
나무 패널에 유채, 88.5×74,5cm
로마, 국립고대미술관
 
 
 

 

홀바인의 진정한 수작은 <외교관들>(도21)입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주영 프랑스 대사 쟝 드 딩테빌(Jean de Dinteville)과 죠르쥬 드 셀브(George de Selve) 주교이지만 두 인물 사이에 있는 정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제일 위칸엔 지구본을 비롯한 당시의 첨단과학 도구들이 정연하게 놓여있는 데 반해 그 아래 칸엔 루트와 피리종류의 악기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루트의 끈은 끊어진 채입니다. 그 아래 바닥의 중앙엔 알 수 없는 물체가 애매하게 떠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을 오른쪽 인물의 아래 손 부근에 바짝 가져다 대고 이 형상을 한 번 보십시오. 이 것은 인간의 해골입니다. 글쎄요 홀바인은 이 해골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해골은 전통적으로 인생의 무상을 상징하는 정물입니다. 외교관의 화려한 명예, 첨단의 과학, 음악의 즐거움, 이 모든 것 무상함을 말하려 한 것일까요.

 

도21 한스 홀바인 <외교관들>, 1533년,
나무패널에 유채, 207×209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종교화의 주문이 끊기고 등장한 새로운 장르는 풍속화와 풍경화였습니다. 플랑드르의 화가 브뤼겔(Pieter Bruegel: 1528(-30)년경-1569)이 그린 <농부의 결혼>(도22)을 보십시오. 아마 농민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은 미술의 역사상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벽에 검은 천을 걸고 그 앞에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는 여자가 신부인 것 같습니다. 그녀로부터 왼쪽 두 번째에 앉아서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이가 신랑같습니다. 우리의 시선은 대각선으로 놓인 식탁을 따라 한 가운데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지나 왼쪽 구석의 문으로 향하게 됩니다. 작은 문에서는 하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왼쪽 아래에서 술 따르는 이, 빈대떡을 받아들고 손가락까지 빠는 어린아이, 그리고 문짝을 떼어 받침으로 사용하여 음식을 나르는 이, 식탁에 옮기는 이들을 지나 다시 신부에게 닫습니다. 브뤼겔이 농부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들에 대한 진솔하고, 깊은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묘사한 농부들의 표정과 다소 퉁퉁하게 부풀린 옷은 그들을 어리석게 보이게도 합니다.

 

도22 피터 브뤼겔 <농부의 결혼>, 1568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114×164cm, 빈, 미술사 박물관
 
 
 
 

 

그의 그림은 유머러스하고 웃음을 자아냅니다. <장님들의 우화>(도23)를 봅시다. 장님들이 장대로 서로를 의존하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맨 앞의 장님이 개울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그 다음 사람은 함께 넘어지려 하고, 그 다음 사람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맨 뒤의 사람은 넋 놓고 쫓아오기만 합니다. 맹인들의 이 멍청한 행동에 우리는 웃음이 나오지만 이러한 멍청함이 맹인들뿐이겠습니까. 브뤼겔은 아마 아무 판단을 못한 채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쫓아만 가는 우매한 인간사를 비유했는지도 모릅니다. 웃음의 화살은 우리에게 되돌아와 인간사에 대한 비유로 변하게 됩니다. 그의 유머는 오히려 교훈적입니다.

도23 피터 브뤼겔 <장님들의 우화>, 1568년, 캔버스에 템페라
86×154cm, 나폴리, 국립미술관
 
 
 
 

 

마지막으로 풍경화 한 점을 보겠습니다. 그의 그림 <겨울 사냥꾼>(도24)은 눈 덮인 겨울, 사냥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온 세상은 눈으로 덮인 스산한 겨울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바쁩니다. 불을 지피고, 멀리 언 밭에서는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습니다. 흰눈과 대조되는 짙은 밤색 실루엣의 인간 형상들은 뒷면으로 그려지고, 멀리 보이는 사람들은 개미 같습니다. 브뤼겔이 조감도의 방법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 같습니다. 이 방법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보이게 하기 보다 무수한 자연물 속의 피조물로 객관화시키고 있으니까요.

도24 피터 브뤼겔 <겨울 사냥꾼>, 1565년
나무패널에 유채, 117×162cm, 빈, 미술사 박물관
 
 
 
 

 

브뤼겔의 출생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에 대한 초기의 연구에서는 농촌의 삶을 많이 그린 점에서 그도 농부출신일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위 세 작품의 설명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농부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민에 대한 슬프기까지 한 이러한 성찰은 높은 지성을 필요로 합니다. 그는 아마 당시 지성인들과 교류한 도시 출생의 화가일 것이라는 요즘의 학설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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