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26 - 15세기 플랑드르 회화 : 사실과 상징의 공존

우리가 르네상스미술에서 북유럽(지도)이라고 일컫는 지역은 알프스 산맥 북쪽을 말합니다. 현대의 벨기에와 네델란드 지역인 플랑드르와 독일지방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번 주제3에서는 플랑드르 지역의 15세기 미술을 살펴보겠습니다. 플랑드르 지방은 모직공업과 국제 무역으로 경제활동이 크게 부흥하였고 이와 함께 부유한 시민계급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들의 주문으로 이루어진 미술은 이전 귀족 계급의 미술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면서 종교화임에도 현실이 사실적으로 반영된 새로운 미술을 발달시켰습니다. 이 시대의 이탈리아 회화는 원근법이나 명암법, 고전의 발견 등 이론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회화의 가치를 높인 반면 플랑드르 회화는 여전히 고딕전통을 오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사회는 신흥 시민계급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분이 중요한 정치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나 광장과 같은 대중공간을 위한 거대한 규모의 미술품이 제작된 데 반해 정치적인 힘보다는 실질적인 경제력이 우선하였던 플랑드르 지역의 미술은 비교적 소품이며, 사적이고, 친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15세기 초 귀족미술의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는 것은 이 시대 미술을 아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지만 이후 시민계급미술이 얼마나 혁신적인지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플랑드르 출신의 필사본 화가 랭브르 형제(Limbourg Brothers, Herman, Jean, Paul: 1370/80년경-1416년)는 베리 공작(Duc de Berry)의 미술품 제작에 종사했습니다. 그들이 공작을 위해 그린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도1,2)는 크기가 22.5×13.6cm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기도서로써 12달의 생활을 글과 그림으로 나타낸 책입니다. 그 중 5월은 사랑의 축제로 그려졌습니다(도1,2). 5월의 색채인 녹색 옷을 입은 여인들과 호화로운 옷을 입은 남자들이 야외로 나가고 있으며 그들의 앞에는 음악대들이 축제의 흥을 돋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 1400년과 1410년에 결혼한 베리공작의 딸과 아들인 듯하여, 멀리 보이는 城은 그들이 결혼식을 행하였던 파리의 시테궁(Palais de la Cite) 이라고 짐작됩니다.

 

도1 랭브르 형제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 5월
1412-16년, 필사본 그림, 22.5×13.6cm
샹틸리, 콩데 박물관
 
도2 도1의 부분
 
 
 
도3 랭브르 형제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 9월
1412-16년, 필사본 그림, 22.5×13.6cm
샹틸리, 콩데 박물관
 
도4 도3의 부분
 
 
 

9월은 포도수확이 한창인 과수원과 그들의 주인이 살고 있는 하얀 성(城)으로 그려졌습니다(도3,4). 포도를 따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마차에 실어 나르는 농노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 할 정도여서 5월에 묘사한 아름다운 궁정인들과 너무나 큰 대조를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거둬들인 수확물은 모두 城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성벽으로 굳게 둘러싸인 하얀 성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귀족과 농노계급으로 대변되는 중세 말의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지요. 5월의 장면에서 본 바와 같은 이 시대의 화려한 궁정미술을 우리는 국제 고딕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플랑드르 지역의 새로운 종교화로 들어가 봅시다. <메로데 제단화>(도5)는 1427년경에 제작되었으니, 앞에서 본 기도서 그림과는 15년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부유한 시민이 주문한 이 그림은 비현실적으로 미화된 귀족 주문의 필사본 그림과는 달리 매우 생생한 도시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플랑드르 화풍을 연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년경-1444)이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세 폭의 제단화 중에서 가운데 수태고지 장면부터 보도록 합시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를 낳을 것을 알리고 있는 장면이죠. 마리아가 있는 방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창문은 위 아래를 따로 열 수 있는 방식이며, 나무로 된 천장은 격자로 엮어져 있습니다. 물을 담는 커다란 포트 옆엔 면 수건이 걸려 있고 마리아 앞의 테이블엔 화병에 꽃이 꽂혀 있습니다. 마치 이 시대 가정집의 내부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치 집안 살림도구와 같은 이들 소품들은 또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청동제 그릇에 담긴 물과 화병에 꽂힌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지요.

도5 로베르 캉팽 <메로데 제단화>, 1427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64.1×117.8cm
뉴욕,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
도6 도5의 부분
 

 

오른쪽 패널엔 목수일에 열중하고 있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그려져 있습니다. 수태고지에 요셉을 넣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요셉과 함께 있는 여러 공구들은 예수 수난에 많이 등장하는 도구들이어서 오른쪽 패널은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 광경 또한 당시의 목공작업실 같습니다. 그리고 창 너머엔 꼭대기 층을 삼각형으로 한 북유럽 특유의 집들이 빽빽한, 바쁜 도시의 풍경이 참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었습니다(도7,8).

 

도7 도5의 오른쪽패널 부분
도8 도7의 부분
 
 

왼쪽에서 무릎꿇고 있는 이들은 이 그림의 주문자 잉겔브레히트(Peter Engelbrecht)부부입니다. 당시의 부유한 시민계급들은 귀족들을 모방해서 미술품들을 주문하였는데, 귀족들은 필사본이나, 금속공예품과 같은 값비싼 매체들을 주로 주문한데 반해서 이들은 제단화라는 매체를 선호했습니다. 제단화는 값이 쌀 뿐 만 아니라 그림의 장면에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넣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림에 자신들의 집이나 생활도구들을 넣을 것을 계약서에 명시하였다고 합니다. 제단화는 신흥 브루주아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매체였으며, 이들의 요구는 마치 현장을 그대로 살린 듯한 사실적인 회화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캉팽의 제자인 얀 반 아이크(Jean Van Eyck: 1395-1441)는 캉팽의 회화방식을 이어받아 플랑드르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린 <롤랭 수상의 성모상>(도9)에서는 주문자가 아예 그림의 안으로 들어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 1376-1462)은 브르고뉴 공국의 3대 공작인 선량공 필립(Philippe de Bon)의 수상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정치, 경제, 외교의 권력을 거머쥐었던 권력자였지만 그는 부유한 시민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얀 반 아이크의 이 그림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롤랭수상은 돈주머니를 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림이 진행되는 동안 이 돈주머니는 지워졌지만 그러나 그의 부(富)는 그림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도9 얀 반 아이크 <롤랭수상의 성모상>
1436년,나무패널에 유채, 66×62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0 도9의 부분
 
 
 
 

롤랭수상은 보관을 받고 있는 성모에게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으며 아기 예수는 그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있는 방은 세 개의 아취로 이루어진 아케이드로 열려있으며 바닥엔 대리석 타르시에가 깔려있고 기둥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는 담비털을 가장자기에 두른, 다마스커스산 모직 외투를 입고 있는데 이러한 외투는 당시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고 합니다. 부의 과시는 정원으로 이어집니다. 정원엔 백합과 아이리스 그리고 중국산 작약이 심겨있고 희귀한 공작까지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소품들은 종교적인 상징이기도 하였습니다. 백합은 순결을, 아이리스는 고통을, 가시 없는 장미인 작약은 원죄 없이 잉태한 성모를, 공작은 부활을 나타내던 도상이니까요. 그리고 중경이 거의 없이 이어지는 원경은 강 양쪽의 도시와 롤랭의 영지를 연상시키는 포도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제단화에서는 주문자가 아직 작은 크기로 묘사되었던 시대에 플랑드르에서는 이렇게 주문자를 그림의 주역으로 크게 등장시키는 것은 참으로 대담한 개인의 선전이었습니다.

 

 

 

부유한 상인들은 독립된 초상화도 주문하였습니다. 반 아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도11)의 주인공 죠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그의 부인 죠반나 체나미(Giovanna Canami)는 모두 이탈리아의 루카(Lucca)출신으로 브루주(Bruges)에 정착한 이후 가장 성공한 은행가였습니다. 아마 이러한 신흥시민들은 자신들의 고상함이나 신비감, 그리고 신앙심을 보여주기 위해 초상화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단정한 자세의 부부는 갈색톤을 배경으로, 매우 성실하게 그려져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은 세속적인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선 아르놀피니는 값비싼 모피코트를 입고 있으며 창가엔 수입산 오렌지가 놓여있고, 침대 밑엔 아나톨리아(현재의 터키)산 융단이 깔려있습니다. 이 그림에서도 소품들은 물론 상징의 역할을 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믿음을 상징하며 하나만 남은 샹들리에의 불빛은 이들의 결혼을, 그리고 침대의 붉은 색은 사랑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도11 얀 반 아이크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
1434년, 나무패널에 유화, 82×60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도12 도11의 부분
 
 
 
 
 
 

이 그림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배경에 볼록거울을 배치한 반 아이크의 창조성이었습니다(도12). 두 인물이 있는 방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공간적인 제약을 받게 되어있는데 반 아이크는 배경에 볼록거울을 놓음으로써 천장과 바닥, 창문 밖의 풍경에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습니다. 거울의 더욱 중요한 역할은 이 두 부부 앞에 있었을 화가 자신을 넣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거울 위 벽면에 "얀 반 아이크가 여기에 있었노라. 1434년"이라고 서명함으로써 반 아이크는 자신의 존재를 그림 속에 확실히 하였습니다.

 

 
 

이 거울 속의 화가 이미지와 서명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을 증명하는 증인으로서의 화가라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회화 안에 자신을 넣으려는 화가 자신의 존재증명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시대에 부각되고 있던 화가의 자의식의 발달을 염두에 둔다면 두 번째 의미가 더 잘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시대 화가들은 회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북유럽의 회화, 특히 반 아이크의 그림을 보면 항상 감탄하는 점이 있습니다. 모피의 털은 만지면 미끄러질 듯 윤기 있고 부드러우며, 샹들리에는 진짜 금속을 반짝이게 닦아 놓은 것 같으며, 거울 왼쪽의 묵주는 투명한 보석처럼 영롱합니다. 이렇게 물질의 질감을 그대로 묘사하려는 사실주의는 아마도 새롭게 태어난 시민계급의 물질주의적인 사고방식에 크게 호응하는 취향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상징의 이중성, 그리고 주문자의 강조는 15세기 후반 후고 반 데르 고스(Hugo van der Goes: 1440-82)의 그림에서도 더욱 매력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놓여있던 세 폭 제단화는 평소에는 양 날개패널을 닫아놓았다가 미사나 특별한 행사 때 열게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엔 마치 대리석 조각 같은 도13의 모습으로 놓여 있다가 행사 때는 도14의 화려하고 장대한 광경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전개는 성경이야기의 전개와 맞물립니다. 즉 수태고지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이를 바라보는 관람자는 주변의 목동과 주문자 가족, 그들의 수호 성인과 모두 함께 아기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13 후고 반 데르 구스 <포르티나리 제단화> 양쪽 패널을 닫았을 때의 모습
1475-76년경, 253×282cm, 피렌체, 우피치
 
 
 
 

펼쳤을 때의 모습(도14)을 봅시다. 원근법적인 회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일관성 없는 인물의 비례에 당혹감을 느낄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거대한데 앞에 있는 천사는 작으며, 이들의 뒤에 있는 목동은 또 다시 크게 그려졌습니다. 양 옆 날개 패널의 앞 부분에 그려진, 이 그림의 주문자 포르티나리 가족은 작고 그들 뒤에 그려진 이들의 수호성인들은 거대합니다. 그리고 원경으로 이어지는 배경의 인물들은 또 다시 아주 작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보다 반세기 전에 그려진 얀 반아이크의 <롤랭수상의 성모상>(10주 주제3, 도9)에서 후원자가 크게 그려진 것과 비교한다면 이 그림은 마치 중세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줍니다.

도14 후고 반 데르 구스 <포르티나리 제단화> 양쪽 패널을 펼쳤을 때의 모습
1475-76년경, 나무패널에 유채, 가운데 패널 253×304cm, 양쪽 패널253×141cm, 피렌체, 우피치
 
 

그러나 대상의 묘사는 놀랍도록 사실적입니다. 배경의 쓸쓸한 풍경은 플랑드르의 늦가을을 연상케 하며 수호성인과 주문자 가족은 부유한 시민계급의 세련된 차림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의 눈을 경이롭게 하는 부분은 아마 목동들의 모습일 것입니다(도15).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다 단정히 경배하는데 그들만은 거친 들판에서 일하다가 막 뛰어온 듯한 순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의 자세는 엉거주춤하며 손은 투박하고 입을 벌리며 예수를 바라보는 표정은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성인들과 주문자의 묘사와 비교할 때 이러한 서민성은 명백한 계급의 구분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우아하게 묘사한 이 특권층의 표정은 성인들마저도 모두 차갑게 굳어있는데 목동들의 표정만은 살아있는 듯 생기가 넘칩니다.

 

 

 

이 그림을 주문한 토마소 포르티나리(Tomaso Portinari)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메디치 은행의 브루주(Bruges)지점장이었습니다. 그는 플랑드르 회화에 큰 매력을 지니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이 제단화를 피렌체에 있는 싼타 마리아 누오바 교회(Santa Maria Nuova)의 성 에지디오(Sant'Egidio)제단에 놓으려고 주문하였는데 완성된 해에 바로 피렌체로 옮겨갔으니까요. 이 그림은 곧 피렌체 화단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는 우리가 8주의 주제2에서 살펴 본 사세티 예배실(8주 주제2, 도11,12)을 제작하면서 플랑드르의 3폭 제단화에서와 같이 주문자를 대담하게 양쪽에 배치하고, 목동들의 모습을 그리는데 후고 반 데르 구스의 방법을 적극 응용하였습니다. 인물의 형태에 이상적인 유형을 추구하던 피렌체 화단에서 후고의 이러한 리얼리즘은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도15,16).

 

도15 도14의 목동부분
 
 
 
도16 기를란다이오 <목동들의 경배>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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