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6 - 비잔틴 미술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
비잔틴(Byzantine)(지도)은 현재의 이스탄불을 가리키는 옛 이름으로, 비잔틴 문화라 하면 1453년 터키에 정복당하기까지의 동로마제국 문화를 말합니다. 현대 정치사에서는 이 지역의 중요성이 약화되었지만, 고대 말에는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즉 동서 무역이 가장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비잔틴이라는 지명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고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김으로써 이 곳에 동로마제국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역사의 중심이 서로마에서 동로마로 옮겨오던 시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던 시대,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전이되던 4-5세기의 전환기는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재임527-565)황제 재임기간 중 확고한 동로마의 기독교 문화를 정착시켰습니다. 즉 532년의 시민폭동을 제압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정일치(祭政一致)를 확립함으로써 절대군주일 뿐만 아니라 神이 택한 이 땅의 대리인이 된 것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폭동 진압 후 바로 건립하기 시작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ia,성스러운 지혜)는 비잔틴 교회양식을 대변합니다(도1,2,3,4). 거의 정 사각형에 가까운 평면에, 중앙엔 거대한 도움을 얹고, 양쪽에 반원의 도움을 둘러쌓음으로써 전체가 마치 거대한 동산같이 보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테네의 스카이 라인을 결정하였듯이 하기아 소피아는 바다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콘스탄티노플의 경관을 돋보이게 합니다. 터어키 지배 후 회교의 모스크로 쓰일 때 사방의 탑이 세워지고, 내부의 모자잌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마치 하늘지붕 같은 거대한 도움은 금으로 도금되거나 반짝이는 모자잌으로 장식되고(도4,5), 대리석 벽과 기둥은 마치 레이스같이 잔무늬로 새겨져 있습니다(도6). 현실의 느낌은 최대한 배제되고 신성함이 감도는 이 공간에서 천장의 작은 창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를 맞으면 마치 하느님이 내리시는 빛과 같을 것입니다(도4). 내부에서의 성스러움이 중요시된 비잔틴의 도움은 실용성보다는 종교적 상징이 강조된 건축물로 이후의 종교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도1.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532-37, 콘스탄티노플 현재모습
 
 
 
도2. 트랄레스의 안테미루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옛모습
 
 
 
도3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평면과 입면
 
 
 
도4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내부
 
 
도5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도움부분
 
 
도6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주두 부분
 
 
 
 
 

이탈리아내의 동로마-라벤나
동로마지역의 미술품들은 이후 살펴볼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이 소멸되었지만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동로마 영토였던 라벤나(Ravenna)에는 5-6세기의 미술, 특히 모자잌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서 비잔틴미술의 형성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호노리우스(Honorous)의 이복 누이인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갈라 플라치디아의 묘당(Mausoleum of Galla Placidia)은 외관은 수수한 벽돌집이지만 전체가 모자잌으로 덮인 내부는 영롱하기 그지없습니다(도7,8). 짙푸른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그 한 가운데는 예수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자리잡고, 네 모서리엔 복음사가의 상징이 새겨졌습니다. 즉 복음사가에 의해 떠받들린 하늘의 예수인 것입니다.

도7 갈라 플라치디아의 마우솔레움
425-50년경, 라벤나
 
 
도8 도7의 내부 천장
 
 
 
 
 

북쪽 벽엔 아직 목자 모습인 예수가 보입니다(도9). 초기 기독교 시대의 도상을 이어 받았으나 이 곳의 예수는 남루한 옷을 걸친 목동이 아니라 그리스 전통의 우아한 자세에, 황금빛 옷을 입고, 두광으로 신성함을 드러내는 예수입니다. 그러나 양들과 정원의 묘사는 고대 미술의 서정성을 그대로 보여주어서 고대에서 비잔틴도상으로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보다 1세기가 지난 549년경에 제작된 산 아폴리네르 인 클라세(San'Appolinare in Classe)의 후진 천장의 모자잌은 더욱 비잔틴 방식으로 변화된 풍경과 인물묘사를 보여줍니다(도10). 우선 푸른 하늘은 황금색으로 변하고, 나무와 양들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서 매우 평면적입니다. 이 모자익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아에게 나타난 예수의 변신과 라벤나의 첫 번째 주교 성 아폴리네르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몸을 드러내지 않고 밤하늘의 십자가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비잔틴 미술은 현실의 색과 형태를 최대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금색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함, 신성함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색이지요. 승리의 아치 위에 예수와 함께 새겨진 네 복음사가도 이 땅에 살았던 인간이기 보다 신성한 계시를 신으로부터 받은 네 상징물 즉 사자(마르코), 소(루가), 독수리(요한), 천사(마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도11).

 

도9 <목자 예수>, 도7의 내부
 
 
 
도10 <예수의 변신과 성 아폴리네르>
모자익, 549년경
산 아폴리네르 인 클라세, 라벤나
 
도11 <천상의 예수와 네 복음사가>, 도10의 부분
 
 
 
 
 

산 비탈레(San.Vitale)교회의 모자잌 배치는 예수와, 제정 일치의 수장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부부의 정치, 종교적 위치를 실감케 합니다(도11-15). 역시 온 벽면이 모자잌으로 되어있던 비탈레 교회의 후진엔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짧은 머리의 예수가 있고(도13), 제단 양쪽엔 황제부부가 빵과 포도주를 헌납하는 모습으로 새겨졌습니다(도14,15). 우선 모두 정면이며 왕관과 두광까지 한 황제에게 시선이 집중된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지요? 머리모습만 서로 조금씩 다를 뿐 생김새도 비슷한 인물들은 신체가 길고 양감도 없이 평면적입니다. 신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는 황제의 모습은 정치가의 모습을 공적인 장소에 남기는 것을 삼가 하였던 그리스 공화정 시기의 페리클레스와 매우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로마말기에 인물들을 획일적으로 묘사하고 황제와 가족만이 로얄박스에 크게 묘사하였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황제묘사(5주, 주제3의 도2)나 데오도시우스황제의 오벨리스크 좌대부분의 황제(5주, 주제3의 도6)묘사양식이 그 정점에 이른 듯합니다.

 

도12 <산 비탈레 내부 후진부분>
546-48년경
라벤나
 
 
도13 <우주의 지배자 예수>, 도12의 부분
 
 
 
도14 <우스티니아누스황제와 일행들>
546-48년경
라벤나, 산 비탈레
 
도15 <데오도라 황후와 일행들>
546-48년경
라벤나, 산 비탈레
 
 
 
 
황제그림의 맞은 편엔 황후 데오도라(Theodora)와 일행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황후 역시 왕관과 보석장치, 그리고 두광에 의해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세계의 선택된 존재임을 유감 없이 보여줍니다. 특히 서커스 단원출신의 데오도라는 과단성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여 유스티니아누스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532년의 폭동 때도 황제는 피신하여 도망치려 하였으나 그를 결연히 붙들고 맞서게 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황제 때와는 달리 황후가 특별히 다루어진 것도 그러한 정치적 위치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산 비탈레의 후진을 보면 하늘아래 예수가 있고, 그 아래 제단 양쪽에서 예수에게 헌납하는 황제 부부상이 있는 배치에서 우리는 황제이면서 또한 교회의 수장인 제정일치제도의 군주상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 성상과 성상파괴운동
그럼 비잔틴 미술을 대표하는 성상, 아이콘(Icon)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아이콘이란 그리스어로 형상이라는 뜻의 단어로, 비잔틴에서 예수와 마리아, 성인들의 상을 종교성이 짙은 특별한 형태로 발달시키면서 '성상'이라는 의미를 갖게되었습니다. 성상은 죽은 사람을 대신하는 초상화의 역할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기기독교시대에 본 바와 같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5-600년이 된 예수의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예수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에 적합한 이미지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700년경에 제작된 초기의 예수상은 한 손엔 성경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구원자, 절대권한을 가진 존엄한 자의 모습입니다(도16). 긴 머리와 턱수염은 당연히 그리스 神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상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초월적인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양쪽 눈이 서로 다른 모습에서 미루어 보면 초기의 성상은 현세의 사람을 모델로 하여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같은 지역에서 제작하였다고 짐작되는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도17)상은 당시의 여러 회화양식이 함께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성모자 양쪽의 성인들은 좌우대칭의 엄격한 자세이지만 그 위의 천사들은 스케치풍의 자유로운 회화양식으로 그려졌습니다. 성모자 또한 자세는 정면이지만 눈은 옆을 바라보며, 양쪽 눈과 눈썹이 서로 다른 초상적인 수법을 보여줍니다.

도16 <예수 그리스도>성상
700년경, 86×45cm
시나이 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
 
도17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성상
68.6×49.2cm, 7세기 초
시나이 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
 
 
 

베드로의 초기 성상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 초상입니다(도18). 얼굴과 몸통에서 볼 수 있는 명암처리에 의한 풍부한 양감은 고대회화의 방식인 반면 황금색의 두광과, 화면위의 메달등은 상징적인 중세회화의 기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평면적이고 상징적인 배치를 이미 보았으니 이는 바로 고대말부터 발달된, 주인공을 신성화하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5주 주제2, 도25). 다시 말해 자유롭고 사실적인 고대회화방식과 성상으로서 요구되는 엄격함, 그리고 상징성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도18 <성베드로>성상
6세기 후반
시나이 산의 카타리나 수도원
 
도19 5주 주제2, 도25
<아나스타시우스 영사 딥틱>의 부분
 
 
 
 

성상의 문제는 양식면에서 만이 아니라 상의 쓰임, 효용, 역할의 관점에서 매우 첨예한 논쟁을 야기시킵니다. 초상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성상은 성인의 시신이나 성골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하여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상이 되면 그 앞에서 기도하고 절을 하는 과정에서 그림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성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되기도 하였고, 어떤 성상은 예수의 시신을 쌌던 천의 자국 위에 그린 것이어서 성상 자체가 기적을 행한다고 이에 기도를 하였으며, 성상이 도시를 방어한다고 믿어서 성문에 성상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폐해에 717년 레오3세는 성상파괴(iconoclasm, image-breaking)정책을 결정하였습니다. 고대부터 그리스, 로마의 서방은 사물을 대신하는 이미지에 우호적이었으며 근동지역은 예로부터 묘사정신의 이미지를 거부하여 왔는데 레오3세가 아랍의 국경 근방태생임은 이미지에 대한 그의 근본성향을 짐작케 합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 5세(ConstantineⅤ: 재임 741-75)기간 중 성상 파괴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실로 많은 조각과 모자익, 성상들이 소실되었습니다(도20,21).

도20 <이교의 우상을 파괴하는 기독교인>
1320년경, 베네치아, 성 마르코사원, 모자익 부분
 
 
도21 <예수의 상을 없애는 성상파괴론자>
살테리오 클루도브 비잔틴 필사본 부분
9세기 후반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50여 년 이상 지속되면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성상 우호론자들의 반대도 거세졌습니다. 성상파괴정책 자체가 처음부터 원칙에 입각한 논쟁이기보다 성상을 제작해 오던 기존의 수도원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신성은 완전하게 묘사될 수 없으며 사람(예술가 또는 장인)에 의해 어떠한 재료로도 재현시킬 수 없다."는 파괴론자들의 이론에 우호론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창세기 1:27)하셨으니 인간의 형상에 의해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림은 문맹인에게 글과 같은 역할을 하여서 이를 통해 성경의 말씀을 알 수 있다고 그림의 매개체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성상파괴가 가장 극심하였던 레오4세(Leo Ⅳ: 재임775-80)가 죽자 황후 이레네(Irene)는 정책을 거두고 콘스탄티노플의 성문엔 60여 년 만에 예수의 성상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813년 레오5세는 다시 파괴정책을 강화하였고, 우호정책으로 완전히 선회한 것은 843년 황후 테오도라(Theodora)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림의 신성여부보다 매개체로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두 황후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그 자체가 의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언제나 주인공이기 보다 중개자, 매개자로서 중요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비잔틴 미술은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제정일치체제에서 정치적인 그림도 강화되고 또한 교리를 해석하는 새로운 이미지들이 완성됩니다. 9세기 말 레오6세는 옥좌에 앉아있는 예수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신의 모습을 하기아 소피아에 새겼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 두광을 지닌 성스러운 존재로 이 그림은 바로 왕은 절대자 神의 대리인임을 다시금 강조하는 정치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도22).
그리고 다른 한 벽의 모자익엔 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바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하기아 소피아를 지어 마리아에게 바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새김으로써 콘스탄티노플과 이의 수호신 마리아,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와 황제들 간의 관계가 하나임을 전달해 줍니다(도23).

 

도22 <그리스도 아래 무릎꿇어 엎드린 레오6세>
9세기 말, 모자익, 하기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플
 
 
도23 <콘스탄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대제 사이에 있는 성모자>
10세기 말, 모자익, 하기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플
 
 
 
 

성상파괴운동의 시련을 겪은 후 성상은 더욱 성스럽고 교리와 밀접해져야 했습니다. 다프니에 있는 도르미션 교회의 그림들은 중세 미술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예라고 생각됩니다. 온통 금빛으로 둘러싸인 천장 한 가운데엔 존엄한 <우주의 지배자>가 무섭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의 설명은 그 분이 바로 마리아의 몸에서 낳고 이 세상에 살았던 예수임을 설명해 줍니다(도24,25).

도24 <우주의 지배자 예수>, 1080-1100년경, 모자익 다프니
도르미션 교회
 
 
도25 (도24)의 부분
 
 
 
 
 

교회의 다른 한쪽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새겨져 있습니다(도26). 시간과 공간의 묘사가 최대한 배제된 그림이지만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예수의 발에서 떨어지는 피가 해골을 적시는 것이 보이죠? 이 해골은 바로 아담의 해골이며, 예수의 피는 아담의 원죄를 씻었다는 교리를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도26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11세기 말, 모자익, 다프니, 도르미션교회
 
 
 
 
 

비잔틴 성상을 대표하는 <블라디미르 마돈나>(도27,28)를 봅시다. 황금색의 넓은 테두리가 우선 그림을 성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검은 바탕에 금 장식이 놓인 옷을 입은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슬퍼보이죠? 이 마리아는 바로 예수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는 마리아인 것입니다. 즉 비잔틴 성상은 사실의 설명이 아니라 교리의 전달이며, 시공을 초월한 성스러움을 지녀야 했던 것입니다. 이 강의에서는 충분히 전달할 수 없어서 아쉽지만, 종교성과 서술성을 동시에 지닌 비잔틴 미술은 그리스 정교의 미술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12-13세기, 즉 중세 말의 이탈리아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도27 <블라디미르 마돈나>
12세기, 나무에 채색, 77.5×53.3cm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
 
도28 (도27)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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