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5 - 초기 기독교 미술의 성립

死後의 세계와 부활에 대한 관심
3세기이후 로마는 급격히 붕괴되어 정치와 경제면에서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제의 부자도 오늘은 거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혼란하였으니 아무도 앞날에 대한 확신을 갖을 수 없었습니다. 현실에서의 이러한 불안감은 내세신앙을 낳게 하였으며 로마말기에 유행하였던 많은 사교들은 내세와 부활을 약속하는 공통점들을 지녔습니다. 크리스트교도 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다른 사교들 보다 도덕적인 설득력이 있고 포교가 조직적이었던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같은 크리스트교도 중세와 현대의 양상이 다르듯이 초기의 크리스트교도 달랐으며 313년에 밀라노 칙령에 의해 공인되기 이전의 박해시대와 이후의 양상 또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해시대의 사람들은 신, 구약의 많은 일화들 가운데서도 특히 <요나>와 <나자로의 부활>을 주제로 삼아 구원과 부활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3세기말에 제작된 <요나이야기 석관>(도1,2,3)에서 이야기는 아래 왼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 재앙을 알리라고 명하였으나 요나는 도망치려고 배를 탔습니다. 갑자기 거센 풍랑이 있어 그치지 않자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하여 요나를 물 속에 던져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큰 물고기에 삼켜진 요나가 살려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하느님은 그를 살려주며 니느웨로 가게 하였습니다. 요나가 하느님 말씀을 따르자 하느님은 언덕에서 쉬고 있는 그의 자리를 아주까리 잎으로 시원하게 까지 해주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구약성경 요나편 참고). 믿음에 의한 구원과 부활의 주제는 몇몇 일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위 왼쪽에 새겨진 나자로의 부활(도2의 왼쪽 위), 바위를 쳐 물이 솟아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모세 등등. 석관의 가장 오른쪽에 새겨진 낚시하는 장면은 영혼을 낚는 어부인 예수를 상징할 것이며, 그 위에 작은 크기로 새겨진 양치기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 즉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도1 <요나 이야기의 로마석관>, 3세기말, 로마
 
 
 
 
도2 도1의 왼쪽 부분
 
 
 
도3 도1의 오른쪽 부분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배치하였던 로마의 역사 부조방식과 사뭇 다릅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와 요동치는 큰 물고기 그리고 아주까리 그늘 밑의 요나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다른 이야기들은 남는 공간에 하나씩 넣는 듯이 배치하였습니다. 화면 구성의 면에서 서로간의 균형엔 관심이 없으며 조각을 하는 방법에서도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엔 전혀 개의치 않은 듯합니다. 인물이나 사물을 배경에서 두드러지게 하고 세부를 깊게 선각으로 처리함으로써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는 것에 관심을 쏟은 듯합니다.
 
 

그리스도 도상의 성립 - 기독교 공인 이전과 이후

우리에게 예수의 모습을 말해보라 하면 아마 얼굴이 긴 편이며, 구불거리는 긴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턱수염을 길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화가들이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한 예수의 모습이 점차 전형을 이루며 내려온 것일 뿐 실제 예수의 모습과는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2-3세기가 지난 후 예수의 모습을 그려야했던 로마 말기의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았을까요. 생전의 예수를 본 사람도 없고 이전에 존재했던 신도 아니며 또한 신학적으로도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닌 예수를 어떠한 형태로 나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아주 큰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조각을 많이 보아온 그들은 제우스나 아폴로 (도5,6), 아름다운 그리스 소년(도4) 이나 철학자 등 예수의 뜻을 공유할 수 있는 신의 도상에 예수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었습니다.

도4 <그리스 청년모습의 그리스도>
3세기, 로마,국립박물관
 
 
 
도5 <아폴로 모습의 예수>
3세기, 쥴리무덤의 천장, 바티칸
 
 
 
도6 도5의 부분
 
 
 
 
 
 
 

예수의 상을 처음으로 그린 것은 3세기경이라고 추측되는데 예수를 마차를 타고 나타나는 태양신 아폴로의 모습을 빌어 나타내고 주변을 포도덩쿨로 장식하여 자신을 '포도덩쿨'이라고 비유한 예수를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도5,6). 이들은 희생양을 어깨에 이고 있는 그리스의 젊은이 도상을 빌어 선한 목자 예수를 나타내고(도7), 디오니소스 신화에 그려지던 포도덩쿨과 포도주를 빌어 예수의 피를 나타내는 등 그리스 미술의 도상을 빌어 크리스트교의 의미를 상징하곤 한 것입니다. 공인 이전엔 그외에도 교사나 철학자로 그리고 물고기 모양으로 예수를 나타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 크리스트'라는 뜻의 그리스어의 단어 첫 자를 모은 ikthus라는 단어가 물고기라는 뜻이 된데서 기인하는 표시였습니다.

 

도7 로마석관, 4세기, 로마, 라테라노 박물관, "칼리메레야,
우리의 신이 너와 누이동생 힐라라의 심신을 회복시켜주었다."라는 글이 새겨있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가의 종교로 자리바꿈하면서 예수의 모습도 전지전능한 우주의 지배자로 또는 옥좌에 앉은 황제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어서 공인 이전과 큰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의 고위관리였던 쥬니우스 바수스(Junius Bassus) 석관은 여러 면에서 이 시대 미술을 대변합니다. 가운데 부분인 <우주의 지배자 예수>는 특히 흥미롭습니다(도8,9). 헬레니즘적인 우아함을 지닌 청년모습의 예수는 하늘나라를 뜻하는 콜루스(Coelus)의 의인화, 즉 우주를 발아래 두고 있으며, 베드로와 바울이 양쪽에서 보좌하는 가운데 옥좌에 앉아있습니다.

 

도8 <쥬니우스 바수스의 석관>, 359년
대리석, 118×213.8cm,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소
 
도9 도8의 위 중앙부분
<우주의 지배자 예수>
 
 
 
 

5세기경부터 황제의 후원아래 지어지기 시작한 대규모의 교회에 그려진 예수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치거나 구원하는 예수가 아니고 천상의 세계에 군림하며 세상을 심판하러 오는 절대자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산타 푸르덴지아나 교회(Santa Prudenziana) 후진(apse)부분의 모자익 벽화는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있는 <존엄한 예수>(Cristo in Maesta, 도10)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머리엔 황금빛 두광을 둘러 성스러움을 상징한 예수는 주변의 사도들 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보석이 박힌 옥좌에 앉아있습니다. 가난하게 살았던 사도들에게 원로원 의원의 옷을 입히고 예수에겐 황제의 모습을 부여하는 발상은 기독교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10 산타 푸르덴지아나의 후진 모자익, 390년경, 로마, 산타푸르덴지아나
 
 
 
 
 
 

지상에서의 황제의 개념을 천상의 예수에게 대치시키는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자리인 로마의 교외엔 큰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바오로 교회 후진부분은 <존엄한 예수>뿐만 아니라 승리의 아취가 덧붙여지고 그 한가운데 원형 속엔 예수의 흉상이 무섭게 그려져 있습니다. 위 양쪽에 네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그려진 것으로 모아 이 예수는 최후의 심판에 나타나는 심판자, 승리자, 지배자의 역할의 하느님임을 알 수 있는데 승리의 아취는 바로 로마황제들이 전쟁에서 이긴 후 개선을 기념한 소위 개선문(Arco Trionfale)의 개념이 교회건축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도11). 주변의 다른 인물들보다 월등히 크고 엄격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예수의 도상을 우리는 '존엄한 지배자'(Maestas Domini)라 부르는데 5세기에 시작된 이 개념과 도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비잔틴의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세상의 지배자) 나 로마네스크 시대의 예수도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도11 산 파올로 푸오리 델레무라, 로마
385년 시작하여 완공되었으나 1823년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된 후 보수되었음
 
도12 도11의 후진과 승리의 문 부분
 
 
 
 
 

신화와 기독교, 도상과 의미의 혼재
라티나 길가의 카타콤브에 그려진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도상이 기독교적 의미로 변화하는 혼합적인 현상을 잘 보여줍니다(도13,14). 감실 양쪽엔 헤라클레스의 노역이 그려지고, 한 가운데엔 헤라클레스가 알체스티(Alcestis)를 그의 남편 아드메투스(Admetus)에게 데려다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교의 신화가 왜 기독교인들의 기도장소에 그려진 것일까요?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 신화에 익숙했던 고대 말에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노역의 하나로 저승사자 케르베루스(Cerberus)를 잡으러 지옥에 내려갔을 때 그는 남편이 죽은 자리에서 죽음을 택한 알체스티를 다시 살려 역시 되살려낸 남편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즉 죽음과 부활의 주제인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이 일화를 통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다시 부활하였으며 만인의 부활을 약속하는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헤라클레스는 원래 인간세계에 있었으나 수많은 고통을 감내한 후 영원히 사는 神의 영역에 들어갔으니, 사후의 영생으로 보상되는 현세의 고통을 나타내는데 더 이상 좋은 비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카타콤브 의 화가와, 무덤의 주문자, 그리고 이를 보는 이들은 이렇게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를 섞어가며 고대 말의 종교를 형성한 것입니다.

 

도13 <알체스티를 남편 아드메투스에게 데려다주는 헤라클레스>
비아 라티나의 카타콤브 벽화, 4세기 후반, 로마
 
 
도14 도13의 왼쪽 그림,
<히드라를 처치하는 헤라클레스>
 
 
 
 

기독교 도상이 형성되면서 그 반대의 현상도 나타나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이프러스에서 발굴된 도15의 모자익을 봅시다. 무엇을 나타낸 것 같으세요. 언뜻 보면 성모자와 경배하는 동방박사들 같죠? 그러나 이는 헤르메스가 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주는 장면입니다. 어린 디오니소스는 아기 예수같이 두광을 쓰고, 이를 안고 있는 이는 마리아 같지만 머리와 발목에 날개가 달려있는 헤르메스입니다.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리스 시대의 도기화(도16)와 비교하면 양식의 변화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그림에선 디오니소스가 그림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강보에 쌓인 작은 아기에 불과하지만 이제 중세초기에 그려진 그림에서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 두광까지 묘사해 두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스러움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고자 하는 중세의 방법인 것입니다.

 

도15 <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 주는 헤르메스>
4세기 전반, 사이프러스에 있는 네아 파포스의 바닥 모자익
 
 
도16 <어린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 주는 헤르메스>
기원전 440년경, 바티칸 박물관
 
 
 
 

교회건축의 성립


초기의 교회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나 큰 도시들에서는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소아시아반도와 중동지역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순교자들의 무덤에서 죽은 이와 예수를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 교회로 발전한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기원은 기독교가 국교화 되기 전 남의 눈을 피하여 모임을 가져야 했던 신자들은 가정집의 큰 방 하나를 개조하여 모임을 가지며 여러 명이 식사의 제례를 치를 수 있는 공간으로 교회를 대신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황제 자신과 어머니가 강력한 후원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엔 많은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장소에 대규모의 교회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의 일생에서 중요한 시기마다 하느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312년 겨울에 일어난 마센티우스 전쟁에서는 전날 밤 꿈에 키로(Chi-Rho) 형태로 나타난 하느님으로부터 "이 기호로 정복하라"라는 계시를 받고 깃발에 이를 새겨 싸운 후 이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였습니다. 키로는 크리스트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약자인 XP를 한 글자로 만든 기호로 P라고 쓰며 현재도 카톨릭교단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기독교는 공인과 함께 정치적으로 로마 제정과 밀접해졌으며, 로마말기의 불안정한 사회상황에서 빠른 기간에 국가 종교의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리스의 신전은 원래 신을 모시는 곳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신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종교행사를 가졌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미사는 예수의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건물 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공회당인 바실리카형식을 빌어 교회를 설계하였습니다. 바실리카는 원래 로마시대에 재판이나 상인들의 중개, 그 밖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각종 행사에 쓰던 평범한 장방형 건물이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구조를 그들의 필요에 따라 변형하였습니다.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현재의 바티칸 언덕부분을 교회에 주며 베드로의 무덤을 보호케 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곳을 찾아오는 많은 순례자들을 수용하고 베드로의 죽음을 기념하며 또 미사를 드려야했습니다. 현재의 베드로 대성당은 15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개축되어 4세기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후대의 연구에 의해 기본원형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도17과 18은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의 평면도와 원래모습을 짐작케하는 그림입니다. 회랑(nave)과 측랑(aisle)은 로마 바실리카의 원형에서 빌어온 것으로 교회는 이 장방형 부분을 신자들이 앉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며 좁은 한쪽 끝을 둥글게 한 후진(apse)은 제단으로 사용하여 이곳은 성직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제한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무덤은 후진과 익랑(翼廊, transit)사이의 중앙에 놓이고 무덤 위는 닷집으로 덮어 장엄하게 하였다고 추측되며 팔을 벌린 듯이 좌우를 가로지르는 익랑(翼廊, transit)의 폭을 넓게 하여 이 무덤을 찾는 많은 순례객들이 운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바실리카를 T자로 변형시킨 것은 십자가의 상징을 도면화 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나 초기 기독교의 교회 모두가 같은 형태는 아니어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그 후에도 발전하여 다음주에 살펴볼 로마네스크의 상징적인 평면도로 완성되었습니다. 중정(artrium) 부분은 도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붕이 없는 옥외 공간으로 바실리카가 지어진지 약 50년 후에 증축한 것입니다.

 

도17 베드로 대성당 평면도
 
 
 
 
도18 베드로 대성당 원래모습
 
 
 
도19 베드로 대성당 중정
페라보스코(1620년경)의 판화
 
 
 
 

385년 경 사도 바울이 순교한 자리엔 <베드로 대성당>과 거의 같은 규모, 같은 구조의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로마 시내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로마 성곽 밖의 바오로 성당>(San Paolo fuori le mura)이라고 부르는 이 교회는 1823년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지만 18세기 동판화가 피라네지의 에칭을 통해서나마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도20). 400년경의 한 기록은 "내부는 궁정 같이 화려하게 빛났으며" 코린트식의 대리석 기둥과 창문사이는 온통 "금빛으로 빛났다"고 당시의 웅장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20 피라네지, <산 파올로 푸오리 델레무라>
에칭, 18세기
 
 
 
 
 

초기의 필사본

파피루스 두루마리 형식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접는 책으로 바뀐 것은 기원 후 1세기 경이었습니다. 몇 세기동안 두 형식이 공존하다가 4세기 이후에 비로소 책 형식이 더욱 보편화 되었는데 이로써 여러 개의 두루 마리에 써야했던 글도 한 권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은 주로 소설이나 성경의 이야기들인데 삽화를 함께 곁들이고 있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시대 회화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도21은 베르길리우스(Vergilius: 70-19B.C)의 詩集 중 마흔 네 번 째 장에 그려진 그림으로 <農耕詩>(Georgica)부분입니다. 말과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한가로운 전원에서 한 목동은 피리를 불고 다른 목동은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들이 어딘가 어색합니다. 사물들이 마치 허공에 걸린 듯이 보이는 것은 아마 원근법이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가능한 한 서로 겹쳐지는 것을 피하였으며 또한 빈 공간도 없이 메꾸고 있습니다. 고전시대엔 얼굴을 3/4각도에서 그림으로써 양감을 나타내던 얼굴묘사 방법은 완전한 측면으로 변하여 도안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21 <농경시 삽화>
베르길리우스 로마누스의 필사본 삽화
 
 
 

 
 

이 시대 그림들이 나타내는 사물들은 실제 우리 앞에 있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특정 의미 전달을 위한 형식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도22는 창세기 24장 중 레베카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제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야기는 대충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이 종을 시켜 자기의 고향에 가서 아들 이삭의 신부를 골라오게 하였습니다. 엘리에제는 낙타 열 마리와 함께 길을 떠나 나홀이라는 성에 다다랐습니다. 성에서 나와 물을 긷는 처녀에게 마실 물을 청하니 처녀는 물을 항아리 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 주었습니다. 엘리에제는 레베카라고 하는 이 처녀를 이삭의 신부로 택하였습니다.
그림에서 다시 이 이야기를 봅시다. 레베카는 오른쪽 위에 그려진 나홀성에서 나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기둥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우물에 이르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반나체로 그려진 샘의 님프가 자기 항아리에서 물을 샘으로 흘려 넣고 있고 물을 기른 레베카는 낙타 열 마리를 데리고 온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을 주고 있습니다.
늘어선 기둥들보다 사람을 크게 그린 것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실제의 공간감을 나타내는 데 큰 관심이 없음이 분명하며, 연속된 시간에 일어난 레베카의 두 장면을 같은 공간에 그리는 것을 보면 구체적인 시간에도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형상들은 특정 시간과 장소를 나타낸 현실의 모습이기 보다 이야기 전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22 <레베카와 엘리에제>, 비엔나 창세기 필사본 삽화
6세기경, 비엔나 도서관
 
 
 
 
 

헬레니즘의 잔존
우리는 지금까지 고대 말과 초기 기독교 시대에 나타나는 미술의 새로운 경향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방법 또한 뿌리 깊은 것이어서 한 편에서는 매우 세련된 헬레니즘 경향의 미술품들이 6세기경 까지도 제작되고 있습니다.
로마의 옛 귀족 가문인 니코마끼(Nicomachorum)집안과 심마끼(Symmachorum)가문에서는 두 집안끼리 맺어진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상아로 된 딥틱(Diptych:두 쪽 병풍)을 제작했습니다. 왼쪽 것은 파리의 클루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오른쪽 것은 런던의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에 있는데 도23은 보관 상태가 좋은 전자의 것입니다. 이 부조의 내용은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진 이후 이외의 종교들이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했을 때에도 옛 귀족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의식(儀式)이 행해졌음을 보여줍니다. 바카스의 여사제가 주피터를 상징하는 참나무 아래 놓인 제단에 향을 올려놓고 있으며 작은 시종은 포도주 잔을 사제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도23). 여사제의 모습에서 보이는 헬레니즘 전통의 완벽한 아름다움은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가능한 한 옛날의 아름다움의 세계에 가까이 가고자하는 주문자의 바램과 만든 이의 노력을 우리가 상상해보면 옛 고전문화에 대한 그들의 향수가 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옛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변해 가는 사회 속에서 다른 한 편으로 몰리고 있는 옛 귀족들은 그리스 신화를 종교형태로 고수하고 옛날의 고상함과 우아한 아름다움을 자신들이 지켜야 한다고 믿었으리라 봅니다.

도23 <니코마키 심마키 딥틱>
중 왼쪽 부분
4세기말, 상아
파리, 클루니 박물관
 
도24 <성 미카엘 천사>
6세기 초, 상아
런던, 대영박물관
 
 
도25 <아나스타시우스 영사 딥틱>
517년, 상아
파리 국립도서관
 
 
 
 
 

헬레니즘의 전통은 구 세력에게만 옹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가 안정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기독교 주제들도 세련된 옛 양식으로 제작되곤 하였습니다. 도24의 딥틱에 새겨진 미카엘 천사 또한 그 세련됨이 놀랍습니다. 도25에서 볼 수 있는 좌우 대칭적이고 평평한 도안과 같은 고대 말의 새로운 양식과는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다시금 재현시킨다고 해서 고전의 미의식이 그대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24의 미카엘 천사의 발을 보십시요. 층계를 세 칸이나 딛고 있지 않습니까. 옛 형식을 옮겨오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이 중요시 여겼던 공간감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결과이리라 봅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

 

고르곤(Gorgon)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의 세자매로 서쪽 끝 밤의 나라와 헤스페리스(저녁의 딸)들의 동산 가까이 살고 있다. 고르곤의 머리는 뱀이며, 멧돼지의 어금니와 같은 커다란 이빨에, 손은 청동이며, 커다란 황금날개를 가지고 잇다. 그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돌로 변하기 때문에 그녀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3명 가운데 2명은 불사신이었으나, 메두사만이 죽을 운명이어서, 영웅 페르세우스의 손에 목이 잘렸다.

메두사
고르곤이라는 세 마녀들 주의 하나고, 원래는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여신 아테나의 저주를 받아 무서운 괴물로 변하였다. 얼굴 생김새가 너무 끔찍하여 그것을 본 사람은 돌로 변하였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이자, 그 피에서 포세이돈의 자식인 날개 달린 천마 페가소스와 크리사오르가 태어났다. 메두사의 잘려진 머리는 아테나의 갑옷에 장식으로 붙여졌다. 또한 고르곤의 머리는 신전이나 다른 곳을 장식할 때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런 건물을 '고르고네이온'(Gorgone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디오니소소(Dionysos)
로마신화에서는 '바쿠스'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대지를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며, 포도재배와 관련하여 술의 신이 되기도 한다.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멜레를 질투한 헤라의 속임수에 세멜레는 번개에 타 죽었으나, 내태에 있던 디오니소스는 살아나 제우스의 넓적다리 속에서 달이 찰 때까지 자랐다고 한다. 그는 이후 성장하면서 여러지방을 떠돌아 다니는데, 이때 포도재배를 각지에 보급, 문명을 전달했다고 전한다. 디오니소스에 대한 신앙은 술과 가무를 동반하는 광란의 축제였으며 로마 시대에 와서도 이 신앙은 계속되어 점차 비종교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술의 신이자 여성스러운 외모를 하고 있는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 많은 추종자를 거르리고 있었으며, 신화에서는 쾌락적인 사티로스와 마이나데스가 그의 추종자였다.

아마존(Amazon)
사냥과 전투를 즐겼던 여성전사들의 부족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참가하였다. 전투의 신 아레스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여전사들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인들이 이들에게 매혹되는 것은 아마도 여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그리스 남성들의 집단적인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신화에서 아마존들은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돌보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였으며 남성들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였다. 많은 그리스 영웅들이 아마존과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아킬레우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는 아마존과의 연애관계로 얽혀 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가 가지고 있는 허리띠를 빼앗고자 원정을 하였다고 한다. 아킬레우스는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이아(penthesilea)를 죽였는데, 여왕이 죽는 순간 사람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스 미술가들은 기원전 6세기초부터 아마존을 집중적으로 나타낸다.

아킬레우스(Achilles)
그리스 신화의 특출한 전사로서 그리스의 트로이 포위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모험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미술가들은 그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 핵토르와의 전투, 트로이의 왕자 트로일로스에 대한 기습공격과, 켄타우로스가 그를 양육한 이야기, 아마존들과의 전투와 같이 트로이 전쟁 회에도 다양한 에피소드를 즐겨 묘사하였다.

아테나(Athena)
아테네의 수호여신. 제우스와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의 딸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티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제우스의 지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땅의 신 가이아의 예언에 제우스는 메티스를 삼켜버렸다. 그러나 달이 찬 아테네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함성을 지르면서 태어났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괴물 고르곤의 목이 달린 방채 아이기스를 든 무장한 처녀의 모습으로 상징되고 있다. 올빼미가 이 여신의 상징으로 이것도 옛 동물숭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외래에서 전래된 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전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신화에서는 끝까지 처녀성을 지킨 것으로 묘사되며, 특별히 '처녀신 아테나(아테나 파르테노스)'라 하며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이 처녀신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호전적인 면을 지니지만, 여성들이 하는 일을 보호하기도 하며 장인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페르세우스(Perseus)
제우스와 아르고스의 와녀 다나에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딸에게서 낳은 자식에게 살해 될 것이라는 신탁을 믿고 다나에를 밀실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마음을 두었던 제우스가 황금의 비로 변신하여 지붕으로 스며들어가 페르세우스를 낳게 하였다. 페르세우스는 고르곤인 메두사를 죽였으며, 바다 괴물로부터 안드로메다를 구하였다. 그가 죽인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나 여신에세 바쳐져 그녀의 방패에 부착되었다.

헤라클레스(Herakles)
그리스의 영웅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 헤라 클레스는 제우스의 서자였으며, 인간처럼 줄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후에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그는 신이 되어 올림포스에 올라간다.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신전을 장식하는 12가지 과업은 길고도 복잡한 그의 영웅적인 과업 중 전범화된 것이 어떤 것인지 확인시켜준다. 그 12가지 과엄은, 네메아의 사자퇴치, 레르네에 사는 히드라 퇴치, 케리네이라의 산중에 사는 사슴을 산 채로 잡는 일, 에리만토스산의 멧돼지를 산 채로 잡는 일, 아우게이아스왕의 가축 우리를 청소하는 일, 스팀팔스 호반의 사나운 새 퇴치, 크레타의 황소를 산채로 잡는 일, 디오메데스왕의 사람 잡아먹는 4마리의 말을 산 채로 잡는 일,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의 띠를 탈취하는 일, 괴물 게리온이 가지고 있는 소를 산채로 잡는 일, 님프 헤스페리스들이 지키는 동산의 황금사과를 따오는 일,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를 산채로 잡는 일이다. 후에 리디아의 여왕 옴팔레와 결혼하였다. 미술에서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유아기부터 장년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강력한 남성으로서 궁극적으로 신이 되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로마의 황제들은 말할것도 없고, 독재자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알렌산드로스 대왕의 분신으로 모셔졌다.

헤르메스(Hermes)
전령신. 로마 신화에서는 메르쿠리우스로 부른다. 헤르메스는 지팡이(케리케리온 혹은 카두세우스)를 들고 날개가 달린 신발을 신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영혼의 인도자로서 그는 지하세계와도 관련이 있다. '헤름'(Herms)이라는 기둥들 위에 올려진 수염 난 두상들은 본래 헤르메스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의도였으며, 주요도로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카타콤 (Catacomb)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로 나폴리, 시라쿠사, 몰타, 아프리카, 소(小)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카타콤은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하며, 로마 아피아 가도(街道)에 면(面)한 성(聖)세바스찬의 묘지가 두 언덕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3세기에 이 묘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된 뒤로는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하에 묘지를 두는 풍습은 동방에서 전래되었으나 그리스도 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지하묘지의 풍습이 더욱 성행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피라네지, 지오반니 바티스타(Piranesi, Giovanni Battista ; 1720-78 )
 
18세기 이탈리아의 판화가, 건축가, 이론가. 피라네지는 고전기와 고전기 이후 로마의 건축물과 그 부근을 묘사한 대형 판화를 제작함으로서 로마의 명성을 높였고, 고전 고고학에 대한 관심과 신고전주의 미술운동에 이바지했다.
 
 

피라네지는 20세에 베네치아 대사의 건물화가로 고용되었고, 당대의 판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1745년에는 로마에 정착했다. 이 시기에 그는 동판에 섬세하고 날카로운 선을 반복함으로서 형성되는 풍부한 질감과 강렬한 명암 대비로 특징지어지는 독창적인 판화기법을 발전시켰다.

그가 평생 제작한 2000여 점의 판화 중 <감옥의 고안Carceri d'Invenzioni>시리즈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 감옥은 고대 로마 또는 바로크 시대의 페허로 신비로운 단두대와 고문기구들로 가득 찬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묘사됐다. 이 외에도 그의 전성기 판화인 <고대 로마>와 <로마 풍경>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정확한 묘사, 극적이고도 낭만적인 웅장함의 표현으로 건축을 묘사했다.

 

 

 

 

바실리카(basilica)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건물을 지칭하며, 고대 그리스 신전을 로마식으로 발전시킨 형식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식으로 인정한 312년 이후에 바실리카는 기독교 의식을 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교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건물의 내부는 돔이 얹혀져 있고 채광창으로 빛을 끌어들이는 원통형의 중심부와 그 주위를 둘러싼 둥근 보행회로(ambulatory)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바실리카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성당의 주요 형식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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