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8 - 그리스 : 조각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8세기경부터 신상(神像)을 제작하고 숭배해 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아래 기원전 7세기초에 제작된 <만티클로스 아폴로>상은(도1) 작지만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낸 초기 청동조각의 예를 보여줍니다. 인체의 비례를 머리와 상반신, 하반신으로 삼등분하고 상체를 역삼각형으로 나타내는 방법은 초기 도자기 그림에서 보았던 기하학적인 양식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1 <만티클로스의 아폴로> 앞과 뒤
기원전 7세기 경 , 청동
 
 
도2 <뉴욕 쿠로스 > 앞과 뒤, 높이 184cm
기원전 600년경,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사이 인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놀라운 발전을 보여주었습니다. 만티클로스의 아폴로와 뉴욕에 있는 쿠로스상의 표현양식의 차이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도2,3). 그러나 뉴욕 쿠로스 인체표현을 유심히 본 사람은 직립의 부동자세나 머리처리 등에서 금방 이집트 조각을 떠올릴 것입니다. 아래의 격자도표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전체 키를 23 1/4 단위로 나눈 이 상의 비례는 우리가 이미 이집트 미술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집트 조각의 비례와 일치합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아도 그리스 기술자들이 이집트에서 조각술을 익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도3,4).

도 3 뉴욕 쿠로스(도.2와 동일)
 
 
 
도 4 이집트 조각과 그리스
<뉴욕쿠로스>의 비례비교
 
 
도5 이집트 조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조각과 그리스 조각은 큰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도3,5). 그리스 장인들은 우선 팔과 상체 사이, 다리와 다리 사이의 돌을 걷어 냄으로써 자연스러운 인간의 형상에 더 다가가려 하였습니다. 또한 인체의 느낌을 보면 이집트 조각이 지배자의 힘과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면 그리스상은 건장하고 절제 있는 남성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조각이 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작은 조상에서 등신대 크기의 대리석상으로 발달한 것은 7세기 중엽부터입니다. 기원전 7세기 즈음에 만들어진 뉴욕 쿠로스 (Kouros:소년 또는 젊은이라는 의미)상은 다소 경직되어 있기는 하지만, 건장한 남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슴과 허벅지, 그리고 무릎의 묘사에서 그리스 장인들의 해부학적인 관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 즉 인체의 자연스러움을 닮게 하면서 동시에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을 구현하려는 조각가들의 시도가 기원전 6세기 전반의 아나비소스의 조각에서는 훨씬 더 성공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도8).

 
 
 

주로 아르카익 시대에 만들어진 쿠로스상들은 신전 안에 모셔진 신들에게 봉헌하는 상이거나 무덤의 표시였습니다. 사모스 섬에서 몸통만이 출토된 아래 쿠로스상의 허벅지에는 "레우키오스가 나를 아폴론에게 바쳤다"라고 새겨져 있어 이 상이 신에게 봉헌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도6). 아나비소스의 쿠로스(도8) 좌대에는 "여기 죽은 크로이소스의 무덤에 서서 그를 가엽게 여기라. 그가 전장에서 싸운 것 같이 아레스를 전멸시켜 그를 분노케 하였노라"라고 쓰여있습니다. 이 조각상은 무덤에 세워져 있어서, 지나는 이로 하여금 멈춰 서서, 이 상을 보고, 명문을 읽어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게 하는 매개체였습니다. 전쟁으로 죽은 주인공은 비록 땅 속에 묻혔으나 조각을 통하여 이러한 젊은이로 존재케 하려는 그리스인들의 바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6 사모스섬 출토 쿠로스
기원 전 575-550년경, 높이 100 cm
바티, 사모스, 고고학 박물관
 
도7 테네아 쿠로스
기원 전 6세기 중엽
바비에라의 모나코, 글립토테카
 
도8 <아나비소스의 쿠로스>
기원 전 530년 경, 높이 194 cm
아테네, 국립 고고학박물관
 

뉴욕 쿠로스보다 약 반세기 후에 제작된 아나비소스 쿠로스는 인체묘사에서 큰 발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도8). 우선 머리를 작게 함으로써 전체의 인체비례는 8등신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 묘사에 의존하던 뉴욕 쿠로스와는 달리 정확한 살붙임으로 뺨과 턱뼈가 해부학적으로 정교해졌을 뿐 아니라, 도식적이던 가슴묘사도 탄력 있는 근육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위의 네 상을 보면서 아르카익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묘사하고자 하는 인물이 아폴로 신이거나, 봉헌자거나, 심지어는 전장에서 죽은 병사이거나 상관없이 모두 젊고 이상적인 신체의 누드상으로 묘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제작된 수많은 남자 누드상을 보면서 우리는 이 시대 그리스인들이 지향하던 도덕적인 이상을 읽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들은 사회적 권위의 옷보다는 누드의 남성성 자체를 숭상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숭상하는 이상적인 인간은 젊고 생명력이 넘치나 또한 절제된 남성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근대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누드는 여성묘사의 전용처럼 인식되어 왔습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 조각에서는 남성상은 누드로 제작된 반면 여성상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니칸드레 (Nikandre) 코레는 보존상태는 좋지 않지만 명문이 남아 있어 미술사적 의미가 있는중요한 상입니다(도9). 갈래머리를 한 머리는 이집트 조각을 연상시키며, 납작한 돌에 전체적으로 평평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마도 초기의 목조방식을 대리석에 적용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 여자 봉헌상의 치마 왼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습니다. "니칸드레가 나를 활 잘 쏘는 궁수, 즉 아르테미스에게 바쳤습니다. 그녀(니칸드레)는 낙소스인인 네이노디케스의 딸이자 데이노메네스의 누이이며, 지금은 프락소스의 아내이다." 즉 이 상은 친정과 남편의 가문에 긍지를 지닌 한 여성이 아르테미스 신전에 봉헌하기 위해 나무보다는 더 비싼 재료인 대리석으로 주문한 것입니다.

도9 <니칸드레의 코레>
기원 전 650년경, 높이 175cm
아테네 국립고고학 박물관
 
 
 
도10 <페플로스를 입은 코레>
기원 전 530년경 . 채색 대리석, 높이 120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도11 <페플로스를 입은 코레>의 복원 모형
케임브리지, 고전고고학박물관
 
 
 
 
 

위의 코레보다 1세기 뒤에 제작된 일명 페플로스을 입은 코레(도10, 11, 12)는 같은 유형의 여자 봉헌자상이지만 니칸드레의 코레보다 훨씬 사실적입니다. 밝게 미소지으며 왼손의 물건을 봉헌하는 매력적인 코레는 채색된 흔적을 지니고 있어서 원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도12).

 

도12 <페플로스를 입은 코레>
기원 전 530년경, 채색 대리석, 높이 120 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도13 키오스의 코레
기원 전 520년경, 높이 55.3cm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박물관
 
 

채색이 남아 있는 코레에서 우리는 화려한 장신구와 잔주름이 많은 아름다운 의상을 복원해 볼 수 있습니다. 키오스에서 출토된 코레(도13)에서도 보듯이, 머리장식과 귀걸이, 목걸이로 아름답게 꾸미고 한 손엔 언제나 봉헌물을 지닌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여성상은 젊은 신체로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냈던 남성상과 여러모로 비교됩니다. 이러한 차이에서 우리는 그리스 사회에서 남자는 젊은 청년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반면, 여자는 니칸드레 코레의 명문에서 보았듯이 자신의 이름보다는 아버지의 딸로, 오빠의 누이동생으로 그리고 남편의 아내로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체묘사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아테네 부근 피레우스에서 발굴된 아폴로상은 청동조각의 발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도14,15). 오른손엔 넓적한 기물을 들고 왼손엔 활을 들고 신전 안에 모셔져 있던 상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도16). 맨 처음에 보았던 작은 청동 아폴로상(도1)와 비교해 본다면 해부학적으로 정확하면서도 탄력있는 인체묘사의 방법 뿐 만 아니라 청동조각의 기법에서도 크게 발전하였음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높이 192cm의 이 상을 제작하기 위하여는 머리, 손, 발등을 따로 주물로 떠서 이었을 것이나 이음새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도14 <피레우스 아폴로>
기원 전 510년경, 높이192cm
피레우스 고고학박물관
 
 
도15 도14의 가슴 윗부분
 
 
 
 
도16 <신전 속의 아폴로>, 세부,
기원전 4세기, 적화식 아풀리안 크라테르 세부
 
 
 

 

 

청동조각은 속이 비어있어 가볍고 운반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대리석으로는 불가능한 자유롭고 열린 포즈의 상을 제작할 수 있습니다. 팔을 쭉 뻗어 번개를 던지는 제우스 상의 모습은 청동이 아니면 나타내기 힘든 포즈였을 것입니다(도17). 피디아스 작품으로 추정되는 오른쪽 청동조각은 입술에는 구리와 이빨에는 은과 같이 다른 금속을 더해졌을 뿐 아니라, 채색까지 되어 있어서 후대에 로마시대 복사품으로 많이 알려진 흰 대리석의 조각상들이 그리스 당시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도18).

도 17 <아르테미시온의 조각상>
기원전 450년경, 높이 209cm
아테네, 국립고고학 박물관
 
도 18 피디아스 작으로 추정, 리아체의 <청동상A>
, 기원전 450년경, 높이 198 cm
레조 칼라브리아 국립박물관
 
 
 

이처럼 그리스에서 크게 애용되던 청동조각은 그러나 후대의 전쟁을 이겨내기는 어려웠습니다. 청동은 약탈하여 녹이면 무기를 만드는 귀한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그리스의 청동조각은 대부분 없어지고 로마시대의 복제된 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재 나폴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참주 살해자들>(도19)은 기원전 477년경 아테네의 크리티오스(Critios)와 네시오테스(Nesiotes)라는 두 조각가가 만든 청동상을 로마시대에 대리석으로 복제한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조각상 또한 기원전 510년경 안테노르(Antenor)가 만든 조각상을 480년에 있었던 페르시아 전쟁 중에 빼앗기고 다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청동상을 대리석으로 옮길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게지탱과 균형의 문제였습니다. 로마인들이 하는 수 없이 나무기둥 모양으로라도 버텨 놓아야 했으므로 조형상의 장애는 감수해야 했습니다. 버팀목을 생략하고 <참주 살해자들>의 원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도20). 두 상은 좀더 가까이서 등을 맞대고 서로를 방어해 주면서 참주에게 공격하는 상이었을 것입니다.

도19 <참주 살해자들> 그리스 청동 원작의 로마 복제본,
기원전 477년경, 대리석, 높이 195cm, 나폴리 국립고고학 박물관
 
 
 
 
도 20<참주살해자들>
 
 
 
 
 
 

여기서 잠시 조각상의 정치적 역할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군상은 아테네 민주제의 기초가 성립된 기원전 510년경 시민생활의 중심지에 세워지고 이 상 주변엔 다른 상을 세우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참주 살해자들> 상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숭배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뉴욕의 <자유여신상>이 미국의 자유를 상징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서들은 이 군상의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이 동성애 관계에 있었으며 이들의 히파르코스 참주를 살해한 동기는 개인적인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참주제에서 민주주의로 바뀌는 정치의 전환점에서 개인의 사건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미화된 것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영웅을 필요로 했고, 공공장소에 세워진 영웅의 상들은 언제나 민심을 규합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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