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 - 선사시대 : 동굴벽화와 거석문화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기원전 3만년을 즈음하여 예술적인 창조성이 크게 발현되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아프리카나 서유럽에서 크로마뇽인이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하는 기간에 해당하는데, 그들은 인류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이미지로 표현해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미술의 재현(representation)의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발견된 동물형태의 간단한 그림(도1)이나 독일 홀란스타인 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3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의 얼굴을 한 조각상은(도2.3) 바로 인류 초기의 미술활동을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도1 동물의 형상, 기원전 23,000년경, 돌에 목탄그림,
아프리카 나미비아 동굴출토
 
 
 
도2 동물의 머리를 한 인간상
독일 홀렌스타인
기원전 3만년-2만 8천년
맘모스의 상아, 울름 박물관
 
도3 동물의 머리를 한 인간상, 옆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고대문명들이 발생하기 이전의 미술을 선사시대 혹은 원시미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다시 오랜 빙하기 동안 동굴에서 살면서 채집과 사냥에 의존하였던 구석기 시대와 온화해진 기후에서 농경생활을 하였던 신석기 시대로 크게 나눌 수 있겠습니다

 

동굴벽화

미술을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리의 먼 조상들이 동굴에 그려놓은 놀라운 형상들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될 지 모릅니다. 1879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에서 처음 벽화를 발견한 사람은 아마튜어 고고학자 돈 마르셀리노 산츠의 어린 딸이었다고 하는군요. 동굴의 낮은 천장에 그려진 아래 도4의 천장화는 아무래도 시선이 낮은 어린아이의 눈에 발견되기 쉬었던 것이겠지요. 천장에 그려진 웅크린 들소들은 하나같이 모두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이어서 흥미로운데, 학자들은 아마 죽어서 땅에 쓰러진 들소들을 묘사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 알타미라 벽에 그려진 들소의 모습(도5)은 부분적으로 추상화되었으나, 곤두선 털과 우람한 야생의 근육의 특징이 생생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요? 20세기 피카소가 즐겨 그린 황소(도6)와 흡사하여 그 시간적인 간격이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이 놀라운 동굴벽화는 발견된 다음해인 1880년 열렸던 고고학 학회에서 그 진정성이 의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많은 동굴 벽화들도 속속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이 그림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 전인 수 만 년 전 구석기인들의 솜씨라는 것이 점차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구석기 동굴벽화는 남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지역의 여러 석회암 지대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 알려진 것만도 이백여 곳이 넘는다고 합니다.

 

도4 들소, 알타미라 동굴 천정화,
스페인, 기원전 만 2천년-만천년 경
 
 
 
 
도5 들소, 알타미라 동굴 벽화,
스페인, 기원전 만 2천년-만천년 경
 
 
 
 
도6 파블로 피카소 <황소> 1945, 동판화
 
 
 
 
 

 

거대한 동굴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벽화는 오랜 옛날 인류에게 있어서 미술이 어떠한 힘을 가지는 것이었는지,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동굴 벽화 중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 몬티악(Montignac) 근처 라스코 지방의 동굴 벽화를 보도록 합시다(도7, 8, 9, 10, 11). 기원전 만 오천 년에서 만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들소, 사슴, 순록, 곰과 같은 동물들의 모습이 아래 도9의 지도에서 보듯이 길게 뻗은 동굴의 길을 따라 빼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시간을 초월하여 선사시대의 힘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들소들의 방'으로 불리는 동굴의 넓은 광장의 벽화는 실로 장관을 이룹니다(도7). 벽면을 따라 그려진 동물들의 무리들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질주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불룩한 배를 한 새끼를 가진 동물(도10)도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굴인들이 사냥감의 습성과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울퉁불퉁한 석회암 표면을 이용하여 아주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방법도 터득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슴, 들소, 말 등의 동물들은 때로 검은색 윤곽선만으로 그려지거나, 혹은 내부에 붉은색과 검은색의 색채로 채워져 있군요. 동굴인들은 붉고 검은 색 광물성 안료를 속이 빈 동물의 뼈에 넣고 불어서 윤곽을 그리거나 혹은 다른 매제에 개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는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였던 돌로 만든 램프도 발견되었습니다.

 

도7 황소들의 방, 라스코
프랑스 도르도뉴,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도8 라스코 동굴 회랑벽화
프랑스 도르도뉴 몬티악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경
 
도9 라스코 동굴벽화 지도
 
 
 
도10 새끼를 밴 말, 라스코 동굴 벽화
프랑스 도르도뉴 몬티악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경
 
도11 창에 찔린 들소, 라스코 동굴벽화
프랑스 도르도뉴 몬티악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경
 

 

그러면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며, 동굴에서 거주하였던 구석기인들은 왜 이러한 이미지들을 재현하였던 것일까요. 자신들의 거주지가 멋지게 보이도록 장식 삼아 그렸던 것일까요.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벽화들이 빛이 들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에, 그것도 자꾸 중첩해서 그린 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들소들의 방'만 하더라도 처음부터 일대 사냥장면의 스펙터클을 묘사하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을 한꺼번에 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실은 수 천 년에 걸쳐서 이미지를 덧 그린 결과라는 것이지요. 가장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가설은 선사시대 수렵인들이 두려운 존재인 야생동물을 이미지화하여 그들을 포획하고 지배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벽화에는 도11처럼 창을 맞고 피를 흘리는 장면을 그리거나 혹은 실제로 그림에 창을 꽂았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야생의 동물들을 그림으로서 그것들을 소유하고 영혼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 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재현된 이미지가 초자연적인 마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자신의 사진을 쉽게 찢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설명이외에도 후대에도 많이 제작되는 반인반수의 토템상과 관련하여 동물조상신을 섬기는 선사시대의 신앙이 반영된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류최초의 여성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거대한 규모의 동굴벽화이외에도 구석기인들은 짐승의 뼈나 돌을 깎아 인간이나 동물형상의 부조나 조각을 제작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도12, 13, 14)입니다. 여기 아래 보시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전면에서 뿐 아니라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 보았을 때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높이 11센티미터의 작은 돌 조각으로 머리모양은 둥글둥글한 패턴으로 간략화되어 있고 이목구비는 생략되어 있군요. 특히 왜소한 팔에 비해 가슴과 배, 엉덩이와 같은 여성의 상징은 매우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12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전면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높이 110cm
 
 
 
 
도13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옆면
기원전 2만 8천년-2만 5천년,석회암
빈 국립역사박물관
 
 
 
도14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뒷면
 
 
 
 
 
 
서양미술사에서 비너스와 같은 여인의 누드가 매우 빈번하게 그려지고 조각되어 왔던 점을 상기해 볼 때, 구석기 시대 인물조각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여성의 이미지가 많은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뿐 아니라 풍요의 여신을 주제로 삼은 여성상은 도15나 도16에서 보듯이 매우 많습니다. 이는 도19의 라스코 벽화의 한 장면에서 보듯 황소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왜소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 선사시대의 남성상과는 분명하게 다른 모습입니다. 구석기 시대 발견되는 여성상들은 인류학자들에 의해 비너스 상으로 명명되었는데, 신화가 구성되기 훨씬 전에 제작된 여성상에 사랑과 관능의 여신인 비너스의 이름을 붙인 것은 모순되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도17과 도18을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는 고대 이래 비너스 상에 투영된 관능의 시선도, 신성(神性)도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생산과 다산과 풍요의 기원이 여성의 신체를 이렇게 왜곡하였던 것입니다. 여성의 몸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남성의 신체보다 대상화되기 쉬운 존재였던 것일까요? 풍요의 여성을 나타내는 불룩한 형태의 여성도상이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랜 시기에 걸쳐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간과 동물의 생산성, 대지의 산출력이 인류의 삶과 깊은 연관을 지녔다는 반증이라고 하겠습니다.

 

도15 <들소의 뿔을 들고 있는 여인> 프랑스 도르도뉴 러셀
기원전 2만 5천년-2만년전 경, 석회암에 채색
보르도 박물관
 
 
 
도16 <풍요의 여신> 터어키, 차탈효육
기원전 약 6천년 경, 도기, 높이 20.3 cm
터키 앙카라 고고학 박물관
 
 
 
도17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전면
오스티라아 빌렌도르프
기원전2만 8천년-2만 5천년, 석회암
빈 국립역사박물관
 
 
도18 프락시텔레스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기원전 350년경, 로마시대 복제품, 대리석
높이 205cm, 로마 바티칸 박물관
 
 
 
도19 <부상당한 남자> 프랑스 라스코 벽화,
기원전 만 5천년-만 3천년
 
 
 
 
 
 
 
지금은 수렵인들의 동굴벽화나 조각을 '미술'이라는 용어로 부르지만 당시에는 원시집단의 제의(祭儀)적인 측면이 무엇보다 강했습니다. 그런점에서 선사시대 '작품'을 동굴에 남겼던 최초의 미술가들의 위치는 어떠했을까요. 수렵인들의 정신세계에 관여하는 마법사나 영매자의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르며, 어쩌면 사냥의 대열에서 제외되어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하였을 지 모릅니다. 그들의 작업이 '창조력의 발산과 승화'라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미술의 기능과는 동떨어져 있을지 모르나 오히려 집단의 생존과 신앙과 관련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구석기시대 시각적인 생산물에 대한 다른 견해와 논쟁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선사인들에게 있어서의 마술로서 기능하였던 '미술'은 미술관이나 예술의 이름으로 박제된 현재의 미술보다 더욱 인간의 삶에 깊숙하게 침투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신석기 시대의 미술

지금으로부터 만 여년 전은 빙하기가 끝나고 유럽의 지형과 기온이 현재와 비슷해지는 시기입니다.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유럽의 한 중심을 뛰어다니던 들소나 맘모스, 순록과 같은 동물들이 지금처럼 북쪽으로 물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기원전 5000년 정도가 되면 신석기 농업혁명으로 선사인류들은 점차 정착하고 농경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먹을 것을 찾아 이동하던 생활양식에서 생산과 정착의 생활양식으로 바뀌고 구석기시대 미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사냥도 이제 제의적인 의식으로서 상징적인 행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신석기 시대에도 역시 인류의 조상들은 농기구나 생활에 필요한 여러 물건들을 만들고 추상적인 문양의 도기들을 제작하였지만 놀라운 장관을 연출하였던 구석기 시대의 미술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 결과가 왜소합니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러한 공백을 메워나가겠지만 근본적으로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면서 인간에게 있어 이미지의 재현이 지니는 의미가 달라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의 터키 일대에서 발굴이 한창인 차탈효육 유적은 기원전 7천년에서 5천년에서 정도의 신석기 시대 정착지 중 한 곳입니다. 신석기인은 지붕이 평평한 저택을 잇달아 짓고 군집 생활을 하게 되는데(도22) 주거지에서 재미있는 벽화들이 발굴되었습니다(도20, 21, 23, 24). 도20을 보면 벽에 그려진 붉은 색 그림이 발색되어 잘 보이지 않지요? 아래 도23의 드로잉을 보도록 합시다. 바둑판처럼 생긴 기하학적인 문양은 화산이 있는 마을의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실제 마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개념도에 가깝습니다. 도21, 24의 그림은 사슴을 사냥하는 사람들을 마치 춤추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군요. 이 벽화들은 구석기 시대의 역동적인 동물 그림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렇게 사실적인 묘사를 하던 조상들의 솜씨는 어디로 간 것인지, 이미지는 흡사 기호처럼 변하였습니다. 이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마술적인 힘의 환기보다는 기록과 의사소통의 기능이 더욱 강해졌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문자가 발생하고 인류는 역사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도20 <폭발하는 화산과 마을풍경>
터키 챠탈훈육 벽화
기원전 6천년 경
 
 
 
도21 <동물사냥>
터키 챠탈훈육, 신전의 주실
기원전 6천년 경, 68.5×165 cm
 
 
 
도22 가옥과 신전들
터키 챠탈훈육 유적
기원전 6천년 경
 
 
 
도23 <폭발하는 화산과 마을풍경>
터키 챠탈훈육 벽화 부분 모사
기원전 6천년 경
 
도24 <사슴사냥> 신석기 벽화 부분 모사
터키 챠탈훈육
기원전 5750년 경
 
 
 

스톤헨지: 거석문화의 탄생

서유럽에서 인류가 농사를 짓고 정착하게 되자 토기가 생산되고 기원전 사천년경에는 거대한 자연석을 쌓아 기념비적인 건축형태를 만드는 거석문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인류역사상 놀라운 변화의 시기입니다. 고인돌은 실용적인 목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권력자의 매장문화, 그리고 장례와 종교의식이 발생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때로 고인돌들은 원형의 형태로 세워지는데, 영국 남쪽 찰츠베리 평원의 스톤헨지가 그중 가장 유명합니다(도25, 26, 27, 28). 직경이 대략 30미터에 이르는 원의 모양을 따라 두 열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기둥(post) 위에 상인방(lintal) 즉 들보를 올리는 건축의 기본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거석유물은 최초의 건축물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도26의 복원도를 보면 빙 두른 원 안에 제실(祭室)이 있고 중앙에는 제단형태의 돌이 있어서 이것이 그리스의 신전이나 중세의 교회를 구성하는 건축방식과 기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원의 한 부분이 끊겨 있는데, 이곳은 일년 중 해가 가장 긴 하지에 해가 뜨는 곳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아마도 농사를 위한 절기와 관계 있을 것으로도 짐작합니다. 이 모든 사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마 이렇게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정착생활을 하였고, 집단의 힘을 이용하였으며, 농사를 지으면서 느끼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도25 스톤 헨지, 조감도, 영국 윌트셔 찰즈베리 평원
기원전 2550-1600년, 지름 29.6 m
 
 
도26 스톤 헨지 복원도
 
 
 
도27 스톤 헨지, 영국 윌트셔 찰즈베리 평원
기원전 2550-1600년, 지름 29.6 m
 
 
도28 스톤 헨지, 하지 때 모습, 영국 윌트셔 찰즈베리 평원
기원전 2550-1600년, 지름 29.6 m
 
 
 
 
 
지금까지 고대문명이 발생하기 이전의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저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들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 만 년 전 문명의 초기단계의 조상들은 당시의 조건에 맞는 미술의 독특한 형태를 발현시켰음을 이 시간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미술은 그런 점에서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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