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3 - 이집트 미술 : 내세의 영원함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시대에 이르면 과거의 수렵이나 작은 촌락을 이루면서 살던 시대와는 판이한 미술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과도 같은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신권사회를 이루는 것이 고대 국가의 특징이지요. 기원전 3000여년 경에 세워진 이집트는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을 거치면서 이후 30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도1은 나일강 유역의 도시국가를 통합하여 고왕국을 시작하였던 통치자, 나르메르의 승전을 기념하는 그림이 새겨진 판입니다. 그 앞면을 보면 나르메르 왕이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알기 쉬운 이야기 그림처럼 전개되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데 왕은 크고 포로는 작습니다. 패널의 뒤쪽 상단을 보아도 깃발을 들고 왕의 앞 뒤를 호위하는 신하들은 왕의 1/3크기에도 못 미칩니다. 이 패널을 제작한 사람들에겐 사물의 실제 크기나 비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겠지요. 다만 왕은 더 위대한 사람이고 그가 적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 만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것이 중요했고, 이집트의 미술가들은 그러한 목적을 분명하게 달성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이 기념판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같은 목적으로 제작된 <나람신 승전비>(도2)와 그 모습이 흡사합니다. 왕과 쓰러진 적의 모습을 묘사하는 정해진 방식이 있었으며 이러한 묘사방식은 이집트에서 생겨나 근동의 고대국가에서 두루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1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
기원전 3150-3125년경, 높이 63.5 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2 <나람신 승전비>,이란
수사출토,기원전 2254-2218년경, 사암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집트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피라미드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의 지평선 위에 묵중히 자리잡은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는 조형적인 면에서 매우 절대적입니다. 인간이 만든 조형물 중에서 가장 기하학적이고, 가장 추상적인 구조물일 것입니다. 이집트는 절대적인 신권사회였습니다. 왕 파라오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으며, 이집트 미술을 대표하는 파라미드는 이러한 왕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들에겐 죽음이 종말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삶의 영원한 지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도3 <기자의 피라미드>, 맨카우레, 카프레, 쿠푸 고분
 
 
 
 
도4 <기자의 대 스핑크스>, 기원전 2570-2544년경, 사암, 높이 19.8 m
 
 
 
 
가장 유명한 기자의 세 피라미드는 고 왕국 시대의 왕 맨카우레, 카프레, 쿠푸왕의 무덤입니다. 무덤의 긴 연도 앞 입구에는 스핑크스가 무덤을 지키고 있지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건립하기 위하여 10만 명이 3개월 씩 동원되어 기초공사에만 10년, 그리고 본 공사는 20년이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십 킬로 밖에서 채석된 돌을 다듬고 뗏목으로 옮겨와 이곳에 쌓은 과정을 상상하면 이러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얼마나 강하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사후에도 현세가 지속되므로 피라미드 내부엔 현세에서 누린 삶의 현장들이 그림으로 그려지고 왕의 소유물들이 함께 부장되었습니다. 보다 후대의 것이지만 아래 보는 황금 마스크가 발굴된 투탄카멘의 피라미드는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그 호화스러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육체는 사후에도 영원한 삶을 지속시켜야 하는 일종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를 썩지 않게 하는 방법, 즉 미라를 제작하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두개골과 내장을 먼저 작은 관에 안치하는데 도6의 관 모양의 용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미이라로 만들어 안치될 수 있는 사람은 파라오와 부자가 된 고위관리들 뿐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미술은 다른 많은 역사적인 시기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최고 권력자의 미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5 <투탄카멘의 마스크>
이집트, 테베, 18왕조, 기원 전 1323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6 <투탄카멘의 내장을 담은 관>
이집트, 테베, 18왕조, 기원 전 1323년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이집트의 양식

이집트 미술은 역사상 가장 완고하고 보수적인 미술로 알려져 있습니다. 3000여 년 동안 지속된 양식의 일관성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도7에서 볼 수 있듯이 이집트의 인물상은 항상 얼굴은 옆면, 눈은 정면, 가슴은 정면, 발은 옆면으로 조합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나타내었을까요. 이집트 미술은 조각이나 회화나 할 것 없이 모두 대상의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도8의 규범에서 보듯 그 규칙은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었습니다. 그림의 크기가 크던 작던 높이를 23.5로 나누어 금을 긋고 무릎은 언제나 7선을, 허리는 13선을, 어깨는 19선을 지나게 그렸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리던지, 어느 왕을 그리던지 결과는 언제나 똑같은 상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획일적으로 했냐고요? 이러한 질문은 우리시대에 가능한 것이고, 만약 이집트 미술의 제작목적을 생각한다면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형상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왕과 왕조의 지속성이 강조되듯 그 안의 미술도 변함없는 모습을 취해야 했을 것입니다.

 

도7 <헤지라의 초상>
기원전 2778-2723년경, 높이 115 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8 이집트 벽화의 인체비례
 
 
 
 

 

그러나 한편 고분에서 발굴된 관리들의 초상에서는 매우 사실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카푸레 왕의 상>(도9)과 관리였던 <카 아페르상>(도10)을 비교해 보면 왕의 상은 엄격한 규범에 맞춰 제작하였지만 관리의 상은 구체적인 한 사람의 초상 같습니다. 얼굴이 크고 네모나며 신체가 건장한, 아마도 무관을 담당하였을 듯한 남자입니다. <서기관>(도11)의 모습도 매우 현실적입니다. 정직한 얼굴, 왕 앞에서 항상 같은 자세로 이렇게 쓰고 있었을 반듯한 정좌자세, 중년의 신체가 지닌 배의 주름 등 우리는 바로 실제의 서기관을 보고있는 것 같습니다.

 

도9 <왕 카푸레>, 이집트, 기자출토
기원전 2520-2494년경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10 <카 아페르> 이집트 사카라의 고분
기원전 2450-2350년경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11 <서기관> 사카라출토
기원전 2400년경, 석회암, 높이 53.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12의 패널은 티(Ti)라고 하는 귀족이 하마 사냥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의 모습은 우리가 앞서 본 규칙에 맞게 그려졌지만, 작살로 고기를 잡고 있는, 작게 묘사된 노예들은 규칙과는 관계없이 아주 생동감이 있습니다. 또한 이집트의 한 부조에 묘사된 밧줄을 끌고 있는 노예의 다리를 보면 해부학적인 관심까지 보입니다(도13,14). 노예들에게 법칙을 적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겐 위엄을 부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12 <하마사냥을 지켜보는 티>
기원전 2510-2460년경 부조
높이 114.3 cm, 티의 무덤
 
 
도13 <밧줄 끄는 인부들>
기원전 2400년경
티 마스타바, 사카라
 
 
도14 도13의 가운데 인물 도면
 
 
 
 
우리는 무덤에 부장되어 있는 흙 조각에서도 이러한 활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절구에 반죽을 하는 듯한 여자 노예(도15)는 일로 세상을 산 튼튼한 신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낚시를 하는 어부들은 빠른 동작들을 보여줍니다(도16).

 

도15 <여자 노예>, 기자 출토
기원전 2325년경, 높이28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16 <어부>
기원전 2000년경, 높이 31.5cm, 폭90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다시 왕의 상을 보면, 어느 왕에게나 똑같이 적용된 엄격한 규범의 의미를 더욱 잘 알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은 관리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여야 했으며, 이들을 나타내는데 적용한 엄격한 규범은 바로 그들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로 나타내는 적절한 조형언어였던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조각가를 지칭하는 말은 '영원히 살아있게 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새기고 깎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우리말이 행위에 기준을 두었다면, 이집트어에서의 조각가는 역할에 의미를 두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미술을 다시금 생각하면, 무한한 개성과 순수함을 요구하는 현대미술은 오히려 특별한 상황으로 이해됩니다. 역사 속의 미술은 언제나 목적을 지니고 제작되었으니까요.

 

 

이집트의 회화

그리스부터 이어져오는 서구의 회화는 크게 보아서 사실과 표현이라는 두가지 기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이집트의 회화는 이후 지속되는 서구회화와는 매우 다른 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왕의 새 사냥(도17)과 연못이 있는 정원(도18)의 그림을 봅시다. 왕은 우리가 앞서 본 규범에 맞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왕은 크고 왕비인 듯한 서 있는 여자는 그 보다 작고, 왕의 다리 사이에 있는 여자는 더 작습니다. 새들은 모두 옆면으로 그려져 있고 물 속에 있는 물고기까지 옆면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보이려면 우리 눈이 물 속에 들어가 있어야겠죠. 즉 화가가 한 시점에서 모든 사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고 각 사물마다 다른 시점에서그린 것입니다. 어린애들 그림 같다고요? 그러나 오리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를 그린 묘사력을 보십시오. 관찰력이 매우 뛰어난 묘사력이지요. 우리는 지금도 이러한 묘사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순수미술분야가 아니지요. 바로 자연도감의 그림들입니다. 도감의 그림들은 새나 물고기를 옆으로 그립니다. 그래야 그 특징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는 힌트가 되지요? 네, 바로 이집트 미술은 사물의 특징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시점에서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특징을 전달하는 관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이해하면 연못 그림(도18)도 전혀 엉뚱하지 않습니다. 연못은 위에서, 오리와 물고기 그리고 연꽃은 옆에서, 나무는 옆에서 본 모습입니다. 아마 한 시점에서 연못을 보았다면 우리는 연못이 사각이었는지, 연못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나무들에 가려서 연못이 거의 안 보였을 테니까요. 이 그림은 우리에게, 네모난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엔 나무들이 빙 둘러 있었으며, 연못엔 오리와 물고기, 연꽃이 떠다니고 있었음을 마치 말로 전하듯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17 <수풀 속의 새 사냥>
기원경 1400-1350년경, 프레스코
런던, 대영박물관
 
 
도18 <네바의 정원>
테베의 고분벽화, 기원전 1400년경, 64×74.2 cm
런던, 대영박물관
 

 

아마르나 문화

이집트 미술은 거의 30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지만 기원전 14세기에 약 20-30년 동안 다양하게 변화했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아메노피스 4세 치하의 개혁에서 였습니다. 그는 당시 수구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크고 주로 승려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를 개혁하기 위해 아몬신을 믿던 종교체계를 태양신인 아톤 신으로 바꾸고, 테베에 있던 수도도 현재의 아마르나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수도의 이름을 '아케나톤' 즉 아톤신의 지평이라고 부르고, 자신의 이름도 '아크나톤' 즉 '아톤 신을 대리하는 자'라고 바꾸었습니다. 그는 매우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습니다. 시장에 돌아다니며 서민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기도 하고, 왕 혼자의 권위보다, 부인과 가족이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즐겼습니다.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아톤신의 빛을 받는 모습을 새기게 하고(도19), 부인 네페르티티의 상을 많이 제작하게 했습니다(도20,21). 도20,21에서 보는 부인상은 정말 매력적이지요? 아주 모던한 머리장식과 화장법이 특히 눈길을 끕니다.

 

도19 <왕의 가족> 아마르나 출토
기원전 1365-1349년경, 높이 44cm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20 <네페르티티> 옆면
기원전 1353-1335년경
석회석에 채색, 베를린, 국립박물관
 
 
도21 <네페르티티>
 
 
 
 
 
 
 
왕 자신의 모습도 종래 왕의 상과는 매우 다르게 제작되었습니다. 도22의 아메노피스 4세를 보십시오. 신체의 유연한 선과 긴 얼굴이 매우 감성적이지요. 두상(도23)을 보면, 측면의 얼굴에 눈은 정면인 종래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얼굴이 길고, 눈은 옆으로 가늘며, 두텁고 육감적인 입을 지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왕의 상을 이렇듯 개성 있게 나타낸 시대는 일찌기 없었습니다.

 

도22 <아메노피스 4세 흉상> 기원전 1365-1360년경, 사암
높이 153cm, 카르낙 출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도23 <아메노피스 4세(아크나톤)> 기원전 1360년경
석회적, 부조, 높이 14cm, 베를린, 국립박물관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개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왕위를 계승한 아들은 수구세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여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기고 자신의 이름도 '투탕카톤'에서 '투탕카몬'으로 바꾸어야 했습니다. 미술의 성격 또한 다시 보수적으로 변하였지요. 아메노피스의 개혁과 성격은 너무 과격하여 그는 광인이라고 까지 불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지중해 윗 쪽, 주제3에서 살펴 볼 에게문화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자유로운 미술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엄격하였던 이집트 미술을 생각한다면, 아마르나 문화의 이른 종식은 너무나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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