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책소개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13492.html

 

<광신>
알베르토 토스카노 지음, 문강형준 옮김, 후마니타스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광신>을 관통하는 열쇠어는 ‘복수(複數)의 계몽주의’다. 지은이가 이의 제기하는 일차원적 계몽주의(소박한 계몽주의, 표준화된 계몽주의) 이해는 계몽주의를 이성이나 합리주의라는 일관된 도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처음부터 하나가 아닌 이중(doubling)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는 단수가 아닌 ‘계몽주의들’이라고 해야 할 만큼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숭앙을 ‘계몽주의1’이라고 한다면, 비타협적이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평등과 해방을 실현하려는 사회 변혁 열정을 ‘계몽주의2’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계몽주의 1과 2가 합세한 결과물이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의 서양 정치나 정치철학은 항상 ‘계몽주의1’이 ‘계몽주의2’를 악마화하고 배격했다. ‘계몽주의1’을 물신처럼 떠받드는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프랑스 혁명의 전리품인 대의 민주주의를 보검인 양 휘두르며, 합의와 숙의라는 매개(의회)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정치적인 것’은 모조리 정치 바깥에서 벌어지는 광신으로 매도한다.

 

용산과 강정을 거쳐 밀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을 비난하는 위선적이고 기회적인 자유주의자들은 ‘계몽주의1’이라는 반(反)광신의 방패 뒤에 숨어 ‘계몽주의2’에 광신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하지만 대의 민주주의 어디에도 강정과 밀양의 광신자(?)들이 앉을 ‘협상 테이블’은 없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돼!’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가스통 우익’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대의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모든 것이 됨으로써, 대한민국에서는 일찌감치 ‘자유민주주의=전체주의’라는 대립물의 일치가 완수되었다. 이 기묘한 ‘이중’과 역설은 그것과 정반대인 ‘전체주의=자유민주주의’라는 위험한 등식마저 사유하게 만든다. 즉 전체주의 속에도 분명 평등이나 해방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적인 계기가 있다는 것. 박정희의 ‘유신정권’이나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그 나라 국민의 열띤 지지를 받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광신>은 소박한 계몽주의가 봉쇄해 놓은 새로운 전체주의의 출구로 광신을 호출한다. 광신은 ‘나는 이 정권이 싫어!’라면서 고속도로 중앙선을 역주행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정치적 광신은 반드시 ‘당파적 열정’으로 결집된다. 이 책에 충실한 해제를 쓴 번역자가 이 점을 부각시키지 않은 것은, 그가 문화비평가라는 초월적인 자리에 있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지식인은 ‘당파’라면 무조건 질색팔색을 해야 진짜 지식인이라고 믿고 있지만,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당파적 지식인’은 ‘계몽주의1’이 아닌 ‘계몽주의2’의 적자다.

 

지은이가 말하는 ‘당파적 기질’ 또는 ‘격정적 당파성’이 곧바로 당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모든 광신자는 당으로 모이며, 모든 당이 광신자의 결집체라는 것은 진실이다. 실제로 박근혜 후보가 당선하면서 새누리당은 자코뱅보다 더 자코뱅적이고, 볼셰비키보다 더 볼셰비키적이 되었다. 이것은 결코 비난할 게 아니다. 민주당은 새누리당만큼 강력한 대의가 없기도 하지만, 새누리당만한 광신으로 뭉치지도 않았다. 표준적 계몽주의로는 전체주의라는 광신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당신들은 새누리당의 ‘빵셔틀’인 거야!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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