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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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대해 논란도 많고 그의 극복을 위한 대안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자유'라는 말에 유난한 애착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른바 새로운 자유란 무엇을 뜻할까?
이제 어느 곳에서나 등장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해 온 '자유'라는
말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고 새롭게 사유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이 새로운 자유는 우리
에게 해방을 가져가 준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몰락과 공포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그 출발에서부터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상업과 교역을 자유롭게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신체적 자유와 소유물의 배타적
지배의 자유를 누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자유'가 전제되지 않고서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 더불어 증가된 자유는 단순하게 소극적으로 타인의 영향으로 부터 자유로운
것 외에 사회적으로 평등한 기회의 보장을 강구하도록 했다. 여기서 민주주의와 사회권의식이
발생한다. 국가의 약자에 대한 배려와 통기기능에 있어서 국민의 보호가 첨부되었다.
경제적으로 자본활동의 자유로는 그 사회의 내적 갈등을 완화시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두 번의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커다란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70년대 대두된 '신자유주의'는
80년대 현실적 정치적 힘을 얻음으로서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본주의적 발전을 도모했
다. 세계화... 그 물결의 시작이 세계를 뒤덮으며 인간 삶의 조건을 극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
이다.  

이론적인 세계화가 경제학이나 사회학 교과서에 등장한지는 꽤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로
겪어야 하는 세계화 즉 '신자유주의'는 1997년 부터 실제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 부도의 위기
에서 IMF가 강제하기 시작한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구조조정은 '신자유주의'를 우리 피부 깊숙하
게 받아들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때부터 우리는 구조조정이니 자본의 민영화니 떠들
면서 경쟁과 효율이 최고가 되어버린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수많은 실업자들을 길거리에
내몰면서...  

흔히 MB정권의 행태가 민주주의를 10년을 후퇴시켰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게
바라본다. 후퇴가 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가속화에 따른 당연한 결과일 뿐이라
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진보정당의 실천이 왜 의미있는지 밝혀진다. 현재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불신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자유'에 대한 불철저한 성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단순하게 '자유'를 기본전제로 받아들일 수 없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강요한다. 현재의 '자유'로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신봉
하는 자유는 거꾸로 민주주의를 압살하기 때문이다.

흔히 맘몬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개탄한다. 물질주의적 가치의 추구가 어떠한 가치보다
더 중요해진 세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순간, 이제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돌아간다.
성공을 하건 실패를 하건 그건 온전하게 개인의 책임일 뿐이다. 거기에는 실패했을 경우 나락
으로 떨어지는 공포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누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을까?
그러니 모두 성공을 외친다. 돈을 외친다. 그것은 생존이기 때문이다.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
남기 위해서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심연에는 추방에 대한 공포가 자리한다.  
단순하게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도래로 보기에는 그 공포의 심연이 너무 크다.  

자본주의 국가는 모든 국민을 보호한다는 전제 하에 수립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국민들 중 일하고 세금을 내는 국민들만 보호된다.  그럼 국가가 보기에 필요없는 국민들은?
국가의 정책에 항의하는 국민들은? 모두 테러리스트가 되어 버린다. 용산의 희생자들은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자국의
국민들은 국민이 아니다. 강제로 진압해서 척결해야 할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용산에서 쌍용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은 국민을 보지 않았다. 테러리스트를 보았을 뿐이다.
이미 그들은 국가에서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가진 것이 없어서 자본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제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자본의 질서에 편입해 순응하는
일부를 보호한다. 나머지는 감찰하고 저항하면 진압할 대상일 뿐이다.
지난 정부부터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적 질서의 개편은 현 정부에서 더욱 맹목적이고 날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급진적 자유주의자라 해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확한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어쩌면 협력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견제하고
비판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린다. 한나라당의 패배가 민주당의 승리로 귀결되어도 비판의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으로 이러한 시대를 뚫고 나갈 것인다. 우리들에게 대안은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명쾌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신자유주의'적인 질서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그리고 주변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할 것을 권장한다.
촛불에서 보이듯 저항이 멈춘 것은 아니다. 물론 저항이 항상 성공하는 것 역시 아니다.
다만, 저항함으로서 우리는 돌파할 가느다란 틈새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틈새가
어쩌면 우리를 구원한 튼튼한 동아줄이 될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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