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럽에선 우파의 변신이 화제다. 중도우파 정당들이 좌파 정책을 과감히 채택하면서 좌파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진화하는 유럽 우파의 대표주자들이다. 중도좌파는 영국과 스페인 등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뿐 유럽은 대부분 우파 세상이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큰 위기에 빠진 시점에 자본주의를 줄곧 비판해온 유럽 좌파가 퇴조의 길을 걷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유럽에선 우파가 ‘현대화’를 꾀하면서 좌우 구분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말도 나온다. 작은 정부, 감세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 우파는 복지체제와 의료보험, 온실가스 감축 등 좌파가 제기했던 어젠다들을 점차 포괄하고 있다. 최근 열린 영국 보수당 당대회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당수는 보수당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당인가를 설명하는 데 주력했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노동당 대회에서 고든 브라운 총리는 노동당이야말로 보통 중산층의 정당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언뜻 보면 좌우가 바뀐 것 같다.
유럽 유권자들은 이제 좌우파가 엇비슷하게 제기하는 어젠다를 놓고 어느 쪽이 더 효율적으로 실행할지를 판단해 한 표를 행사하는 것 같다. 저성장과 재정 적자의 확대 속에서 현재의 복지국가를 어떻게 유지·발전시킬 것인가? 우파는 유럽에서 제기되는 이 문제에 대해 비교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파는 좀더 적은 세금, 금융규제의 개선, 노령화 대책 등을 통해 복지국가를 더 효율적으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유권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유럽 유권자들은 복지국가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 우파가 변신중이라면, 미국 우파는 방향을 잃고 헤매는 형국이다. 미국 우파들이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두고 유럽 좌파 같다고 공격하는 것은 우습다. 유럽에서 의료보험은 더이상 좌파 어젠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우파들은 색깔론과 인종차별적 공세에 매달리는 퇴행적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유럽에선 좌우가 수렴하고 있지만, 미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 좌우의 간극이 더 벌어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을 유럽 우파의 ‘좌향좌’와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양쪽의 역사·정치적 배경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독일, 프랑스 등의 우파의 변신에는 체제에 대한 고민이 묻어 있다. 앵글로색슨식 ‘약육강식’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왼쪽 날개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중도·실용에는 그런 고민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정책 방향의 근본에 대한 고민 없는 대증요법에 가까워 보인다는 얘기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 국민이 이 대통령에게 한 주문과, 유럽 유권자들의 선택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유럽 유권자들은 우파에게 복지국가를 효율화해 달라고 주문했다. 우리 국민은 이 대통령에게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이룩해놓은 것들을 출발선 삼아 이를 더 효율적으로 유지·발전시켜 달라고 주문했다고 생각한다. 그 출발선의 목록에는 민주화·산업화 과정에서 어렵사리 토대를 닦아놓은 더불어 사는 사회체제, 실질적 민주주의 제도들, 남북의 공존 등이 포함된다. 지난해 촛불은 대선 때 국민들이 부탁했던 이런 출발선을 뒤로 돌리려는 시도에 대한 경고였다. 중도·실용이 겉만 번지르르한 채 못사는 사람한테 떡 하나 주는 식이면 곤란하다. 중도·실용이 그동안 이뤄놓은 성과들을 오히려 후퇴시키는 것으로 판명날 경우 이명박 정부는 또다시 촛불 때처럼 ‘일패도지’할지도 모른다.
백기철 국제부문 편집장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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