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권침해와 인간고통은 계속될까? 영국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조효제 옮김, 창비, 2009)이라는 책을 썼다. ‘왜 국가와 사회는 인권침해를 부인하는가’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은 주로 ‘부인의 심리학’을 다루고 있다. 나는 언론학도로서 언론의 문제를 다룬 제7장에 눈길이 갔다. 코언은 이렇게 말한다.

“문화적 부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미디어라는 야수가 무엇을 선별하고 가공하고 보도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대단히 포착하기 힘든 과정이다. 미디어의 여과장치가 문화적 부인 그 자체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개인 차원의 ‘부인의 심리학’은 대중매체의 매개 과정을 거치면서 집단 차원의 ‘부인의 경제학’으로 바뀌기 때문에 더욱 문제다. 한국을 사례로 삼아 살펴보자. 나는 한동안 <한겨레>를 구독할 만한 사람이 구독을 하지 않을 때엔 꼭 그 이유를 캐물었는데, 답은 거의 한결같았다. 비판 일변도로 너무 어두워 불편하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비판의 내용엔 동의한다는 점이다. 어떤 분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도 살아야 할 것 아니냐”의 논리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한 건 잘 알고 있지만,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만 빠져 지내다간 자기 한몸 지키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대중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느라 이미 충분히 피곤한데다 지쳐 있다. 쉬고 싶어 한다. 위로받고 싶어 한다. 아니면 좀더 나은 경제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애쓴다. 모두 다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중요한 건 이들이 언론을 포함한 모든 대중매체를 이용할 때에 갖는 첫째 동기가 바로 그런 오락·위로·자기발전이라는 사실이다. 개인적 삶의 영역을 떠나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의 선택 이유가 그런 만큼 세상의 불의에 대한 부인이 집단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내외 모든 대중매체 상품이나 관련 기업들의 성공 사례를 보라. 오락·위로·자기발전 이외에 ‘양심에의 호소’로 성공을 거둔 사례가 있는가? 물론 늘 예외는 있기 마련이지만, 판 자체를 뒤엎진 못한다. 오늘날 한겨레가 보수신문들에 양적으로 밀리는 이유는 자본력이 약해서만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인권’이 ‘경제’에 포섭되고 ‘개인 심리’가 ‘시장 논리’에 압도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매년 200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이 자살을 하지만, 이미 이런 자살은 뉴스 가치를 잃은 지 오래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잘 살아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자녀의 입시전쟁 매니저로 맹활약하고 있다. 우리는 ‘재개발’의 잔인성을 평소에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개발로 지어진 아파트를 거부하진 않는다. 우리가 사회적 사건으로 충격을 받거나 분노하거나 비탄에 잠기는 건 모든 대중매체가 집중적으로 매달리는 예외적 사건에 국한된다. 즉, 인권과 고통도 대중매체 이벤트가 될 때에 비로소 감지될 뿐이다.

모든 게 대중매체 하기에 달렸다는 ‘대중매체 결정론’이나 아예 경쟁을 없애자는 근본주의 처방을 역설하려는 게 아니다. 우선 실천 가능한 차원에서 대중매체 개혁의 의제를 다시 점검해보자는 뜻이다. 좀더 넓게 볼 필요가 있다. 오락·위로·자기발전이 잘 팔리는 상품이 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는 것과, 그것들을 어떻게 해서든 인권과 고통의 문제와 연결해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매우 크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저널리즘의 문법은 여전히 반세기 전의 것이다. 그때와는 세상이 크게 달라진 만큼 새로운 문법의 창출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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