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열쇳말 ③ 도전… 당정 분리, 언론과 선긋기, 지역주의 타파 등 새로운 시도 계속했지만
우파·족벌언론 포화에 상처만
  

“저는 이번 선거를 통해 낡은 정치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정치의 시대가 개막될 것임을 선언합니다.” 2002년 대선을 이틀 앞둔 12월17일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무현 시대’를 이렇게 규정했다. 하지만 1년 뒤인 2003년 11월5일 그는 원로 지식인 13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연 오찬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종이 세종의 시대 기반을 닦은 것처럼 새로운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가 되는 것 같고 구시대의 막차를 탄 것 같습니다. 과거의 구태에서 벗어나 후배들이 다시는 흙탕물에 발딛지 않도록 하고, 다음 정부가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랬다. 그는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 맏형’이 되려고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구습은 끈질기고 뿌리 깊었다. 도전은 번번이 좌절됐다 

 

족벌 언론, “좌파” 색칠로 공격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기득권을 포기함으로써 정치개혁을 시도했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과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공천권과 당직자 임명권을 통해 당에 전권을 휘두르는 ‘총재님’이던 역대 대통령과 달리 그는 그저 평당원이었다. 당정 분리를 실행한 것이다. 대가는 몹시도 썼다. 당내 굳건한 지지기반은 없었다. 2006년 지방선거 참패에 이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 아파트값 폭등 등으로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자 급기야 탈당까지 요구받았다. “섣부른 당정 분리 때문에 국정운영이 안 된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를 두고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여당이 청와대의 거수기가 되는 걸 막고 국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당정 분리는 역대 대통령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문제는 당정이 소통까지 끊어버리는 바람에 양쪽 다 고립돼 최악의 경우가 됐다”고 지적했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의 일부분이고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이다. 국민주권·인권존중의 시대로 간다고 하면 그 낡은 유물은 폐기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2004년 9월5일 문화방송 대담에서 나온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구시대 청산이라는 목표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보안법 폐지 뜻은 한나라당과 우파 진영의 엄청난 반발에 부닥쳤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대한민국의 법질서가 야만의 시대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장치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막아내겠다”고 했다. 한나라당은 예산안 처리를 위한 임시국회도 거부했다. 우파 단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는커녕 단 한 글자도 바꾸지 못했다.

족벌언론과 벌인 싸움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2001년 8월1일 민주당 수원시 국정대회에서 그는 “비리·특권 신문인 <조선일보>를 그대로 두고는 이 땅의 진정한 개혁은 없으며, 당원들과 지도부가 똘똘 뭉쳐 당운과 국운을 걸고 싸우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조선일보>는 함께 몰락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대통령이 된 뒤 그는 ‘국운’을 걸고 족벌언론과 싸웠다. 국정연설에서 “족벌언론의 횡포” “박해” 등 자극적인 표현을 동원해 이들을 비판했다. 이들의 취재엔 응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신문시장 독과점을 규제하는 신문법도 제정했다. 오보엔 일일이 정정·반론 보도를 신청하도록 공무원을 독려했다. 족벌언론은 노 전 대통령에게 ‘좌파 정권’이라는 색칠을 하며 공격적으로 대응했다. 부동산정책도 좌파 정책, 교육정책도 좌파 정책이라고 했다. 2004년 3월 노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자 <조선일보>는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고 썼다. <동아일보>는 2006년 6월 “(임기가) 남은 1년 반, 우리끼리라도 실용적 세계화로 살아남아야 한다. 일제 36년도 견딘 우리다”라고 썼다. 증오였다. 불행히도 여론을 좌우하는 힘은 그가 아니라 이들에게 있었다.  


탈권위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중요하게 여긴 과제였다. 2003년 3월11일 참여정부의 두 번째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그리 지치지 않았다. 회의 도중 대통령이 제안한 휴식 시간 때문이었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회의장 바깥 복도에 마련된 탁자에 둘러서서 커피를 마셨다. 노 전 대통령도, 장관들도 모두 손수 탄 차였다. 경직된 분위기로 진행되던 과거 국무회의에선 휴식도, 커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벼운 농담도 오갔다. 이날 회의가 끝난 뒤 한 국무위원은 “그런 자리도 처음이지만, 대통령이 직접 차를 타 마시는 것을 보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대통령께 접근하기가 쉬워졌다”고 했다 

 

지역 균형발전도 헌재에 가로막혀  

노 전 대통령 스스로 권위주의의 갑옷을 내던진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국민에게 개방했다. 총리가 주재하던 국무회의부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수석·보좌관회의까지 직접 주재했다. 회의엔 장관뿐만 아니라 관련 실무자까지 참석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얘기했다. 듣고 싶은 의견이 있으면 행정관한테도 직접 전화를 걸었고, 맞담배도 피웠다.

거침없는 표현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통령의 언어와 서민의 언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일상과 공식 언어의 일치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서민 대통령을 지향하는 철학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는 당시 청와대 참모의 말은 되씹어볼 만하다. 어깨에 힘을 주는 게 아니라 국민과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해야 진짜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라는 얘기다. 우파와 족벌언론은 이번엔 ‘경박하고 품격 없다’는 평가를 내려줬다.

지역주의 해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숙원이었다. 1990년 3당 합당에 “이의 있습니다”라고 손을 드는 순간 그는 지역주의 해소의 상징이 됐다. 당내 아무런 기반이 없는 ‘영남 출신 호남당 대선후보’의 당선은 많은 이들에게 지역주의 해소의 가능성을 꿈꾸게 했다.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것도 지역주의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인사에선 ‘영남 패권주의’만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역 균형발전도 그의 도전 과제였다. 하지만 그 전략으로 내놓은 행정수도 건설은 추진 초반부터 쉽지 않았다. 2004년 1월 공포된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대해 그해 9월 헌법재판소는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관습헌법”이라는 기상천외한 논거를 대 위헌 결정을 내렸다. “수도 이전은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막겠다”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을 비롯해 수도권의 민심도 악화됐다. 규모를 줄인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바꿔 다시 추진할 수밖에 없었지만, 수도권과 충청권으로 민심은 갈릴 대로 갈린 뒤였다.

노 전 대통령이 꿈꾼 정치개혁의 도착지는 제도로 운영되는 민주주의였다.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들 만큼 기록에 집착했던 것도 그런 의지였다. 그는 밤에 청와대 관저에서 사적으로 누구를 만나더라도, 다음 날 기록관리비서관에게 만난 사람과 나눈 대화의 요지를 알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지정기록물은 37만여 건에 이른다. 앞선 대통령들이 청와대를 떠나면서 지정기록물을 거의 남기지 않은 것과는 판이하다. 하지만 역시 ‘선배’들이 옳았던 것일까. 이명박 정권은 집권 여섯 달 만에 법원을 동원해 지정기록물 공개에 나섰다. 지정기록물은 쉽게 공개될 경우 현직 대통령이 후임을 의식해 주요 기록을 제대로 안 남기거나, 후임이 직전 대통령을 상대로 정치 보복을 벌일 수 있어 비공개라는 장치를 둔 제도다. 이명박 정부는 이에 더해 ‘기록물 유출’ 논란까지 일으켰다. 이준한 교수는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하면서까지 책임정치를 할 기반을 만든 건데, 본질과 무관한 다툼이 돼버려 안타깝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왜 끊임없이 도전하고, 반복적으로 좌절을 겪어야 했을까?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수석전문위원은 “구습을 끊어내고자 하는 열정은 강했지만, ‘그 다음’을 내놓지 못했다. 구시대의 관습과 지역주의 타파, 당정 관계 변화 등 중요한 화두를 던졌지만, 그러고 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준비된 내용을 보여주지 못해 스스로 입지를 약화시켰다”고 분석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지역 균형발전, 행정수도 이전 등의 문제가 손쉽게 ‘이념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던 것도, 이해관계가 충돌하거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설 수 있는 사안을 ‘당위’로 밀어붙이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구시대의 막내 되고자 했을까


대통령 자리를 떠난 그는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가 ‘시민’이 되려 했다. ‘전빵’(구멍가게의 경상도 사투리)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고, 자전거에 매단 수레에 손자·손녀를 태우고 마을을 달리기도 했다. 봉하마을 주민들과 오리농법을 이용해 ‘친환경 봉하 오리쌀’을 수확했다. “자유롭게 대화하되, 깊이있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민공간을 만들어보자”며 개설한 웹사이트 ‘민주주의 2.0’에선 ‘노공이산’(우직한 사람이 뜻을 이룬다는 ‘우공이산’에 ‘노’를 합친 말)이란 필명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등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권위주의를 벗어던지고 참여와 토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발전에 힘을 보태려는 노력이었다. 처음 보는 유형의 전직 대통령 모습에 봉하마을은 관광객으로 붐볐고, 누리꾼들은 ‘노간지’(멋진 노무현이란 뜻의 합성어)라는 애정어린 별명을 붙여주며 열광했다.

검찰이 숨통을 옥죄어오자 그는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고 썼다. 마침내 2009년 5월23일 스스로를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는 청렴해야 (된다고) 하고, (지도자에게) 결단력을 요구하지만 50년이나 100년 뒤에 보면, 많은 흠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같은 방향으로 가느냐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느냐가 문제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게 중요하다.”(2002년 9월26일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 마지막 순간, ‘노공’은 혹시 ‘구시대의 막내’가 되길 바라며 이 말을 떠올리진 않았을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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