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촛불은 나에게 많은 걸 남겼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그 휴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에서 일주일에 한 번 촛불을 들고 있다. 최소한의 실천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거대한 촛불이 되길 열망하면서...그럼에도 그간에 성과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기존의 성과까지 잃어버릴까 걱정이다. 1주년을 맞이하여 촛불에 대한 논란도 많고 말도 많다. 문제는 실천이고 자신의 자리에서 알맞는 실천을 어떻게 일구어내는냐의 문제인데....항상 그것이 제일 어렵다.

[사회]촛불 1년,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새로운 운동방식의 성과와 한계, ‘제2의 촛불’은 타오를 것인가  

‘촛불‘은 2008년 여름 광장을 거치면서 시민주권을 대표하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자리잡았다. 시민들이 촛불을 저항의 상징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여름이 처음은 아니다. 시민들은 2002년 여중생 사망사건 규탄 집회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도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이전 촛불이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면, 2008년 촛불은 촛불행렬에 참가한 사람들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지울 수 없이 강렬한 불도장을 찍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을 계기로 점화돼 석 달 남짓 광장을 밝혔던 촛불집회가 5월 2일로 1주년을 맞았다. 5월 2일 10대들이 청계광장에 모였을 때만 해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냈던 촛불집회의 성과와 한계를 성찰하기에 적합한 시간적 거리다. 올해 2월과 3월에는 <촛불집회와 한국사회>(문화과학사),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가 잇달아 출간됐다. 4월 마지막 주에는 1주년을 눈앞에 두고 경향신문과 한겨레가 진보진영연구소 및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주관한 촛불1주년 기념 토론회가 이틀 간격으로 열렸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흐름은 확실히 달라졌다. 지난해 나왔던 촛불담론들이 촛불집회의 빛과 성과에 집중했다면 최근 논의는 촛불의 그늘과 한계를 짚는 데 좀 더 치중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촛불집회는 상상하지 못한 경로로 진화하면서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드러냈다. 그 다채로운 모습 속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면 ‘새로움’이었다. 그 새로움은 우선 ‘시민의 재발견’이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여러 모로 이전의 집회 참가자들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옷차림부터 달랐다. 10대들의 교복 차림 시위에 뒤늦게 합류한 시민들 가운데는 정장 차림이 많았다.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은 이 시기 자유로운 복장을 대표하는 말이었다.

움직임도 달랐다. 그들은 단일한 대오로 움직이지 않았다. 청계광장에서 시작한 집회는 5월 24일 집회를 계기로 가두행렬로 이어졌고, 거리로 나간 시민들은 정해진 목적지 없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경찰이 앞을 막아서면 저지선을 뚫는 대신 돌아서 다른 길로 갔다. 이런 이들이 모인 촛불집회는 집회라기보다는 축제였다. “공약을 지킬까봐 겁나는 건 네가 처음이다” “조중동이 신문이라면 우리집 화장지는 팔만대장경이다” 같은 창조적인 손팻말 문구는 이처럼 발랄한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전 집회와는 다른 ‘시민의 재발견’
자유롭게 움직이는 시민들 앞에서 당황한 것은 경찰만이 아니었다. 광우병대책위 차량은 집회 내내 광장과 거리를 오갔지만 촛불행렬을 앞장서 인도하는 구심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일부 시민은 현장에서 대책위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집회 참가자 최동식(29)씨는 “당시 대책위에 불만이 많았다. 시민들 사이에는 심지어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집회 참가자들로부터 모금한 돈으로 하루 30만 원짜리 숙소에서 잠을 잤다는 얘기가 돌 정도였다”면서 “당시 시민들 중에는 시민단체가 정부 보조금을 받는 곳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고 말했다.

시민의 대변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시민사회단체에 이 경험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박영선 참여연대 기획위원장은 “그 이전까지 시민단체는 시민에 대해 막연하고 추상적인 상만 갖고 있었다. 보수이데올로기에 포박당해 시민운동의 발목을 잡거나 의식적으로 깨어 있는 시민 둘 중 하나였다. 지난해에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구체적 시민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만큼 기존 시민운동이 일반 시민들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시민과 괴리되어 있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촛불집회는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서 촉발했다. 그런데 식품 안전은 기존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작은 이슈였다. 시민과 시민단체가 삶을 바라보는 감수성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운동방식에서도 촛불시민의 창조력은 기존 단체의 운동력을 훌쩍 뛰어넘었다. 기존 시민단체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건이었다.” 박 위원장의 말이다.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누구보다도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 자신이었다. 지난해 5월 말 유모차부대를 끌고 거리로 나와 주목받은 유모차부대 카페 운영자 정혜원(34)씨는 촛불집회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신문의 정치면과 사회면을 보지 않는 평범한 주부였다. 정씨는 “촛불집회는 정치가 일상의 모든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걸 알게 해준 계기가 됐다”면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던 이웃 엄마들이 이번 경기교육감 선거에서는 김상곤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말했다.

참여 시민도 새로운 자신 발견
촛불집회는 시민들에게 기존 미디어의 문제점도 새롭게 조명했다. 지난해 아프리카방송에서 촛불집회를 생중계하면서 ‘BJ 라쿤’으로 잘 알려진 나동혁(29)씨는 “지난해 5월 2일 첫 집회를 보고 신문을 보니 ‘어디에서 몇 명이 모였다’는 정도로만 처리돼 있었다. 더 황당했던 것은 보수 신문에서 촛농을 문제삼은 부분이었다. 이런 게 왜곡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런 시민은 나씨 혼자뿐 아니었다. 시민들은 촛불집회의 실상을 왜곡한다고 판단한 언론사에 광고를 주는 기업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실상을 전달한다고 판단한 신문에 대해서는 자발적인 배포 운동을 벌였다.

새로운 집회 양상과 정치적으로 각성한 시민의 발견이 광장과 일상의 영역에서 촛불집회가 던진 신선한 충격이었다면, 촛불집회를 계기로 불거진 선출된 정치권력의 정당성 문제는 대의민주주의 자체의 한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명박 정부는 분명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부였음에도, 3개월 남짓 주말마다 타오른 촛불집회에 담긴 민의를 모른 척하거나 힘으로 진압하려 했다. 6월 10일 광화문 한복판을 점령한 ‘명박산성’은 선거로 집권한 권력과 권력을 준 시민들 사이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대의민주주의 한계에 근본적 질문
6월 11일 새벽 시민들이 ‘명박산성’ 앞에 스티로폼 탑을 쌓고 컨테이너 장벽을 넘어서느냐 마느냐를 두고 새벽이 밝을 때까지 벌인 논쟁은 선거와 정당 중심의 기존 제도정치와 집회 등 직접 행동을 통한 운동정치 사이의 긴장을 첨예하게 드러냈다.

여기에는 87년이나 2004년과 달리 선출된 권력의 부당한 권력행사를 선거를 통해 심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 더욱 딜레마로 작용했다. 지난해 6월 중순 최장집 교수는 “운동의 강렬한 열정이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고, 장기적으로 지속되기 어려우므로 대의 민주주의 제도를 더욱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최 교수의 취지는 이해하나 당시 상황에서는 논리적인 모순이었다. 당시에는 좋은 제도권 정치가 없었기 때문에 거리 정치가 활성화됐던 것”이라면서 “여당은 물론이고 국민을 대변할 만한 야당 세력이 없는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촛불집회는 강렬하고도 오래 타올랐던 만큼 분명 그늘도 있었다. 한국노동연구원 은수미 연구원은 올해 2월 ‘촛불과 한국사회 중산층의 자화상’이라는 글을 통해 “촛불집회를 가지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이라고 추켜세우는 것 역시 과도하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은 끝내 홈에버 매장으로 오지 않았다… 촛불은 아름다웠지만 계급적 문제에 대해선 무력했고 둔감했다”는 이랜드 노조 부위원장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계층과 가까울수록 촛불은 좀 더 빛나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촛불은 어둡다”고 촛불의 한계를 지적했다.

“시민들 의견 모아내지는 못했다”
조대엽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공론을 모은 ‘전자적 대중’과 시민단체나 노조 같은 조직행동의 괴리가 너무나 뚜렷했다”는 점을 촛불집회의 한계로 꼽았다. 앞서 시민단체 내부에서 나온 반성과 통하는 대목이다. 노원구 지역촛불 카페에서 활동하는 ‘쥐니’(필명 여)는 “정말 많은 의견과 주장이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 내지르기만 했을 뿐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내지는 못했다”면서 “하나가 되는 게 참 어렵다. 그런 갈등을 대화로 풀지 못해 실망하고 각자 일상으로 돌아갔던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한 시민은 “거리투쟁 이후에 촛불이 스스로 도취됐고 비현실적인 주장들이 나왔다. 광화문에서도 그랬지만 아고라에서도 극단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는 걸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고 비판했다.

한계가 있다면 가능성도 있다.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은 지난해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시민들이 보여준 지지를 주목했다. 김 부원장은 “화물연대 파업은 획기적인 계기였다”면서 “시민들이 화물연대 파업을 ‘생계형 파업’이라고 부르면서 인정해줬다. 파업을 생활의 이슈로 파악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처럼 촛불집회가 파업과 같은 이슈를 생활 영역의 문제로 끌어들였을 때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은 것은 제2의 촛불이 타오를 것인가라는 문제다. 정태인 성공회대 교수는 “촛불은 용산 참사 현장과 비정규직 노조 파업을 따라다니면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당장 올해는 힘들겠지만 1~2년 안에 다시 타오를 것”이라면서 “신자유주의를 대중운동으로 극복하는 최초의 사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 신중한 입장도 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은 “제2촛불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정치가 시민의 욕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면서 “그러나 촛불을 신화화해서 얻을 건 없다. 1년이 지났으니 촛불집회를 돌아보면서 실천적인 교훈을 얻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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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5-15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주일에 한번씩 꼭 나가신다니,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네요... 화이팅입니다!ㅋ

머큐리 2009-05-15 10:07   좋아요 0 | URL
그냥 작년에 지역에서 촛불시위에 같이 참석하던 사람들끼리 조그만 카페를 하나 만들어서 의견을 공유하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