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이]님 서재에서 퍼온다.  

 

 

 

 

 

 

 

 

 

 

 

천개의 고원 서평 / 진태원

 

1.
뢰즈와 가타리, 또는 들뢰즈-가타리, 또는 들뢰즈가타리는 두 개의 구분되는 고유명사이자 서로 뗄 수 없게 연결된 머리 둘 달린 <괴물>(이들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에서)이면서, 또한 수없이 많은 흐름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익명의 뿌리이기도 하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그들이 이러한 통일성으로서의 다양성, 다원성으로서의 일원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사실 철학사에서 공동의 저술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유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1846), 『공산당 선언』(1848) 등을 공동으로 저술했으며, 그 외에도 그들의 작업은 늘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에 조금 앞서 루이 알튀세르는 자신의 제자들이자 동료들인 발리바르, 마슈레, 랑시에르, 에스타블레와 함께 공동으로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1965)를 발표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은 두 개의 분리된 인격체, 두 명의 독립적인 사상가가 결합해서 그들이 각자 이전에 추구해 왔던 사상과 구분되는 새로운 사상의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전의 사례들과 구분되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2.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은 또한 그 자체로도 매우 새롭고 매우 강력하다. 매우 새롭다는 것은 이들의 사상이 플라톤 이래 서양 사상의 주요 흐름을 거슬러 새로운 노선을 제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매우 강력하다는 것은 이러한 노선이 플라톤주의 철학 또는 초월성의 철학과 지배권력 사이의 본질적 연관성을 드러내 주고, 이를 넘어설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 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은 일차적으로 존재행동학(onto-ethologie)의 관점에 따라 파악될 수 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8),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1968) 및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1972) 『천개의 고원』(1980) 등에서 체계화된 존재행동학의 요소들은 존재의 일의성 또는 <고른 판>과 역량의 존재론 또는 <기관 없는 신체> 및 일반행동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부터 말년의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일의성은 들뢰즈와 가타리 철학의 열쇠어로 남아있다. 존재의 일의성(univocite)이란 일차적으로는 존재가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왜 존재가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할까? 이는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어온 일체의 초월성의 담론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존재의 일의성을 확인하고 체계화하는 일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존재의 일의성, 존재가 하나의 의미로 말해진다는 것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복합적인 함의를 지니고 있다. 존재의 일의성의 핵심은 단순히 존재의 하나의 의미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원론으로서의 일원론에 있다. 곧 존재와 존재자들, 근거와 근거지어지는 것들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이나 간극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존재의 근원적인 다양성을 인식하는 데 있다. 이들에게 스피노자(또는 베르그송)의 철학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스피노자(또는 라이프니츠)는 <긍정적 무한>의 철학자다. 곧 그는 무한을 단순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무한의 내재적 인식가능성을 긍정하면서, 다양한 무한들, 따라서 환원 불가능한 다양한 질적 차이들의 소통, 관계의 문제를 자신의 철학의 핵심 문제로 삼았다. 이 때 각각의 무한들은 정의상 자율성과 동등성을 함축하기(이것이 소위 <평행론>의 존재론적 함의다) 때문에, 무한들의 소통, 관계는 항상 이미 타율성과 종속관계를 함축하는 초월적 질서인 <신학적 구도>가 아니라, <내재적 평면> 또는 <고른 판> 위에서 이루어진다.

존재론의 영역에서 초월적 구도, 수직적 위계관계를 배제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내재적 평면 위에서 충분한 합리성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존재자들 사이의 평등한 자유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론적 일의성은 항상 이미 역량(potentia/puissance)의 존재론 또는 기관 없는 신체론을 함축하며, 이를 요구한다.

역량의 존재론은 서양철학의 두 가지 전통에 대한 비판적 대결을 함축한다. 이 두 가지 전통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형상론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론이다. 이 두 가지 전통은 서로 비판적인 긴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이들은 존재자들의 생성, 즉 개체화의 문제를 내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공통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곧 이 두 전통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요소들(이것이 형상이든 원자이든)의 관점에서 생성의 문제를 다룰 뿐, 요소들 자체의 생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의 문제는 다루지 못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이는 이들이 존재자들의 내재적 역량을 단순한 가능태(le possible), 곧 그 자체로는 비실재적이며, 초월적인 외부의 원리의 작용에 의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는 허구화된 힘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한다. 하지만 스피노자-니체-베르그송을 따라 이들이 강조하고 있듯이 역량은 그 자체가 실재적인 힘이며, 역량의 내재성 덕분에 존재자들은 자신들의 관계설정을 위해 초월적 원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량의 존재론의 관점에서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운동(비실재적인 무에서 실재적인 현실의 창조라는 점에서 이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이다)이 아니라 잠재성에서 현행적인 것들(actualites)로의 내재적 차이화의 운동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역량의 존재론의 논리적 귀결은 주체와 객체, 사물과 인간,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이 실격되고 그 대신 기술적 존재자를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의 활동의 문제를 다루는 행동학(ethologie)의 문제가 실천철학의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에톨로지는 원래는 동물들의 행태를 다루는 생물학의 하위분과중 하나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이는 일의성과 역량의 존재론을 완성하는 철학 체계의 한 부분으로 격상된다. 이런 행동학의 문제설정에 따르면 유와 종의 분류법 대신 역량의 관점에서 존재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분류의 핵심 기준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예를 들면 짐을 끄는 말은 경주용 말보다는 짐을 끄는 소와 같은 부류로 분류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반행동학에서는 목적론적으로 위계화되고 질서지어진 기관과 기능보다는 정서/변용(affection)과 배치가 실천철학의 기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3.
이런 존재행동학의 체계가 다루려고 하는 실천적 문제는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1670)에서, 그리고 빌헬름 라이히가 『파시즘의 대중심리』(1933)에서 각자 제기했던 질문이다. “수 세기에 걸친 착취 이후에도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 <현실적으로> 착취와 예속을 <원할> 만큼, 모욕과 착취를 감내하고 있는가? ... 대중들은 전혀 순진한 얼뜨기들이 아니다. 어떤 지점, 어떤 일련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대중들의 욕망의 이러한 도착(perversion)이다.”(『안티 오이디푸스』) 왜 대중들은 자신의 지배를 욕망할까?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이는 대중들의 본질을 이루는 대중들의 역량이 바로 대중들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대중과 대중의 역량의 분리를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미시 파시즘의 체계다.

이들의 미시 파시즘 이론을 이해하려면 우선 푸코의 규율권력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17세기 이래 서양 사회의 지배 권력의 작동방식을 규율권력이라는 개념에 따라 이론화했다(특히 『감시와 처벌』 및 『성의 역사 1권』 참조). 곧 푸코는 프랑스 혁명 이래 근대 정치사상이 유포시킨 사회계약론과 주권적 주체의 관점과는 달리,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의 소유물이 아니며, 부정하고 금지하고 억압하는 힘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권력은 자유롭다고 가정되어 있고 또 스스로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주체들을 생산해 내고,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지배의 체계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푸코는 이를 규율권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19세기 이후 규율권력은 통제권력으로 바뀐다. 통제권력은 규율권력보다 더 심층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며, 규율권력에서는 여전히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있는 데 반해, 통제권력에서는 이 양자가 단일한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곧 규율권력에서는 예속적 주체가 자신의 인성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지배장치에 따라 규율되고 감시되지만, 통제권력에서는 이러한 통일성이 해체되고 지배장치 자체가 예속적 주체의 구성요소에 포함된다. 따라서 통제권력은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나 가치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우리가 이 욕망을 실현하는 방식들 및 능력들 자체를 통제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미시 파시즘이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는 미시 파시즘을 변혁하는 일인데, 미시 파시즘은 본질적으로 우리 각자의 근본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체계이기 때문에, 이는 동시에 우리 자신의 내재적 해체/변혁과 맞물려 있는 문제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에게 생성/되기의 문제가 핵심적인 윤리적-정치적 과제로 부각된다. 그리고 다시 이들에게 다수자의 생성들(devenirs de majorite)이나 소수자의 생성들(devenirs de minorite)이 아니라, 소수화되기(devenir-minoritaire)가 중요한 과제라면, 이는 이 후자의 생성/되기가 피지배집단 내에서도 배제된 타자의 타자(여성 흑인 노예들, 이주노동자들, 동성애자들 ...), 또는 오히려 이들을 타자의 타자로 만드는 메커니즘을 변혁의 핵심 문제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과 집단의 상호구성적 관계, 즉 배치(agencement)를 이론적 문제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며, 이를 수행적 형식으로 제기한다는 점에서 실천적이다.

 4.
따라서 내가 보기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지지자들이 결국 여전히 답변해야 할 문제는 실천의 문제인 것 같다. 리좀, 배치물, 지층, 성층작용, 판, 절편, 도주선과 단절선, 파괴의 선, 추상적 기계, 도표, 전쟁기계 등과 같이 이들의 저서에 담긴 현란한 개념들과 정신분석, 기호학, 마르크스주의, 문학 등은 물론이거니와 현대 수학 및 물리학, 화학, 결정학, 분자생물학, 동물행동학, 정신의학, 경제학, 음악 등을 넘나들면서 현란하고 난삽한 논의를 전개하는 이들의 작업에 얼이 빠지고 현기증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는 슬그머니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 법하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이 모든 논의들이 여기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들의 논의가 노동자들의 분신, 이주노동자들의 자살, 노숙자들의 추위와 굶주림에 대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이는 분명 호의적인 질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의적인 질문도 아니다. 오히려 이 질문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들의 사상을 세우면서 늘 마음에 품고 있었던 질문들과 다르지 않을 질문들이며, 따라서 그들의 사상을 공감하고 따르는 이들 역시 품어야 하고 또 나름대로 답변해야 할 질문들이다. 아마 그때 비로소 들뢰즈와 가타리는 두 개의 분리된 고유명사이기를 그치고, 새로운 가지들을 만들어내고 퍼뜨리는 익명의 뿌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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