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첫 공개수업 구경을 갔다. 

큰 아이 수업을 하나 들었는데 너무 졸려서, 다음 수업은 내가 재밌어보이는 수업을 찾아 들었다. 그래도 된다더라. 수업은 사회와 문화,뭐 이런 거였는데, 세계 여러 곳의 장례문화에 대해 알아보는 2학년 수업이었다. 그 수업을 듣고는 물었다. 

"야, 무슨 발표를 아이돌 노래하듯이 하더라. 돌아가면서."

"책임지지 않으려고 그러지, 자기가 조사한 거 자기가 발표하는 식으로."

"아." 

협동을 가르치려고 조별과제를 주는데, 서로를 미워하면서, 책임을 미루는 방식을 배우는 건가.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조사할 분야를 나눠맡는다. 나눠맡은 분야를 조사하고, 나눠맡은 분야를 발표한다. 듣는 입장에서는 뭐지, 싶은 발표들이다. 나눠맡은 분야를 정할 때 협의를 열심히 해야 발표할 때 연결성이 드러날 텐데, 그런 게 잘 안 보였다. 큰 주제, 말고는 이야기를 안 했나. 인터넷에 자료가 부족한 나라일 수도 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같은 조인데 이야기를 안 했구나, 싶은 그런 발표들이 많았다. 같은 조에 같은 점수를 준다면, 민원이 들어올까. 

연결점 없는 각각의 발표를 듣다가, 딱 한 조가 무언가 자연스러운 발표를 하는 걸 들었는데, 너무 좋아보이더라.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는 일이 사람들과 얼굴대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는 하지. 그래도 말하는 게 더 재밌지 않나.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이 변하는 중인 건가. 그래도, 오래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고, 보통 오래된 사람들이 듣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되는데, 그리고 사람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서 또래들도 들으면 좋은 게 뭔지 보일텐데, 싶었다. 들어보면 알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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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나는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폭력을 국가에 위탁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무기를 소유하지도 않고, 나의 자유를 국가가 제한할 때 보통은 따른다. 


국가는 나에게 제복으로 드러난다. 경찰의 제복, 군인의 제복. 공무원의 제복. 위기의 순간 제복의 명령에 따르려는 나의 어떤 의지는 이 공동체가 안전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고, 그 제복이 국가 내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폭력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폭력의 경계 가운데, 이야기들은 자라고 이야기들 가운데 사람들은 착각을 한다. 

조직은 무용하고, 무능하고, 무책임하다고. 

실상은 조직은 힘이 세고, 질문하지 않으면 타락하고, 리더 아래 살아남으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1. 조직은 힘이 세다.

언니가 준 이 책을 읽고 조직은 힘이 세다(https://blog.aladin.co.kr/hahayo/9027162), 라고 서평을 썼다. 

조직이 저지른 멍청한 짓들에 대한 이야기고, 용감한 개인-변호사와 기자-이 조직과 싸워 결국은 바로잡은 이야기다. 이야기들의 특성대로, 이야기 안에서 과연 존재의 의미가 있는가 싶은 조직들이지만 이야기로 나오지 않는 것들 가운데, 본질들이 있다. 그 본질들을 잃을 때, 이야기들이 생겨난다. 

조직은 개인보다 힘이 센데, 조직에 속한 사람은 입이 없기 때문에 이야기는 개인에게 발화하고 결국 이야기 속에 사는 사람들은 조직보다 개인이 힘이 셀 수도 있다는 희박한 이야기들에 흔들린다. 

조직 속의 자신의 작은 위치를 쉽게 박차고 나가는 사람들, 개인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그게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신기하기 때문이란 걸, 잊는다-이 생긴다. 조직은 힘이 세고, 조직에 속한 개인은 조직이 존재하는 본질, 그 책임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2. 국가는 무얼까

국가는 무얼까(https://blog.aladin.co.kr/hahayo/6986791), 라는 서평을 남겼다. 세월호참사가 벌어지고 얼마 안 지난 날이었고, 나는 억울한 민간인만큼 이해할 수 없는 군인에게도 이입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움직였을까. 

조직은 어떤 논리로 움직이는가. 

왜 존재하는가, 에 질문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인이 자국민을 죽이기도 한다. 








3. 뒷 맛이 쓰다.

뒷 맛이 쓰다(https://blog.aladin.co.kr/hahayo/7608599)

작은 정부와 큰 정부가 충돌한다. 정부는 작을 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유,를 말하면서 선택한다. 국가의 돈은 내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고, 그 돈을 어디에 쓸지는 내가 권력을 준 사람들-대통령과 국회의원과 군수와 도지사와 등등-이 결정하고 있다. 


무얼 얼마나 할 지 균형을 잡기 어려운 문제고, 너무 큰 책임을 떠안고, 내 돈으로 생색내고 있는 정부를 보는 것도 좋지 않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정부를 보는 것도 좋지 않다. 


내게 위임받은 권력으로 나와 공동체를 보호해주길 바라면서, 끊임없이 보고 있어야만 한다. 쉽지 않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다음, 당시 대통령은 해양경찰을 해체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조직의 목줄을 쥐고 흔들면, 조직은 오히려 더 납작 엎드려 권력자를 살핀다. 


10월 29일 이후로 그래도 내게 인상적이었던 기사를 다시 보려고 링크를 남긴다. 


추모객이 된 대통령.. 재난에서 분리된 윤대통령에 대한 고찰(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110811425217201)


굉장히 안 좋은 시기에 국정 모르는 대통령 있다는 게 아프다(https://v.daum.net/v/2022110907051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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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2-11-13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저히 읽어나가기 힘든 역겨운 글들이 넘쳐나는 알라딘에 보기 드문 멋진 글입니다...^^
멀리서 방관자로 올바른 말만 떠드는것만큼 쉬운일이 없지요.
조직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별족 2022-11-14 06:43   좋아요 1 | URL
조직은 참 신기합니다.
 
이번 생은 해피 어게인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95
이은용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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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골라서 산 책이다. 골라놓고 읽지도 않길래 내가 읽어봤다. 읽었고, 읽히고 싶지 않다. 

N번째 삶이라는 주제로 청소년 대상으로 쓴 소설 모음이다. 

내가 싫어하는 세태의 어떤 면들이 모두 모여 있다. 

리셋버튼이 있으면 안 누를거야?라는 질문을 본 적이 있다. 누구라도 누를 거라면서 고통이 문제지, 죽는 게 무슨 문제냐고.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버튼을 누르지 않겠냐는 그 글을 읽을 때, 버튼을 누르는 자아가 아니라, 서슴없이 버튼을 누른다는 그 사람의 친구나 부모, 자녀나 동료에 이입해서 화가 났다. 삶과 죽음 가운데 관계의 그물들이 버튼을 누를 수 없게 한다.

 

N차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무언가 의미있는 이야기를 '백만번 산 고양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을까. 

모든 이야기는 지금의 어떤 세태, 게임을 끝내듯이 죽음을 선택하는 세태(그 여름, 설아와 고양이)-반복되는 삶 가운데 리셋버튼을 누르는 소녀가 나온다. 리셋버튼을 누르지 않기로 하는 것은 설아와 고양이 덕분인데, 부모된 자로서 소녀의 부모에 이입한다, 게다가 그 리셋이 자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 리셋이라서, 막 끝낸 육아서의 '스스로 전지전능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는 인상을 받는다-, 인간을 혐오하고 동물을 좋아하는 세태(저세상 탐정)-저승의 판사가 고양이다. 그 여름, 설아와 고양이, 나 북극곰의 사생활에도 그런 뉘앙스가 있다. 인간보다 고양이, 사람보다 돌고래나 북극곰-, 이성이나 이성애를 혐오하는 세태(강의대본)-이건 어린 아이나 청소년이 하는 어떤 말이나 태도를 인생 N차,야 할 때 그런 건가, 환생이라기보다 중학생 여자애가 인생 두 번째 산 사람처럼 기껏해야 스물 몇 먹은 남자 선생의 음흉함에 복수하는 이야기다. 화자의 관점이나 사건의 해결방식을 아이들에게 권할 수 없다. 나는 함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함정을 만들어놓고 함정에 빠졌다고 내 말이 맞지,라고 말하는 건 나쁘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이라는 게 고정값이라고 여기는 어떤 세태(파란불이 켜지면)-끽해야 두 시간 뒤의 미래를 안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참 나-가 드러난다. 

이야기를 만드는 스스로의 전지전능함에 도취되어 트렌드를 조합하여 전시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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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2-11-0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족님의 글은 참 통렬합니다...^^

별족 2022-11-02 08:53   좋아요 0 | URL
좋은 성정이 아닌데, 고쳐질 거 같지가 않-_-;;;
 
[eBook]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 - 대한민국 엄마 멘토 조선미 박사의 열린 부모특강
조선미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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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북플에 육아 마니아가 되었다. '육아' 마니아라니, 부인하고 싶다. 

그런데, 읽고 있는 책이 육아서고, 그 전에 읽은 책이 육아서라서, 부인도 못하는 지경이다. 

육아'서'마니아,라고 해 주지, 싶다. 내가 그렇게 많이 읽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참.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것, 고통없는 삶이 가능한 듯한 어떤 말들과 같은 지금의 어떤 세태가 맘에 들지 않는 중에 유튜브 영상을 보고 골랐다. 


좋은 말들이 많지만, 관심은 논리로 설명하지 못하는 삶의 비밀들과, 부모의 권위에 대한 말들이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 가정 내 질서와 세상의 질서는 또 다르다. 미숙한 존재를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가족은 가정은 다른 원리로 작동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을 준비시켜야 한다. 전적인 사랑만으로 작동하지 않고, 전적인 투쟁도 아니다. 부모가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아이는 자랄 수 없다. 


이때 부모가 나서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아이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면 아이는 '스스로를 전지전능하다고 느끼는 미성숙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 순간 부모는 나와는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내 요구를 들어주고 대신해주는 도구로서 존재하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자각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고 귀를 닫고 요구만 하는 일방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87/280)


기본적 신뢰감의 형성이 곧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에릭슨의 발달 첫 단계는 '기본적 신뢰감 형성'이 아니라 '기본적 신뢰:불신'으로 되어 있다. 신뢰감과 불신감의 비율이 적절하게 발달해야 한다는 것이지 추호의 의심없이 이 세상을 바라보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한 발달은 균형감이다. (89/280)


아이에게 세상의 현상이나 판단의 근거를 설명해주는 것은 친절한 일이고, 합리적인 태도다. 그렇지만 논리를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면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라고 강조하면 아이는 자기 자신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착각하고,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된다. 인지적으로 미숙하고,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는 부모의 결론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지적 능력이 성장하고 자율성을 추구하는 시기에는 이런 방식이 독이 될 수도 있다.(99/280)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권위는 따르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영향력이며, 권위주의는 힘을 발휘하려는 사람이 권한을 활용해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영향력이라는 점이다. 

권위주의에 대한 강한 혐오와 반발심은 정당하고 필수적인 권위조차도 부정적인 의미로 치부해버리게 만든다. 부모에게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 바로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부모의 상을 떠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0/280)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고 견뎌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썩 괜찮은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말로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거니와 이해한다 해서 그대로 따른다는 보장이 없다. 

논리로 세상을 배운 아이들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세상이 나를 움직이려면 근거를 대야만 한다는 태도를 배운 탓이다.(102/280)


해야 할 일의 당위성을 알려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아이의 이해를 돕는다. 그렇지만 논리로 이해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함께 알려주어야 한다. 심지어 논리에 어긋난다고 느낄지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아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103/280)


우리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가 상대를 존중해주면 상대방도 존중으로 나를 대하고, 내 생각만을 내세우면 상대도 지지 않고 자기를 내세운다. 내가 세상을 향해 보낸 존중과 감사, 신뢰는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존중은 자아의 밑거름이 된다.(110/280)


부모의 거울은 아이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을 균형있기 담아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 밑그림과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지도를 갖고, 세상을 항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12/280)


선과 악의 흑백논리에서 다양성에 대한 수용으로의 성장은 부모와 아이의 상호작용에서 시작된다. 부모가 합리적으로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아이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관점을 '전적으로 좋은 사람'에서 '대부분 좋지만 항상 좋지만은 않은 사람'으로 전환시켜준다. 요구를 거부당한 아이는 일시적으로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의 좌절감을 수용하고, 합리적인 규칙을 제시하며, 일관성 있게 같은 원칙대로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는 부모를 '나를 거절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경계를 제시하는 사람'으로서 재조명하게 될 것이다. (114/280)


부모는 주고, 자식은 받는 관계가 명백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받으면서도 아이들은 당당하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때조차도 받아내려고 한다.(229/280)


상처를 받은 것과 상처받은 사람이 되기로 선택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세상은 온통 가시밭이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날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나에게 달려드는 것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264/280)


가족 내에서 분화를 이루지 못한 아이들은 세상에 나아가서도 생각과 감정을 구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감정에 휩싸인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지 고심하는 대신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불만에 사로잡힌다.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 내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원인을 돌리며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각자의 삶이 분리되어 있음을 깨닫는 게 아니라 세상의 냉정함과 무심함에 위축되고 우울해진다. (27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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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랜드] 당신도 역시 그 스펙트럼 내에 있다

정리한 책 중에 포르노에 도전한다,(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53926)라는 책이 있다. 


스무살 무렵에 구해 읽은 책은 묘한 동감과 또 다른 생경함이 있었다. 

자유를 누리려는 사회에 진입한 여자인 내가 가지는 불만들-뭘 그렇게 다 하지 말래!!!짧은 옷도 입지 말고, 담배도 피우지 말고, 남자들이랑 놀지도 말고-과 충돌하고 무언가 삐걱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책 속의 어조의 강경함에, 그만큼 공감하지 못하면서 읽었을 거다. 기억이 안 나는데, 정리할 때 보니 밑줄이 있더라.

내가 사는 세상은 음란죄(https://ko.wikipedia.org/wiki/%EC%9D%8C%EB%9E%80%EC%A3%84)가 존재하고, 95년 연세대의 마광수 교수는 소설-그저 텍스트로 묘사했다고-을 쓰고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54XX72900091)

내가 이런 나라에 사는데, 허슬러와 플레이보이가 유통되고, 포르노가 산업인 나라에서 쓰여진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 나는, 아, 이 책은 음란죄가 있는 우리나라를 롤모델로 삼고 있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아마 우리나라의 어떤 제도나 상태들을 동경하고 있구나, 라고. 

비키니를 입고 강남대로에 오토바이를 타는 여자가 공연음란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나라가 우리 나라다. 포르노가 불법인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이미 충분히 너무나도 엄숙한 나라에서 무엇을 기대하면서 저런 강경한 주장을 퍼나르는 거지?라는 게 나의 의문이다. 뭘 바라는 걸까. 이미 불법인 나라에서. 포르노가 합법인 나라에서 불법으로 만들기 위해 하는 주장들인데. 

아이유나 설리가 롤리타 컨셉으로 장사한다고 시비거는 데 쓸모가 있으려나.

스펙트럼,이라고 하면서 아예 초장부터 잡으시려고 그러는 건가. 

초장부터 뭘, 잡아서 세상을 어떻게 바꾸려고 그러는 거지. 의문이 계속 생긴다. 




최근 서재에 '포르노랜드' 서평이 올라오고 있다. 여성학 책 다시읽기, 도서인데, 그 서평을 보고 썼는데, 북플에는 먼댓글인 게 보이지 않아서 책을 찾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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