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 - 대한민국 엄마 멘토 조선미 박사의 열린 부모특강
조선미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북플에 육아 마니아가 되었다. '육아' 마니아라니, 부인하고 싶다.
그런데, 읽고 있는 책이 육아서고, 그 전에 읽은 책이 육아서라서, 부인도 못하는 지경이다.
육아'서'마니아,라고 해 주지, 싶다. 내가 그렇게 많이 읽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참.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는 것, 고통없는 삶이 가능한 듯한 어떤 말들과 같은 지금의 어떤 세태가 맘에 들지 않는 중에 유튜브 영상을 보고 골랐다.
좋은 말들이 많지만, 관심은 논리로 설명하지 못하는 삶의 비밀들과, 부모의 권위에 대한 말들이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 가정 내 질서와 세상의 질서는 또 다르다. 미숙한 존재를 만들어,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가족은 가정은 다른 원리로 작동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세상을 준비시켜야 한다. 전적인 사랑만으로 작동하지 않고, 전적인 투쟁도 아니다. 부모가 균형을 잡지 못한다면 아이는 자랄 수 없다.
이때 부모가 나서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아이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주면 아이는 '스스로를 전지전능하다고 느끼는 미성숙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 순간 부모는 나와는 분리된 대상이 아니라 내 요구를 들어주고 대신해주는 도구로서 존재하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자각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고 귀를 닫고 요구만 하는 일방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87/280)
기본적 신뢰감의 형성이 곧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에릭슨의 발달 첫 단계는 '기본적 신뢰감 형성'이 아니라 '기본적 신뢰:불신'으로 되어 있다. 신뢰감과 불신감의 비율이 적절하게 발달해야 한다는 것이지 추호의 의심없이 이 세상을 바라보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한 발달은 균형감이다. (89/280)
아이에게 세상의 현상이나 판단의 근거를 설명해주는 것은 친절한 일이고, 합리적인 태도다. 그렇지만 논리를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면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라고 강조하면 아이는 자기 자신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착각하고,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게 된다. 인지적으로 미숙하고,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는 부모의 결론을 그대로 수용하지만 지적 능력이 성장하고 자율성을 추구하는 시기에는 이런 방식이 독이 될 수도 있다.(99/280)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권위는 따르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영향력이며, 권위주의는 힘을 발휘하려는 사람이 권한을 활용해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영향력이라는 점이다.
권위주의에 대한 강한 혐오와 반발심은 정당하고 필수적인 권위조차도 부정적인 의미로 치부해버리게 만든다. 부모에게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 바로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부모의 상을 떠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0/280)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고 견뎌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썩 괜찮은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말로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거니와 이해한다 해서 그대로 따른다는 보장이 없다.
논리로 세상을 배운 아이들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세상이 나를 움직이려면 근거를 대야만 한다는 태도를 배운 탓이다.(102/280)
해야 할 일의 당위성을 알려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아이의 이해를 돕는다. 그렇지만 논리로 이해되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함께 알려주어야 한다. 심지어 논리에 어긋난다고 느낄지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음을 아이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103/280)
우리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내가 상대를 존중해주면 상대방도 존중으로 나를 대하고, 내 생각만을 내세우면 상대도 지지 않고 자기를 내세운다. 내가 세상을 향해 보낸 존중과 감사, 신뢰는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존중은 자아의 밑거름이 된다.(110/280)
부모의 거울은 아이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을 균형있기 담아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 밑그림과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지도를 갖고, 세상을 항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12/280)
선과 악의 흑백논리에서 다양성에 대한 수용으로의 성장은 부모와 아이의 상호작용에서 시작된다. 부모가 합리적으로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 어쩔 수 없이 아이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관점을 '전적으로 좋은 사람'에서 '대부분 좋지만 항상 좋지만은 않은 사람'으로 전환시켜준다. 요구를 거부당한 아이는 일시적으로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의 좌절감을 수용하고, 합리적인 규칙을 제시하며, 일관성 있게 같은 원칙대로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는 부모를 '나를 거절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경계를 제시하는 사람'으로서 재조명하게 될 것이다. (114/280)
부모는 주고, 자식은 받는 관계가 명백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받으면서도 아이들은 당당하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때조차도 받아내려고 한다.(229/280)
상처를 받은 것과 상처받은 사람이 되기로 선택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세상은 온통 가시밭이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날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며 나에게 달려드는 것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264/280)
가족 내에서 분화를 이루지 못한 아이들은 세상에 나아가서도 생각과 감정을 구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혼자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감정에 휩싸인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어떻게 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지 고심하는 대신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불만에 사로잡힌다.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 내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원인을 돌리며 담을 쌓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각자의 삶이 분리되어 있음을 깨닫는 게 아니라 세상의 냉정함과 무심함에 위축되고 우울해진다. (271/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