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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달
얀 코스틴 바그너 지음, 유혜자 옮김 / 들녘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추리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내가 읽은 추리소설이라곤 정말 어렸을 때 집에서 굴러다니던 모리무라 세이지 같은 일본 사회파(미야베 미유키가 뜬 후에야 알게 된 용어다) 추리소설들이 전부다. 애거서 크리스티도 몇 권 정도 읽었을 것이다. 그래도 탐정이란 직업 자체에는 굉장히 흥미를 느꼈다. 아… 어렸을 땐 다 그런 거지.
어른(…)이 된 후에 읽는 추리소설은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이라든가 [빅 슬립] 정도다(이건 둘 다 하드보일드). 그리고 또 어째서인지 모르게 내 책장에 꽂혀 썩어가던 이 책까지 오게 됐다. 아마 "추리소설의 경계를 넘어선, 사랑과 죽음에 대한 환상적인 노래"라는 단평이 이 책을 사게 한 것 같다. 짧디 짧은 추리소설 독서 경력이지만, 그래도 비추어보건대 나는 적어도 과학수사나 치밀한 트릭 같은 데에는 관심이 없는 게 확실한 듯하다.
초반은 시점이 교차하다 보니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게 내 잘못인지 작가 잘못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문장과 문장 구성은 확실히 좀… 뭐랄까, 촌스럽다. 단문, 행갈이, 단문과 단문, 행갈이, 단문, 행갈이. 호흡이 빠르다 못해 가쁘다. 불필요한 행갈이가 지나치게 많다. 왜 근엄한 순문학 비평가들이 으레 아마추어들의 작품을 혹평할 때 이런 면을 보지 않던가. 내가 결코 그들 편인 건 아니지만, 이 책에 한해서는 그들에게 동의할 수 있다.
불성실하다.
불성실하고, 촌스럽다.
서사를 단문단의 연속으로 때우려 한다.
그렇다. 바로 이런 식의 행갈이다. 감각적인 수사(하루키라든가)나 모종의 정서(뒤라스라든가)로 이어지지 않는 이런 단문의 연속은, 그냥 불성실일 뿐이다. 불성실할뿐더러, 이미 앞 문장에서 쓴 것과 동어반복이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작가의 문장은 유치하다. 내가 이 책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접어놓은 곳이 있다.
그는 승리의 쾌감에 소리를 질렀다.
노란 두려움이 수천 개의 조각으로 흩어졌다.
그는 불사조였다.
그는 죽음이었다. (167쪽)
나는 여기서 비웃음을 터뜨렸다.
문장은 그렇다 치고, 일단은 추리소설인 이 소설에서 '사건'(혹은 플롯)보다도 우위에 둔 '심리' 부분은 그나마 흥미로운 면이 있었다. 스포일러 경고. 범인은 자신을 과시하며 연속 살인을 저지르고 그때마다 현장에서 작은 물건을 몇 개 가지고 떠난다. 그러고 이내 자괴감을 느끼고 현장에 돌아와 그 물건들을 원상복구한다. 살인을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과시'라든가 '자괴감' 같은 용어는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이건 내가 지나치게 단순화한 탓도 있지만, 애초에 소설 내적으로는 범인의 심리를 이해할 단초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 심리학 전문가가 해석해주면 또 모를까. 그럼에도 이런 이상심리 자체는 대단히 흥미롭다. 현상을 떠나, 해석을 독자에게 떠넘기는 것 또한 소설로서 나쁜 선택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심리도 모르는 판에, 같이 사는 사람, 옆자리에서 일하는 사람, 매체에서 접하는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형사의 심리는 범인의 심리보다는 직설적으로 서술된다. 그 서술의 친절함은 사별이라는 보편적인 심리적 고통에서 기인하는 바가 커 보인다. 플롯만 놓고 보면 주인공 형사가 사별을 겪어야 할 필연성은 없다. 따라서 이는 병리학적으로 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알 수 없는' 범인의 심리와 대조를 이루게 하기 위한 소설적 장치가 아닐까 싶다. 작가가 그렇게까지 계산하고 썼다면 아마추어리시한 문장 구성에서 깎인 점수를 상향할 이유는 있는 셈이다.
그 밖에도, 잘 읽는 분야가 아니다 보니 내가 포착하지 못한 장르적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음악이라는 복선이 친절하게 반복되다 보니 범인이 누군지 나 같은 독자도 금방 알 수 있었던 걸 보면, 딱히 장르적 재미를 추구한 것 같지는 않다. 정통 추리소설이 아니라, 인간 심리(혹은 범죄 심리)의 불가해성을 그리고자 했던 시도였다고 본다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고 해두자. 물론,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 다시 읽을 일은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