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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술을 마시면 간혹 보르헤스를 꺼내 읽곤 한다. 제정신으로 읽어도 어려운데 왜 술을 마시고 읽는가 하면… 역시 그냥 술기운을 빌린 지적 허영 때문이겠지. 그나마 15년 전에 읽던 황병하 역을 꺼내진 않는다. 새로 나온 송병선 역 [픽션들]이 아무래도 이럴 때 읽기는 낫다.
(그럼에도 101쪽 각주에 (저자 주) 표시를 빠뜨린 점이라든가(1쇄), 주격 조사를 잘못 사용한 것 같은 부분이 눈에 밟히는 걸 보면 민음사 책도 전에 찬양했던 만큼 완벽한 품질이 유지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특히 후자는 글이 워낙 어렵다 보니 원문이 문제인지 번역문이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어 읽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괴롭힌다.)
[픽션들]에서 좋아하는 작품은 딱 두 개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와 {바벨의 도서관}. 둘 다 보르헤스의 소설치고 접근성(?)이 좋은 편이라 그런지 자주 회자되는 듯하다. 후자는 워낙 유명하다 보니 다른 대중예술에서도 흔히 오마주되고, 아예 libraryofbabel.info 같은 사이트까지 있을 정도다. 두 작품 다 내가 경도하는 ‘무한’을 흥미롭게 다룬다.
사실 {바벨의 도서관}은 소설이라기보다 사고실험에 가깝다. 황병하 판본에 비해 2쪽 줄어 단 12쪽에 불과하지만, 익히 알려졌듯 이 작품의 함의와 반향은 너무나도 거대하다. 바벨의 도서관은 “거대하지만 동일한 책이 두 권 존재하지는 않”으며 “모든 언어로 표현 가능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둘 다 102쪽) 위키백과에서는 친절하게 이 도서관에 있는 책의 수를 계산해놨다.
25글자 ^ (410쪽 * 40행 * 80열) = 25 ^ 1,312,000 ≒ 2 * 10 ^ 1834097
우연히도 이 수는 대략 불교에서 말하는 비살라(10 ^ 1835008)에 가깝다. 단, 위키백과에도 주석이 달려 있지만, 이는 제목을 고려하지 않은 수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이쯤 되면 확률조차 의미가 없다. 25글자가 아니라 한글이라면 어떨까? 한자라면? 유니코드(…)라면?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게 다른 게 좋은 작품이라지. 오늘 읽으면서는 뭔가 물리학(?)적인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은 무한하지만 주기적이다”(109쪽)라는 화자의 주장은 언뜻 유리수의 정의를 떠올리게 하지만, 무수한 육각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게 더 적절하다. 더욱 정확히는 원통일 것이다. 다만 이렇게 기하학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평면(x, y축)의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상하(z축)의 무한(또는 순환)을 설명한 방법은 없다는 한계는 있다.
아니 나는 애초에 왜 이걸 문제라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는 거지… 굳이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세계의 누군가는 여기에 대해서도 분명히 연구하고 가설을 내놨을 텐데. 사실 이미 바벨의 도서관 어딘가에는 이 모든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하는 책이 있을 것이다. “말한다는 것은 동어반복에 빠지는”(108쪽) 일에 불과하지만, 내가 술을 마시고 갈겨쓴 이 졸문조차 그곳 어딘가에는 이미 존재한다. Q.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