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가 일본으로 떠나버린 지 벌써 5일째,
메일함을 뒤져봐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
로밍 서비스인가 하는 것도 안받았는지, 그녀의 전화기에선 꺼져 있다는 말만 되풀이된다.
그녀가 오는 다음주까지 난 도대체 뭘 하며 지내야 할까?
이것이 지난 사흘간 내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실존적 고민이었다.
그러다 그녀를 만났다.
너구리에 비하면 미모가 약간 처지지만,
20대라는 엄청난 장점은 미모의 떨어짐을 충분히 상쇄하고 남았다(29세다).
십년 전에 봤을 땐 19세였는데
어느 새 이토록 멋진 여자로 자란 거다.
얼떨결에 말했다.
"내일 식사나 같이 할래요?"
내 말에 그녀는 긴 속눈썹을 위아래로 흔듦으로써 동의를 표했다.
그녀가 환한 미소와 함께 날 찾아온 건 오늘 두시였다.
벌써 왔냐고 물으니 "왜요? 좀 빨리 보고파서 그랬는데..."라고 금새 시무룩해진다.
감정이 이토록 돌변하는 게 바로 20대의 특징,
그 모습이 귀여워 난 가방을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인근 횟집에서 생선회에 소주를 먹고
인근 저수지로 가서 이걸 탔다.

날은 더웠고, 그녀는 이상하게 무거웠다.
난 죽어라고 페달을 밟았지만 오리배는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녀가 준수한 미모가 아니었다면
20대가 아니었다면
난 권태기에 빠진 다른 커플들처럼 물결에 오리배를 맡긴 채 부채질만 하고 있었을거다.
"너무 재밌었어요"
그녀는 오리배에서 깡충 뛰어 선착장에 내렸고
난 휘청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뒤를 따랐다.
순대국으로 저녁을 때운 뒤 근사한 카페에서 팥빙수를 먹었다.
터미널에 그녀를 내려준 뒤 기차역으로 가려는데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한다.
"다음번에 또 오리 태워주실 거죠?"
그녀가 잡은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헬스 자전거라도 좀 타야겠구나..."
너구리에게 사랑을 고백할 뻔한 게 불과 닷새 전,
그런데 난 20대 미녀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본다.
그녀가 나처럼 나이 많은 남자를 이성으로 생각할까 의문이지만 말이다.
사랑에 대해 많은 저서를 남긴 다이에 호크스라는 일본 철학자는
"사랑이 출장갈 때 바람이 시작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너구리님의 일본 출장은 나란 놈이 얼마나 바람에 취약한가를 느끼는 계기가 됐다.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공자가 했던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나무는 가만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