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집으로'와 '미술관 옆 동물원'을 만든 이정향 감독의 작품이다.

이런 감독은 왜 자주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만큼 괜찮은 작품들인데,

그가 이번에 만든 영화는 용서에 관한 내용이다.

송혜교는 1년 전 약혼자를 오토바이로 쳐 죽인 10대를 용서하는 탄원서에 서명한다.

그냥 치어죽인 것도 아니고,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는 걸 알고 한번 더 치어 확인사살까지 한 끔찍한 놈인데 말이다.

그 과정에서 가해자 부모와 종교단체 사람들 등 많은 이들의 회유와 간청이 있었겠지만,

어찌되었건 겉으로 보기엔 멋있어 보인다.

 

그 후 송혜교는 종교단체의 부탁을 받아 가해자를 용서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다큐로 만드는 일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점차 용서라는 것에 회의가 들게 되는데,

예를 들면 이런 장면.

"벌써 감형을 받아 출소를 했더라고요. 저 같으면 출소한 뒤 제일 먼저 저한테 찾아와 사과를 했을 텐데

결국 저는 그 사람한테 사과를 받지 못했어요. 그때 했던 용서를 취소하고 싶어요."

송혜교가 알아보니 자기 약혼자를 죽인 그놈은 자기 반 아이를 시덥잖은 이유로 죽인 뒤 소년원에 가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가해자의 반성이 없는, 단지 형을 단축하기 위한 용서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데.

이런 식으로 관객을 조종하는 영화라 해도 그게 내 신념과 일치한다면 거부감이 없다.

 

용서에 관해서는 <밀양> 같은 영화를 비롯해 여러 군데서 얘기를 했으니 패스(요즘 이 단어가 끌린다)하고,

내가 공감한 건 심심할 때마다 자기 딸을 때리는 폭력 아버지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 딸은 공부도 잘 하고 신장병도 있는 아이인데도 아버지는 파이프까지 동원해서 딸을 때린다.

자기 기분에 따라서 때리는 거라 이유도 없지만,

"맞을 짓을 하니까 때렸지" & "내가 안때렸으면 니가 지금 이렇게 사람 구실을 했겠냐"는 게

아버지는 물론이고 오빠와 어머니의 뜻이다.

그런 가족이 싫어 집을 나온 그 딸-이름이 지민이다-에게 송혜교는 말한다.

자기는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해서, 그렇게 때리는 아버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버지가 널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라고.

하지만 송혜교는 모른다.

두들겨 패는 아버지는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역시 아버지 기분에 따라 신나게 두들겨 맞으며 자란 나로선

안맞고 커본 사람이 맞는 아이의 슬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게 짜증이 났다.

스포일러를 잠깐 말하자면,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송혜교는 지민이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그 전까지 혜교가 했던 말들은 밥상을 엎을만큼 짜증이 났다.

 

사람이 사람을 고의로 다치게 하거나 죽게 하는 걸 제외하면

이 세상에 맞을 짓이란 건 없다.

더구나 자기가 낳은 자식은 부모 스스로가 가장 존중해 줘야 하건만,

어떤 부모는 낳았다는 게 무한정 때릴 권리를 가진 것처럼 군다.

그게 다 자격이 없는 것들이 아무런 검증 없이 부모가 됐기 때문인데,

영화에서 지민이의 부모가 판사인 것처럼,

사회적으로는 그럴듯한 직업을 가지고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폭력아빠는 많이 있다.

검사-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돈도 제법 버셨던 울 아버지는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어서 우리를 그렇게 두들겨 패셨을까.

세월이 흘러서 나중에 아빠 나이가 돼보면 이해할 수 있을줄 알았지만,

마흔 중반인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아빠의 그 심보를 이해할 수 없다.

엄마가 어릴 적에 갈라서서 우리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면,

그리고 평생 써보지 못한 약사 면허증을 이용해 우리를 길렀다면,

내 어린 시절이 지금처럼 추억할 거 하나 없는,

길고 긴 터널만은 아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시절엔 갈라설 자유가 남자에게만 주어진 권리였고

엄마 또한 그다지 용기있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고난의 나날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2001년 12월, 어머니 연세가 62세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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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12-18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도 그런 아픔이 있으셨군요.
아픔이 그늘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부리님처럼 그 반대로 나타나는 사람도 있는가봐요. 그럼 거의 이겨내신 것 아닌가요?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자식에게 손지검 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리 2011-12-20 19:27   좋아요 0 | URL
뭐, 거의 이겨냈다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래도 제 어린시절의 추억이 하나도 없는 걸 떠올리면 속상할 때가 있죠

Mephistopheles 2011-12-1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혜교가 적극적으로 캐스팅을 원했던 영화였다는데....
이정향감독과 배우 송혜교의 조화는 적어도 부리님께 결과론적으로 크게 어필되지 않았나 봐요..^^

부리 2011-12-20 19:27   좋아요 0 | URL
아, 송혜교란 배우가 저한텐 미녀가 아니라서 그런 거구요
만일 그 배우가 정유미였다면 100% 공감했을 거예요
미모지상주의자 부리 드림

stella.K 2011-12-18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으로 용서를 주제로한 영화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밀양도 겉보기엔 용서를 말하는 것 같지만 문제제기만 할뿐 진정한 용서를 다루고
있지는 않잖아요. 이 영화도 그럴 것 같군요.
그런데 우리는 이상적인 부모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봐요.
이를테면 부모는 인자해야 하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주시는 어쩌구 하는 이데올로기요.
하지만 실제로 보면 그것 이면의 것들이 존재하는데 그것에 대해선 잘 얘기를 못하게 되죠.
부모와 자녀도 엄밀히 말하면 갑과을의 인간관계라 권력 내지는 지배구조가 존재한다고 봐요.
솔직히 저의 어머니도 좋으신 분이라고 인정은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선 자녀인 저는 다 좋다고는 보지 않거든요. 어머니와 딸 가깝고도 멀기도 하죠. 한번 화가나면 폭언이 엄청 나기도 했거든요. 놀라운 건 그것이 당신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고 하시죠. 이 부모 이데올로기는 자녀가 생각하는 거랑, 부모가 생각하는 거랑 다른 건가 봐요.

부리 2011-12-20 19:30   좋아요 0 | URL
님 말씀이 맞습니다. 진정한 용서를 다루는 건 아니어요. 사실 사람이란 어떤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용서를 한다는 게 그리 쉽지 않을 거예요. 님 말씀대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지배구조가 작용해서, 부모의 뜻대로 자식이 따라야 하는 구조 같아요. 근데 그 부모의 뜻이 늘 옳은 게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글구 제 경우엔...오래 같이 살다보면 서로간에 서운한 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서운함이 훨씬 더 크네요.

반디 2011-12-19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송혜교의 여우주연상 수상소식은 의외였습니다. 연기가 좋아졌긴 했지만, 그 속에 완벽하게 들어간 느낌은 없었으니까요. 영화가 한발짝 진전했지만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고요. 전체적으로 영화는 뭔가 겉도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발 더 나갔어야 했는데 그 선을 좀체 못 넘는다고나 할까? 지민의 대사 중에 그런 말이 있었죠, 타인을 아프게 하지 못하니 자신이 아프다는 말. 영화 끝무렵에 송혜교가 자신이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이 무척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부리 2011-12-20 19:32   좋아요 0 | URL
와앗 반디님 영화 전문가신가봐요. 제가 막연하게 느끼던 영화의 문제점을 날카로운 언어로 풀어주고 계시네요. 님 말씀하신 것도 그렇지만 자신을 죽이지 못하니 타인을 죽인다는 것도 꽤 공감이 갔어요. 용서라는 게 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였습니다.

sweetmagic 2012-01-03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주인공도 감독님도 무척이나 애쓴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뭔가 조금 한끗 모자란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가진 철학중에 하나가...절대 아이는 때리지 않는다. 무슨 잘못이라도 맞아야 할만큼 잘못하는 일은 없다. 인데, 저도 한대씩은 맞고 자란터라(저 같은 경우는 매를 벌긴 했습니다만 -_-;) 때려서 해결보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 고비를 힘겹게 -_-;; 넘길때 마다, 느낍니다. 때려서 해결하는 건 당장은 참 쉬운 방법이지만, 분명한 건 맞은 만큼 내 아이 안에 분노와 상처가 쌓이는 일이라는거. 무서운 일이라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