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의 일기
8월 15일(수)
날씨: 흐리다 한때 소나기
지하철을 타고 어디 멀리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 맞은편에 늘씬한 미녀가 앉았다.
책을 읽는 척하면서 수시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때 옆에 서있던 남자가 내 앞을 막고 선다.
난 더이상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이거, 비키라고 할 수도 없고...왜 저 인간은 하필 내 앞에 서는거야?"
속으로 궁시렁거리는데 그가 갑자기 허리를 굽히고 손을 땅으로 향하게 한다.
웬 퍼포먼스인가 싶어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그쪽으로 쏠렸다.
그가 나를 보는 순간 난 그게 내게 보내는 메시지임임을 깨달았다.
그가 만든 건 'ㅁ'이었고
그 글자는 "나 메피스토펠레스야!"란 뜻이었다.
말로만 듣던 메피스토님을 처음 봐서 그런지 겁나게 반가웠다.
난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생각보단 배가 많이 나왔는데, 그래서 번개에 일체 참여하지 않으신 듯했다.
그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다리를 쭉 펴고 바닥에 앉는다.
'ㄴ'자구나,라고 난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 메시지의 뜻도 금방 알아챘다.
"너구리에게 충실하라!"
너구리와 사귀는 걸 공표하고 난 뒤부터 감시의 눈길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걸 느끼던 차였다.
"과연 너구리그룹의 정보력은 대단해! 다른 미녀 보는 것도 간섭하다니!"
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메피님은 양팔과 양다리를 쫙 벌린 뒤 고개를 숙였다.
배가 나와서 그렇지 전형적인 'ㅈ'자였다.
앞의 두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읽어냈듯이 난 이번에도 그 문자의 의미를 알아냈다.
"지켜보겠다!"
약간의 두려움을 갖게 된 난 그러마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메피님은 만족한 듯 웃으며 다음 역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맛이 갔나 봐." "그러게 말야."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더 이상 앉아있기 뭐해서 다음 역에서 내렸다.
내 운명은 너구리님한테로 정해져 있다는 걸 상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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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서의 일기
8월 15일(수)
날씨: 습하고 더움. 소나기 와서 좋았음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데 앞자리 남자가 날 빤히 쳐다본다.
평소 미모가 뛰어나 시선을 많이 받긴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건 싫다.
다행히 한 남자가 그와 나 사이를 막아서는 바람에
해방될 수 있었다.
근데 그 남자가 온갖 이상한 동작을 취하는 거다.
남자들 중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많은 걸까.
다음 역에서 내려버렸다.
가급적이면 2호선은 안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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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의 일기
8월 15일(수)
날씨: 비, 가끔 해
지하철을 타고 새처럼너구리를 만나러 가는데
왠 반반한 남자가 넋을 잃고 앞자리 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걸 보면 난 참을 수가 없다.
미녀는 우리 사회가 경배해야 할 대상이지 저렇게 불쾌감을 주는 시선을 던지다니.
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가 불만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본다.
입모양으로 보아 "너 왜 내 즐거움을 방해하냐?"고 궁시렁대는 것 같다.
그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싶어 'ㅁ'자 모양을 만들었다.
의미는 간단했다. "많이 봤냐?"
그는 그 의미를 금방 알아듣는 듯, 웃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생긴 걸로 보아 머리가 나쁠 줄 알았는데 의외다.
내친김에 'ㄴ'자를 만들어 봤다.
"눈 빠지겠다"는 뜻이었는데 그는 이번에도 알아듣고 짙은 미소를 지었다.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난 'ㅊ'을 만들어 보였다.
"침 닦어!"란 뜻이었다.
근데 문제가 생겼다.
다리를 쫙 벌리는데 "북" 소리가 나면서 바지 가운데가 뜯어진 거다.
놀라서 고래를 숙이고 아래를 봤는데
그렇게 티는 안났다.
그 남자를 보니까 두려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임무를 다 했다고 생각해 다음 역에서 내리는데
그가 여전히 침을 안닦고 있다.
갑자기 회의감이 몰려왔다.
"저 인간, 지금까지 내 메시지는 다 알아들은 거야?"
이래서 시험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보람있는 하루였다.